-
을미년 새해 산이 내뿜는 희망의 소리를 듣는다
정극원 취재기자
2015-01-02
-
2014년 갑오년 새해를 열면서,
갑오년 새해가 찬연히 밝았습니다.
지난 묵은 어둠 다 걷어내고서
찬연한 밝음으로 맞이하길 바랍니다.
하나의 문이 닫힐 때
하나의 새로운 문이 열린다 합니다.
계사년의 문이 닫혔고,
갑오년의 문이 활짝 열렸습니다.
말의 질주처럼 박차고 나아가는 해가 되길 바랍니다.
새해가 되면
동해의 푸른 바다가 떠오릅니다.
붉게 떠오르는 햇살조차도 다 품는 바다입니다.
바다는 그렇게 거대하여도,
계절에 맞서지 않고서 차가우면 차가운 대로 더우면 더운 대로 포용하고 순응합니다.
바다는 맞서서 이기려 하지 않고,
계절이 만드는 섭리에 따르려 하는 것입니다.
태양보다도 더 거대한 크기의 바다가
눈에 보이지도 않는 계절의 변화를 다 받아드리는 것입니다.
새해에 동해로 가는 이유는
붉게 동터 오르는 첫 일출을 보기 위함도 있지만,
실은 거대한 바다의 포용에 몸을 담구기 위한 것일지도 모릅니다.
차가워지고 나서야,
더욱 푸른 소나무가 늠름하여 보입니다.
활엽수처럼 잎을 떨구고서 겨울을 맞이하면 쉬울 텐데,
푸른 잎으로 고스란히 견뎌야 하는 소나무의 겨울은 무척 힘들 것입니다.
차가움을 이기기 위하여 가동하는 열량의 소모가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그렇다하여도 소나무는 즐거운 것인지도 모릅니다.
천지간에 홀로 푸르기에 그럴 것이고,
그 푸름을 칭송하는 사람들이 있어 그럴 것입니다.
차가워지고 나서야 소나무가 돋보이는 이유입니다.
혹한의 겨울이 되어야 소나무의 항상성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인간에게 있어서 고마움이란 시간순서인가 봅니다.
지난 시간에 인간적인 고마움이 아무리 컸다 하여도,
현재 시간의 얕은 고마움 앞에 쉽게 변절하는 인간입니다.
잊는 것에 익숙하고 잇속을 따라 움직이는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얕은 것이라 하여도 현재의 이익은 남는 것이라 판단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우월할 수 있음은 지난 고마움을 간직하는데 있습니다.
인간의 심성이 선할 수 있음은 지난 고마움을 그리워할 줄 알기 때문입니다.
이미 지나갔기에 현재에 어떤 이익도 되지 않는 것이라 하여도,
인간이니 그 가치를 되새길 수 있고 고마워할 줄 아는 것입니다.
지난 고마움은 지금엔 이익이 되지 않으니 쉽게 잊고
현재의 이익은 조금이라 남는 게 있으니 택하게 되는 것인가 봅니다.
더 컸던 지난 고마움을 버리고
지금의 작은 이익을 택하는 인간들이 많아지는 세상은 미래가 없습니다.
지난 시간이 있었기에 미래가 탄탄한 것이지,
눈앞의 이익만 찾는다면 모래성을 쌓는 것과 다를 바가 없기 때문입니다.
지난 시간에 쌓은 돌축의 기반이 있기에 탑이 오래가는 것입니다.
모래로 쌓은 탑이라면 바람 한줄기 불어가면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것입니다.
지난 시간이 켜켜이 쌓여서,
그런 시간들에 감사하는 마음들이 있기에 삶이 풍성해질 수 있는 것입니다.
새해의 새벽이면
시골마을에 하나밖에 없던 동네 우물의 첫물을 길러오던 어머니들이었습니다.
그 정화수로 기도를 올리던 어머니들이었습니다.
삼신할매께 올리고
신령님께 올리고
동네를 지키는 수호신께 올리고
오로지 자식들이 잘 되라고 기도하던 어머니들이었습니다.
지난 시간에 어머니의 기원이 있었기에
오늘 자식들이 풍족하게 살게 된 것입니다.
그 자식들이 땀 흘려 일한 덕에 국가가 부강하여 진 것입니다.
어머니에서 시작한 그 인과관계를 누구도 부정하지 못할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염원이라 하여도
볼 수 없는 기원이라 하여도 보내고 또 보내면 쌓여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세상의 어머니들 덕에,
오늘 우리는 호강을 누리며 살고 있는 것입니다.
새해에는
살아오면서 받은 숱한 고마움들을 소중하게 여겼으면 좋겠습니다.
그리하면 매사에 마음이 풍요로워질 수 있는 것입니다.
새해에는
살아가면서 할 일을 판단하는 데 있어서
눈앞의 얕은 이익보다는 지난 고마움이 더 큰 잣대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하면 매사에 얄팍함이 끼어들 여지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2014년 갑오년 새해아침
정극원 취재기자
2014-01-03
-
대초원 몽골
대초원 몽골
신은 어이하여
몽골에 초원을 주었는가?
동이 터오른다.
엄중한 시간에 몽골의 초원위에 섰다.
몽골의 초원에 서면
볼 수 있음이 보지 못함과 같다.
보아서 눈에 담을 수 있는 것과
볼 수 없어서 눈에 담을 수 없는 것을 분간키 어렵다.
끝없이 펼쳐진 초원에서는 이편과 저편의 구별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초원은 깜깜한 어둠 같다.
칠흑 어둠속에서 천지분간이 어렵 듯,
초록 초원위에서는 보임과 보이지 않음을 경계 짓지 못한다.
경계 없음이 원융무애이다.
태초는 어둠이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야 천지창조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태초는 초원이었을 것이다.
아무것도 분간할 수 없어야 천지개벽을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초원위에 서면
하늘이 없다.
이미 하늘속에 당도하여 있기 때문이다.
초원위에 서면
땅도 없다.
땅은 이미 하늘에 닿아 있기 때문이다.
초원위에 서면
사람도 없다.
인간은 한갓 피조물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몽골의 초원에서는
하늘도 땅도 사람도 하나가 되는 것이다.
아웅다웅 다툼이 일상인 인간이
천지인 합일의 몽골 초원에서는 하늘과 땅의 격조로 승격을 하는 것이다.
세상에 태어나
몽골의 초원을 밟아보지 못한 자 세상을 이야기 하지 말지어다.
몽골의 초원에 서면
인간의 모든 일들이 하나의 가둠에 불과한 것임을,
더는 가지 못할 뿐인 것이지,
그 끝간데 없이 펼쳐진 몽골의 대초원을 밟아본 자만이 세상을 본 것이다.
세상을 보았으니 세상을 이야기할 수 있음이다.
거북바위이다.
태초에는 어디가 바다이고 어디가 땅인지 알 수 없는 혼돈이었다.
여기가 바다였음을,
알을 낳으려 거북이 자리를 잡자 땅이 되었다.
태초의 시간이 여기 몽골에서 시작하였을 증거하는 거북바위이다.
흙먼지가 휘날리는 거북바위이다.
너무나 숙연하여 정신이 혼미하여 진다.
태초의 시간속에서는 인간이 그러하였을 것이다.
거북바위가 걸음을 떼면 알에서 깨어난 새끼들로 번창하여 융성할지이다.
몽골의 시대가 그렇게 올 것이다.
카라호름(Kara Holm)
징기스칸의 수도이다.
세상을 호령하던 인걸인 간 데 없고,
시간만 켜켜이 쌓아올린 사원이 고스란하다.
가늠할 수는 없지만,
웅대했던 그 시간의 정신은 그곳에 있을지어다.
그리하여 형체는 허물어졌어도 사원이 고스란한 것이다.
그러하니 발을 들여 놓기만 하면,
그러하니 마음에 담기만 하면,
위로받을 수가 있는 것이다.
이유를 알 수 없지만
까닭을 알 수도 없지만
카라호름에 인파가 몰리고 몰리는 것이다.
카라호름 사원에 한번 오는 것이 몽골인의 일생의 소망이다.
지친 인생은 그곳에서 치유받는 것이다.
천하를 호령하였던 징기스칸이 그곳에 있기에 가능한 것이다.
죽어 징기스칸이
먼 곳 잘 볼 수 있게 하려고 그런 것이 아닐 것이다.
나(징기스칸)를 위함이 아니다.
먼 곳에서 길 잃지 말고 잘 찾아오라고 그런 것이다.
남(방문자)을 위함인 것이다.
징기스칸의 청동동상(250톤)이 웅장하게 솟았다.
동상의 웅장함은 어쩌면 징기스칸의 뜻이 아니었을 것이다.
곡해한 후세대들의 내보이고 싶어 저지른 불찰이었을 것이다.
곡해덕에 불찰덕에 징기스칸의 동상앞에 위압당한다.
시간을 잊었다.
찌푸린 미간을 때린 찬바람이 있어 새벽임을 감지한다.
잠들지 못하고서,
새벽하늘을 올려다본다.
별들이 총총하다.
철저한 혼자이다.
세상에 태어나 이렇게 혼자가 되기는 처음이다.
이별하고서,
고독한 혼자가 된다.
실패하고서,
슬픈 혼자가 된다.
인생사의 일이다.
초원에 서서 새벽하늘의 별을 품은 이 순간의 혼자는 그 차원이 다르다.
지상에 머무는 인간의 일들로서 혼자가 아니라
천상에 머무는 맑은 영혼으로서 혼자가 된 것이다.
진정 혼자가 되고 싶다면
진정 맑은 영혼을 누리고 싶다면,
몽골의 초원에서 새벽에 빛나는 별을 바라보라.
그 많은 별들은 어디에서 무엇을 하다가 머리위에 내려앉은 것일까.
머리위에서 폭우처럼 ?아져 내리는 별이다.
황홀함에 넋을 잃었다.
정신을 온전히 가누지 못한다.
나는 이미 세상에 없어지고 만다.
인간이니 차마 언어로서 아무것도 형언하지 못한다.
인간이 아니었다면 그 맑음을 다 표현할 방도가 있었을 것이다.
영혼조차도 흡입하는 그 순간의 광경이다.
손에 잡힐 듯 다가온 별들이 나에게 선물하여 한 것이 바로 그 순간이었나 보다.
무아지경이 되었다.
초원에 난 한 줄기의 강물이다.
그곳에 시간이 멎었다.
말은 물에 발을 담구어 시간과 소식을 얻는다.
물살을 느끼고서 세상의 이야기를 듣는 것이다.
광풍과 함께 비가 내린다.
몰아치는 비를 기다린 말과 양떼이다.
폭풍우를 피하지 않은 말과 양들이다.
비를 맞으면서 즐거운 목욕을 하는 것이다.
명절맞이처럼 목욕을 하고서 게인 하늘을 올려다보며 히잉하면서 말을 거는 것이다.
광풍은 몰아쳐
하늘과 초원을 맑게 만들어 주는 것이다.
폭우는 내리쳐
말과 양떼를 말끔히 씻어주는 것이다.
하늘이 몽골에 초원을 준 까닭은,
초원에 선 인간에게 하늘에 닿을 수 있는 기회를 주기 위함이다.
하늘에 닿은 초원이니
초원을 매개로 하여서 인간이 곧바로 하늘에 닿는 것이다.
낮추어 겸손하여야 할 인간이
일어서서 하늘에 닿을 수 있는 곳이 몽골의 초원인 것이다.
초원에서는 일어서서도 겸허할 수 있다.
이미 하늘에 닿아 있기 때문이다.
인간으로 이 세상에 태어났다면 누구나 일생일대에 한번은 누려야 할 순간이다.
정극원 취재기자
2013-07-29
-
창녕 관룡산 바위
정극원 취재기자
2012-01-12
-
2012년 임진년 새해
새해 벽두에
주먹을 불끈 쥡니다.
때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웅건하게 영접하기 위함입니다.
붉게 동터 오른 태양을 영접하면서 새해를 맞이합니다.
여명을 뚫고 태양이 솟아오르는 순간,
어둠에 묻힌 검은 파도가 경련을 합니다.
떠오름이 너무나 강렬하여 바닷물조차도 창공으로 치솟았습니다.
새벽의 격랑이 자자들면 한낮의 고요가 나래를 펼칩니다.
시간에 마지막은 없습니다.
지난 2011년이 제 역할을 다하였으니,
벅찬 2012년이 시나브로 온 것입니다.
시간은 인수인계 절차도 없이 당도합니다.
언제라도 새날입니다.
어제보다 다른 마음이라면,
오늘은 새날이 됩니다.
새날이 새벽에 열리는 것은 맑은 마음으로 맞이하라는 명령입니다.
언제라도 새해입니다.
지난 해보다 다른 다짐이라면,
오늘은 새해가 됩니다.
새해아침이 차가운 것은 총명한 다짐을 하라는 명령입니다.
한 해가 지나갔으니,
또 한해가 온 것입니다.
그 단초는 움틀거림입니다.
싹이 나고 잎이 자라고 가지가 굵어집니다.
매서움이 더 할수록,
더 잘 견디는 나무입니다.
잎이 무성할 때의 성화가 내공이 되었습니다.
저 홀로 서 있는 데에도,
흘낏 눈짓 한번 보내주는 길손의 응원덕입니다.
비탈에 심어진 감나무입니다.
가파르게 자란 감나무의 가지 끝자락에,
다닥다닥 붙어서 열매가 열리면 서로가 햇볕을 가릴까 염려가 되어,
적당한 간격을 두고서 열리는 감입니다.
그러니 햇살을 앞 다툴 필요가 없습니다.
고루 익어가는 감을 볼 때면 평화로운 것은 서로 다투지 않음에 있음을 봅니다.
아름답지 않은 동행이 있겠습니까.
강을 건너고,
개울을 건너고,
비바람을 함께 맞았다면,
그 역경을 다 물리치고서 함께 종점에 닿았다면,
그런 동행은 이미 아름답습니다.
보태는 것,
베푸는 것,
그것이 동행의 전제입니다.
그런 기운의 힘은 엄청난 것입니다.
가공할 혹한조차도 이기는 위력이 됩니다.
동행이란 차가움도 따스함으로 바꾸는 것입니다.
졸졸 흐르는 개울에,
곁가지에서 흘러들어와 보태는 물 한 줄기입니다.
모일수록 유유히 흐르는 도도한 강이 됩니다.
들을 적셔 풍성한 결실을 만들고 인간을 풍요롭게 합니다.
보태는 것에 조금은 없습니다.
보태는 순간에 어마한 추진력이 생기게 됩니다.
베풀어 주는 것에 미력이란 없습니다.
베풀어 주는 순간에 어마한 동력이 용트림하게 됩니다.
인생을 살면서,
우리는 얼마나 많이 좌절을 했었습니까.
수많은 뜨거운 담금질이 강한 무쇠를 만들듯,
인생의 낙방과 좌절은 견고한 디딤돌을 구축하게 합니다.
아무리 거친 풍파에도 무너지지 않는 거뜬한 철옹성이 됩니다.
가슴이 아리고,
몸을 가누지 못하고
그것이 더 깊은 상처가 되면 될수록,
그 때에는 견디기 어려운 것이라 하여도,
그것은 인생을 포동포동 살찌우는 자양분이 됩니다.
그것은 오늘을 건재하게 하는 발판이 됩니다.
삶이란,
최악의 경우에도 그 끝자락이 있는 것입니다.
절망의 정점에서 포기하려고 하는 순간이,
난관의 가장 밑바닥에 곤두박질 한 상태가,
다시 희망이 솟구치기 시작하는 최적의 순간이 됩니다.
지리산의 일출을 볼 수 있음은 적선이라 합니다.
일과를 마치고 귀가하가다 귀퉁이에 앉아 채소를 파는 할머니를 만납니다.
배추 두 포기 상추 한단을 삽니다.
그 덕에 할머니도 다 떨이하고서 귀가를 할 수 있습니다.
그 누구에게도 말 한마디라도 좋게 나눕니다.
매일 만나는 사람은 그 말에 행여 닥친 시름을 떨칠 수 있습니다.
지나치는 사람이라도 친절을 느끼고 다른 사람을 대하는 자세가 달라지게 됩니다.
그렇게 쌓아 가면 지리산 일출을 단번에 볼 수 있게 됩니다.
세상에 태어나서,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떠나가고 떠나오고 잊어버리곤 합니다.
지금 잊혀 져 있다고,
무의미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 처음에는 파장으로 요동하였을 것입니다.
그 처음에는 설렘으로 밤잠을 이루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지금도 같은 장소 같은 길을 지나갈 때면 떠올리게 됩니다.
삶에 있어서 큰 의미로 남아있습니다.
그 처음부터 건방을 떠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 처음부터 술수를 부리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 처음에는 누구라도 그 무엇이라도 여렸습니다.
초심은 농익어 꽉 찬 것이 아니고
여리고 순수하여 여백이 많은 것입니다.
초심은 오만한 독선이 아니고
두리번거리고 살피면서 경청하는 것입니다.
초심은 완성되어진 것이 아니라
어설프기는 하여도 선하고도 선한 것입니다.
초심의 본성이 그렇습니다.
그러하니 초심이면 그 어떤 희망도 다 일구어낼 수 있는 것입니다.
임진년 새해에는
초심으로 대망을 이루는 한 해가 되길 빕니다.
2012년 임진년 새해아침
정극원
정극원 취재기자
2012-01-02
-
웃음을 우습게 여기지 말라
정은상 취재기자
2011-10-17
-
양주 불곡산
정극원 취재기자
2011-09-15
-
천왕봉의 바위들
추풍(秋風).
외로움을 타는 걸까
혼자서 왔다.
쓸쓸함을 타는 걸까.
낙엽을 쓸어간다.
추풍에 낙엽이다.
추풍이다.
일진광풍이 아니라 하여도,
낙엽은 1년의 여정을 끝맺는다.
연한 녹색은 푸름이 되고,
청춘인듯 푸름은 붉음으로 물든다.
추풍이 툭 건드리면 낙엽은 진다.
추풍에 산은 물든다.
그제서야 바위가 비장한 위용을 내보인다.
푸름에 숨겨진 바위였다.
내보일 수 없는 속앓이였다.
바위가 구름을 타고 오를 수는 없지만,
홀로가는 구름을 잡아둔다.
검은 바위가 하얀 구름을 닮아 흰색이 되었다.
바위가 구름을 잡아두려고 한 목적인가 보다.
추풍이 길을 가르킨다.
천왕봉으로 오르는 길이다.
뒤돌아보면,
벌써 꽁무니를 감추었다.
산에서 뒤돌아보지 마라 한다.
풍경의 매혹에 반하여
앞으로 나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바위가 터 잡은 산에서는 그렇다.
칼바위(중산리 기점 1키로)이다.
숙연한 마음으로 대면한다.
칼바위가 콧날같다.
나란히 솟은 바위 두개가 쌍검같다.
복수를 꿈꾼 것도 아닌데,
산은 복수의 마음도 거두게 하건만,
조선개국을 피하여 입산한 선비에게 반역의 칼을 뒤집어 쉬었다.
애꿎은 선비가 희생되었다.
칼바위가 슬픔에 젖어있는 이유이다.
철다리 삼거리(중산리 기점 1,3키로)이다.
택일이다.
가파른 법계사이고,
완만한 장터목이다.
남한 최고봉 천왕봉.
어디로 오른들 편한 꼼수가 통할까.
묵묵함이 있어야 당도할 수 있다.
마치 수직인듯,
법계사쪽 가파름에 접어든다.
무척이나 힘겹다.
세속의 명리를 더덕더덕 달고 있는 몸이다.
세속의 무거움이 그리도 큰 것이다.
숨이 멎을 지경이다.
그저 가쁜 호흡이다.
호흡을 정비하라는듯
육중한 망바위가 나타났다.
마을을 수호하는 성황당같다.
치성을 탐문하는 검문소같다.
탄성을 지르고 만다.
수평의 탁트인 조망에 털썩 주저앉는다.
잠시 눈을 감는다.
캥거루바위이다.
그렇게 작명을 한다하여 책망당하지 않을 것이다.
법계사를 가리고 있는 바위이다.
캥거루처럼 주머니에서 떨어져 나간 바위이다.
하얗게 들어난 바위의 속살도,
떨어져 땅에 낙하한 바위도 지리산이 되었다.
2년의 세월이면,
분가한 캥거루바위가 평온을 찾기에 족한가 보다.
법계사(중산리에서 3.4키로지점) 위의 평바위이다.
일품이다.
풍기는 기운이 그렇다.
영겁의 세월을 겪어 거만할 법도 한데,
무욕을 움켜쥔 모양이 그렇다.
인간이 달리 할 수 있는 것이라곤 경탄밖에 없다.
평바위에 앉아 욕심도 명리도 다 비운다.
누구라도 평바위에 앉으면 그렇게 될 것이다.
되돌아본다.
인생의 되돌아봄은 회한이지만,
하지 못한 것을 한탄하는 인생이다.
산에서의 되돌아봄은 감탄이다.
평바위였기에 망정이지,
난간바위였더라면 추락하고 말았을 것이다.
심장이 요동친다.
뇌리가 텅비었다.
하마바위를 보았기 때문이다.
지축을 울리는듯 우뚝솟은 큰 바위이다.
하마바위의 부채살처럼 펼친 기운이 있어,
태초에 하늘이 열렸을 것이다.
하마바위가 통째로 솟았기에,
지리산의 모든 바위가 질서를 잡았다.
눈을 뗄 수가 없다.
걸음을 걸을 수가 없다.
평바위에 한참을 누운 후에 정신을 가다듬는다.
걸음이 한없이 가볍다.
속세의 때를 땀으로 흘렸다.
물고기바위다(평바위에서 100미터 위쪽).
코끼리 크기의 통바위에 개미크기로 새겨진 물고기이다.
물고기 머리가 천왕봉으로 향했다.
천왕봉이 몽매에도 사무쳤는가 보다.
통과의례가 있다.
형식이 아니라 진중한 환영이다.
개선문(천왕봉기점 0.8키로)이 영접에 나섰다.
우뚝 솟은 바위가 마치 쌍수를 치듯,
개선문이 겹으로 빗장을 열고 있다.
개선문(두개의 솟은 바위)에 기대어 본다.
한 점에 불과한 인간이다.
생명이 있기에 인간이 존엄한 것이 아니라
양심이 통하는 세상일 때 인간은 존엄할 수 있는 것이다.
존엄한 인간도 바위에 기대면 한 점 미물에 불과한 것이다.
천왕샘(천왕봉기점 0.3키로).
석간수가 스며 나온다.
천왕샘의 석간수는,
흘러내리는 것이 아니라,
끌어올리는 것이다.
영험한 바위가 기운을 모아 펌프처럼 끌어올린 물이다.
천왕샘물은 거대한 바위의 기운의 징표인 것이다.
목을 축이는 것이지만,
바위의 기운으로 몸이 충만되는 것이다.
지존이다.
그렇게 말하지 않고서는 배겨낼 수 없다.
천왕봉(1915미터)이다.
정상에 선다.
햇살은 경사각으로 내린다.
더 골고루 비추기 위하여서다.
지존의 무대를 더 화사하게 함이다.
정상에는 햇살조차도 조응한다.
지존이란 무엇일까.
근엄함이 아니라,
권세가 아니라,
한없이 가슴을 열고 다 받아드리는 것이다.
영겁의 세월도,
찰나의 세월도 다 품는다.
햇살이 천왕봉에서 염탐하려고 한 것도 그 세월일 것이다.
너그러이 관용하고 있는 천왕봉이다.
오후의 햇살을 다 빨아드리고 있는 천왕봉이다.
산행일: 2011년 9월 6일
정극원 취재기자
2011-09-07
-
2011 신묘년 새해인사
신묘년 새해가
창공너머로 밝았다.
고개를 든다.
하늘을 올려다보기 위함이다.
고개를 숙인다.
땅을 내려다보기 위함이다.
숙이면 저 자세히 볼 수 있는 것이다.
여명이 차갑다.
여명이 매개가 되어 어둠이 물러간다.
어둠이 저 만치 다 물러간 줄 알았는데,
아직 못 다한 미련이 남았는가 보다.
해 바뀜의 미련이 그러한가 보다.
마음인 것이다.
세상의 일들이 다 그렇다.
마음을 먹기에 따라서 희노애락이 정하여 진다.
물질이 아니라,
사물이 아니라,
마음이 정하는 것이다.
경인년 지난해에 속상한 것이 있었더라도,
올 해는 마음을 다독여 다 풀 수가 있는 것이다.
마음이 사람을 견디게 하는 것이다.
깊은 웅덩이에 빠져서,
하늘을 올려다보면 깜깜한 어둠이다.
올라가는 것이 힘들어도,
내려오는 빛 한 점만 있다면 희망이 된다.
절망에 지쳐 쓰르륵 졸리다가도,
위에서 내려오는 빛이 있어 견디어 낸다.
물질은 그 호가로 반응하는 것이지만,
마음은 그렇게 사소한 것에도 감동을 한다.
그러니 마음을 전하는 것이 제일인 것이다.
행여 머뭇거리다가 마음전하는 것을 놓치면,
더는 망설이지 말고 다음에라도 전하면 되는 것이다.
지난 시간은 아름답다.
하얀 점이 되어 지상으로 내리는 눈이다.
삶이란 그렇게 무수히 내리면서 명멸한다.
그러하니,
사라지기전에 더 많이 베풀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하니,
그 짧음의 시간에 타인을 더 많이 배려하여야 하는 것이다.
새해에 기원을 한다.
선행이 더 많이 통하기를,
악행이 사그러 들기를,
선행이 만드는 보람은 적고,
악행이 이끄는 상처는 크게 된다.
이편과 저편이 있듯,
대차대조표에 그렇게 그려지는 것이다.
생각을 한다.
조용할 때에 무엇을 할까?
편안한 사람이라면 돌이켜 본다.
보통의 사람이라면 선한 심성을 키운다.
건강한 사회란 그렇게 작동되는 것이다.
조용할 때에 사회가 더 밝아지는 것이다.
그러나
얕은 사람은 꼼수를 부린다.
약은 사람은 자신의 이익만을 획책한다.
그리하여 다른 사람에게 없는 말로 상처를 준다.
그리하여 자기보다 더 행복한 사람에게 흠집을 낸다.
그리하여 긍정의 사회를 위해 일하는 사람의 뒷다리를 잡는다.
얕음으로
술수로
잔꾀로 다른 누군가에 상처를 주고서도 못 뉘우친다.
그 상처받은 상대는 오래 잊지 않는 것이다.
꼼수를 써서 작은 이익을 챙기는 마음이,
남에게 타격을 입히더라도 자신은 빠져나가는 말이,
좁은 속내이기에 포용하지 못하는 작은 그릇이,
앞으로 나아가야 할 사회를 많이 퇴행시킨다.
악의 결집은 집요하다.
드러나면 안 되기에 감추어야 할 것이 많고,
부끄러운 것이기에 속으로 지켜내야 할 것이 많고,
추한 행태가 되는 것이기에 더 많은 동조자를 만들어야 하고,
그 악순환이 사회를 멍들게 하는 것이다.
그 악순환이 선순환에 큰 상처를 주는 것이다.
선함이 외로운 것이다.
악순환의 반격에 힘겨운 것이지만,
악순환의 흔들어 제침에 버거운 것이지만,
선함은 그 자체만으로도 의미가 된다.
누군가를 대신하여 행하여 준다는 건,
사회가 그 만큼 밝아진다는 의미이다.
누군가를 대신하여 욕을 얻어먹는다는 건,
다른 누군가가 그로 인하여 아량이 커진다.
사람이 사람을 괴롭히고,
사람이 사람을 시기하고,
사람이 사람을 가만두지 않고
잘하려는 것을 건드리고,
잘되고 있는 것의 뒷다리를 잡고,
생트집으로 발목을 잡는 사회는 선진으로 나아갈 수 없다.
참으로 많이 염려가 되는 우리 사회풍토이다.
나이가 들고
지식이 늘고
사회경험이 쌓여 주관적 생각을 할 수 있음에도,
우선 편하려고 그렇게 악순환에 부화뇌동하는가 보다.
국가든
사회든 선진이 되기 위하여서는,
잘하려고 하는 사람에게 박수를 보내야 한다.
그도 싫으면 적어도 할 수 있게 그냥 두어야 한다.
약은 수는.
그것이 폭발력을 가지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이 사회의 주류가 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은 사회를 부정적인 방향으로 이끈다.
부정의라 하여도 그들에겐 이익이 되는 것이니,
약은 것에는 쉽게 타협이 되어 무리를 만들게 된다.
그리하여 올곧은 다른 사람들이 상처를 받는 꼼수가 판을 치게 되는 것이다.
산을 오른다.
그 거대한 산의 영역 어디에 악행이 있는가.
그 존재의 어느 틈새에 악행이 스며들 수 있는가.
그 무엇이라 하더라도 인간의 하소연을 다 들어주는 산이다.
산은 그 넓은 품을 벌려서 인간의 것들을 다 받아주는 것이다.
큰산을 오르던,
야산을 오르던,
그것은 결국 내려오기 위한 것이니 멋지다.
사는 것이란 결국 내려놓기 위한 것이다.
산에 오르면,
가까이 보지 않고 멀리 보게 된다.
안만 살피지 않고 바깥도 살피게 된다.
꽁꽁 얼었다하여서,
생명이 다 숨죽이는 것이 아니듯,
혹한이라 하여서,
걸음을 멈추지 않듯,
또 선한 행함의 발걸음으로 뛰어가야 하는 것이다.
사람의 사는 것이란,
역경이라 하여도
곤경이라 하여도
힘듬이라 하여도
어려움이 하여도
서로가 마음으로 응원하고 마음으로 뭉치면 극복하기가 쉬운 것이다.
넘어지면 어떠랴.
의연하게 일어서면 되는 것을,
흙투성이면 어떠랴.
툭툭 털고서 가든 길을 가면 되는 것을,
우리를 생각한다.
‘함께’의 의미이다.
'가둠'이 또 다른 의미이다.
함께하되 가두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생각을 가두면 자기밖에 없게 되는 것이다.
마음을 가두면 타인에게 문을 열수가 없게 된다.
어울려 가는 것은 멋지다.
더불어 가는 것은 멋지다.
혼자가 아니라 우리가 되어 함께 가면 더 멋진 세상이 된다.
2011년 신묘년 새해,
태양이 붉게 떠오른다.
그 처음에는 한 점이었다.
한 점 붉음을 내밀어 온 세상을 다 비춘다.
선한 행함이 설사 온 세상을 그렇게 다 비추지 못한다 하더라도,
사라지지 않고 한 점의 빛으로만 남아있다 하더라도,
선함과 베품의 행함은 거대한 수레바퀴가 되어 세상의 지축을 울리는 것이다.
그런 신묘년 새해를 염원한다.
정극원 취재기자
2010-12-31
-
홍천 팔봉산
정극원 취재기자
2010-09-23
-
원추리
정극원 취재기자
2010-07-24
-
운문산-겨울의 풍경
정극원 취재기자
2010-07-16
-
가야산(만물상 능선)
정극원 취재기자
2010-07-09
-
오!은선
1. 히말라야 14좌
아직 어둠이다.
태양이 비치기 전이다.
등정을 감행한다.
히말라야를 오른다.
태양이 환하게 비치면,
신들도 깨어난다.
깨어난 신들이 인간의 도전을 훼방할 것이기 때문이다.
어둠에서는,
절대능력만 통한다.
엉성한 능력은 통하지 않지만,
수 천번의 반복으로 단련된 능력은 통하는 것이다.
온 정성을 다하여 삼가한 마음은 하늘도 감응하는 것이다.
태양이 비칠 것이다.
그 전에 벌써 새로운 역사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태양이 비추어 진다하여도,
이미 그 이전에 출발한 도전은 유효한 것이다.
세상은 새롭게 쓰여 지는 역사에 환호할 것이다.
히말라야는,
새로운 역사로 쓰여 지게 될 것이다.
4월 27일이면,
그런 새로운 역사가 탄생될 것이다.
한 동안은 아무도 깰 수 없는 새로운 역사가,
태양이 비치기 전에 태동되고 있는 것이다.
여성 산악인 오은선!
키 155센티미터의 체구가
온 정성을 다하여 준비하였으니,
하늘조차도 감응하여 세계 최고 14좌를 완등을 이룰 것이다.
숨죽여 기다린다.
그 위대한 역사의 순간을,
글쓴일: 2010년 4월 22일
2. 오! 은선
-여성 세계최초 히말라야 14좌 완등 성공-
산은 정복의 대상이 아니라,
오로지 자신과 싸우는 과정이다.
펼쳤다.
그래서 장엄한 것이 아니라,
아무도 범접하지 못하게 하여 장엄한 것이다.
형언할 수 없는 장엄함이다.
인간의 언어를 다 빨아드리는 광경이다.
그래도 행할 수 있다면 그것은 비장함이다.
장엄함에 도전하는 비장감이다.
안나푸르나(해발 8,091미터)
그곳은 산의 영역이 아니다.
그곳은 신의 영역이다.
신은 자신의 영역이 인간에게 침범당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 것이다.
신이 가진 마지막 자존심이다.
그것에 도전하는 인간의 목숨을 앗아가는 것이다.
신은 자존심을 지키기 위하여 인간을 거두는 것이다.
용서,
그것은 살아있는 자만의 특권이다.
도전,
그것은 살아있는 인간만의 특권이다.
용서는 과거의 영역이다.
그것이 종점이 되기 때문이다.
도전은 미래의 영역이다.
그것이 기점이 되기 때문이다.
용서는 가능을 만드는 종점이다.
도전은 불가능을 제거하는 기점이다.
오! 은선,
도전에 나선다.
체구 155센티미터이다.
그녀가 도전하려는 것은
여성 세계 최초 히말라야 14좌 완등이다.
그 기록이 목표는 아닐 것이다.
불가능이기에 도전한 것일 거다.
그냥 불가능이 아니라,
신의 허하지 않는 불가능에 도전인 것이다.
신이 분노한다.
불가능을 움켜쥐고 있는 신이다.
히말라야의 신은 인간의 가능을 좌절케 하는 것이다.
신은 그 처음에는 무시무시한 눈사태를 내린다.
그 올가미에 걸리기만 하면 누구도 온전할 수 없다.
그리고서 건드리기만 하면 폭발하는 부비트랩처럼
곳곳에 크레파스를 숨겨 놓고서 생명을 기다린다.
그도 안통하면 화이트아웃(거리를 분간할 수 없게 세상을 백색으로 만든다)을 펼친다.
그 가공력이 노리는 것은 목숨이다.
신은 자신의 영역을 그렇게 지켜내려는 것이다.
내내 묵언이다.
말 한마디라로 내뱉으면
신의 알아차리고 내칠 것이다.
걸음을 허하지 않으려고 준비할 것이다.
신에게 들키지 않는 말의 삼감이다.
숨소리도 죽였다.
행여 거친 호흡이라도 들키면,
가파름을 오르지 못하게 폭풍을 보낼 것이다.
말을 아꼈으니,
호흡을 감추었으니,
천지의 기운을 감지하기가 수월한 것이다.
물 한모금조차도 아꼈으니,
그 만큼이나 천지의 기운을 담을 공간이 확보된 것이다.
혼미하여 진 육체이다.
그리하여 무념무상이 된 것이다.
의식이 깨어난다.
한 줄기의 빛이니 쫓기도 좋다.
의식을 파고드는 영감이다.
그렇게 영감을 얻어 오르는 길을 여는 것이다.
몸의 오름이 아니라,
정신의 오름인 것이다.
그냥 사람의 정신의 아니라
신의 그만 틈새를 허락하고 만 정신인 것이다.
옹졸할 리 없는 신이다.
신이 그토록이나 지키려고 한 안나푸르나,
신의 오판이었다.
불가능을 모토로 내세운 것이 잘못이었다.
불가능을 내세우면 인간은 스스로 좌절할 줄 알았는가 보다.
불가능이기 도전하는 인간을 오판한 것이다.
신이 철옹성처럼 내세운 불가능.
그 불가능에 무수히 도전하는 인간,
성전의 산 안나푸르나,
그곳에서 인간 오은선이 위대한 한판승을 거둔 것이다.
그리하여 그녀는 히말라야의 여제로 등극한 것이다.
안나푸르나.
그렇게 지키려 했던 정상이다.
누구에게도 내주지 않으려 했던 정상이다.
드디어 그 등정을 허락한 것이다.
더는 오를 곳이 없다.
더는 머무를 곳도 없다.
정상은 정복의 대상이 아니다.
정상은 머물기 위함도 아니다.
오은선 그녀가 정상에 서서 외침 하나 남겼다.
"만세"
지켜본 인간은 말을 잃었다.
정상을 내준 산은 묵묵했다.
히말라야의 신도 그 외침에 승복했다.
인간도
산도
히말라야의 신도 경의를 표하며 하나가 되었다.
글쓴일: 2010년 4월 28일
정극원 취재기자
2010-04-28
-
속리산(천왕봉)
봄인 듯,
감춘다.
왔다가 저만치 퇴각하는 봄이다.
처녀의 치맛자락 같다.
시간을 꽁꽁 동여매고 있다.
바위인 듯,
내보인다.
터 잡아서 더 높이 솟아오른 바위이다.
하늘을 향하여 이룩하는 우주선 같다.
다투어 천상에 오르고 싶은가 보다.
볼 수가 없다.
차마 눈을 뜨지 못한다.
하나라면 마주할 것이다.
봉우리 마다 수놓은 장엄한 바위이다.
바위마다 저 마다의 형상으로 근엄하다.
감히 올려다 볼 엄두도 못 낸다.
전율처럼 바위의 위용에 포박 당한다.
걷지도 못한다.
겨우 눈을 뜬다.
하염없이 올려다본다.
하늘을 향하던 바위가,
스스로를 주체하지 못한 듯,
속리산에서는 바위가 하늘보다 더 높다.
겨우 한마디 말을 내뱉는다.
“압도”
숨어버린 전설을 찾듯,
상주 장암리에서 문장대를 향하여 오른다.
마치 사립문을 열듯,
구비를 휘익 돌 때마다
길목을 여는 통바위이다.
길의 가파름은 참을 만한데,
바위의 그 묵직함을 그냥 지나칠 수 없다.
손바닥을 툭 댄다.
온열기같은 기운을 감지한다.
길목의 바위가 전하려는 것은 기운만이 아닐 텐데,
미력한 인간이 느낄 수 있는 것이란 그것뿐인가 보다.
전설을 품었다.
문장대가 하도 장엄하여,
가만 둘리 없는 인간이 만든 전설이다.
세조가 그 바위에서 글을 읽었다.
문장대는 장부가 글을 읽은 곳이다.
글읽는 장부의 기개를 멸하려고,
국권을 침탈한 일본은 그곳에 철주를 밝았다.
열등한 일본의 비열한 꼼수였다.
큰 웅덩이다.
철주를 파낸 흔적인 것이다.
움푹 패인 문장대의 웅덩이에 가슴이 아린다.
아프고도 아픈 흔적의 전설이다.
오늘 이리도 가슴이 아팠으니,
내일 장부의 기개는 다시 펼쳐질 것이다.
열등한 일본의 흔적을 멸하였으니,
그 기개는 다시 세상을 호령할 것이다.
길은 멀지만,
마음은 희열이다.
천왕봉이 수평의 눈높이에 있다.
가늠할 수 없는 먼 거리이다.
엄숙하게 지나쳐야 할 열병식 같다.
각가지의 명명으로 도열하고 있다.
문수봉을 지나면
신선대를 마주할 것이다.
입석대를 돌아서
비로봉을 올려다 볼 것이다.
호락하지 않을 듯,
천왕봉이 그 바위 다 돌아서 오란다.
그 통과의 절차가 고맙다.
가녀린 호흡으로 천왕봉을 올려다본다.
뒤돌아보면,
몸이 굳어져서 돌이 되는 전설이 떠오른다.
천왕봉의 목전에서 뒤를 돌아본다.
산을 타고 오르는 해태를 본다.
해태형상의 바위가 통째로 봉우리를 덮고 있다.
그 거대함에 소스라쳐 뒷걸음을 친다.
그 완벽한 형상에 모골이 송연하다.
그 용맹함에 정신이 혼미하다.
겨우 스멀거리는 의식을 찾는다.
"공명"
때인 것이다.
정물화가 아닌 이상,
모든 것은 활동하는 것이다.
산이 그렇게 활발한 것이다.
좀 더 웅장한 바위이고 말았을 것을,
때를 만나 해태가 된 것이다.
그 거대한 바위해태가 꿈틀되면,
천지는 분간 없이 요동할 것이다.
그릇됨을 타파하고서 바른 곳으로 정돈될 것이다.
겉으로 볼 수는 없지만,
속으로는 이미 요동치고 있을 것이다.
때를 맞추어,
해태를 보았으니 더하여 무엇 할 것인가.
천왕봉.
하늘의 마음은 천심이고
인간의 마음은 인심이다.
그곳에 천심이 머물고,
그곳에 인심이 탄복한다.
물 한 방울 툭 튀기면,
한강으로,
금강으로,
낙동강으로 흘러가는 것이다.
그곳에서 세 개의 강이 나누어지는 것이다.
바다에 이르러야 합수가 되는 것이다.
천왕봉의 뜻이 그리도 멀리에 미치는 것이다.
천왕봉의 품이 그렇게도 원대한 것이다.
첨언:
천왕봉은,
2007년 그 오랜 천황봉이라는 일제의 오염을 떨고서 천왕봉으로 복원되었다.
정극원 취재기자
2010-04-23
-
단양 금수산
단양 금수산(해발 1016미터)
견딤이 아니라
기다림이었다.
혹한조차도 즐긴 바위이다.
혹한에 더욱 선명한 흰빛의 바위인 것이다.
희망을 기다린 증거이다.
기다림이란 만난을 떨치는 것이다.
기다림이란 한 꼭지를 끝나면 다음 꼭지로 가는 길목인 것이다.
단절이 아니라
이어감이었다.
계곡에 여름처럼 물이 흐른다.
푹 패인 계곡에 격동하는 물이다.
각기 다른 계곡을 달려온 물들이 폭포가 되었다.
용담폭포가 웅대하다.
단절을 떨치고서 낙수를 위해 합수한 것이다.
용담폭포가 요란스럽다.
이어가는 의례인 것이다.
가둠이 아니라
펼쳐감이었다.
숨고르기처럼 휴식한 나무이다.
겨울을 즐긴 나무들이다.
길을 가로막고 있는 잔가지이다.
유연하였으니,
막무가내인 바람도 이긴 것이다.
가늘었으니,
흐르는 시간에도 조응하는 것이다.
잔가지를 밀쳤다.
개선문을 만든다.
개선문 밑에서 꽁무니를 감추고서 산길에 접어든다.
잔가지는 하늘을 살피는 촉수가 된다.
하늘에 제일 먼저 맞닿아 있는 것이다.
멈춤이 아니라
나아감이었다.
살피기 위하여 멈춘다.
더 멀리 나아감이다.
동문재에는 시간이 고스란하다.
일용할 양식의 텃밭인듯,
옛 시간속의 삶의 흔적들이다.
산속으로 숨어든 사연이 들려온다.
민초들의 한이 그저 애달프다.
사라지고 마는 흔적이건만,
축대높이 쌓아 숨어살았던 흔적이다.
시공이 밀려와 가슴아리게 한다.
저마다의 숨어든 사연이 슬픈 것이다.
풍미하지 못하였지만 삶이었던 것이다.
하루하루가 처절하였을 것이다.
금수산에 처절미가 담겨져 있는 까닭이다.
들뫼삼거리이다.
살아서 움직이는듯
해태의 형상을 한 바위이다.
그 웅대함에 심장이 터진다.
난간을 오르는 그 절묘함에 소스라친다.
바다를 버린 해태가 금수산에 오르고 있는 것이다.
해태가 금수산의 비경에 홀린 것인가 보다.
해태가 금수산의 비단에 잠긴 것인가 보다.
해태가 금수산의 바위를 파도로 여긴 것인가 보다.
해태가 원래 산이었을 바다의 향수에 취한 것인가 보다.
터좁은 정상이다.
수놓았던 비단은 없고,
충주호가 연무에 희미하다.
마치 보드라운 실루엣인듯,
은은히 펼치는 충주호의 푸른 물이다.
아직 봄은 저기에 머물고 있으니,
충주호의 푸름만이 봄을 징표하고 있다.
더는 지체할 수 없다는 듯,
정상에 홀연히 돌풍이 인다.
우레처럼 천지를 요동한다.
비단이 먼저 숨어버린 이유는,
우레가 다가오는 것을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강풍을 탄다.
정상에 발을 떼면,
당도하는 그곳은 이미 천상일 것이다.
강풍이 만든 경계이다.
이편의 산이다.
저편의 하늘이다.
하늘로 끌어올리는 돌풍이다.
어디에서 달려온 것이기에 그리도 성난 것일까.
어디로 달려가기에 그리도 무서운 기세인 것일까.
돌풍이 만든 경계의 법칙이다.
어중쭝한 경계가 아니라,
너무나 선명한 경계인 것이다.
생과 사를 나누는 경계이다.
지상과 하늘을 나누는 경계이다.
강풍이 정상에서 그렇게 호령하고 있다.
강풍의 때림이다.
묵묵한 바위가 의연하다.
높이 솟았으니 그 바람을 다 맞는 것이다.
강풍에 깎인 바위의 속내가 진솔하다.
때림을 이기는 바위의 운치이다.
금수산이 절경인 까닭은 그 바위에 덮혀있기 때문이다.
강풍의 흔듦이다.
휘익 숙였다가 다시 고개드는 가지이다.
뿌리를 깊이 내렸으니 대범한 것이다.
흔드는 것을 이기는 나무의 지혜이다.
금수산이 비단처럼 수놓는 것은 그 나무가 피어나기 때문이다.
기다림이었다.
펼침이었다.
이어감이었다.
나아감이었다.
그리하여 금수산은 정물이 아니라,
그리하여 금수산은 매 순간 요동치는 것이다.
금수산에 난데없이 폭우가 내린다.
한 치 앞도 볼 수 없는 깜깜함이다.
아무도 못보게 하고서,
천지개벽을 만들려는가 보다.
귓불을 때리는 폭우이다.
맨몸으로 맞는 차가운 빗줄기다.
폭우가 청심환같다.
가슴을 쏴아하게 튀운다.
천지개벽의 현장에서 숨소리조차 죽였다.
정극원 취재기자
2010-03-27
-
영월 백덕산
정극원 취재기자
2010-03-18
-
경인년 새해를 열면서,
2010년 경인년 새해를 열다.
비스듬히 시선을 둔다.
차가운 바람이 불기 때문이다.
그러면 차가움으로부터 볼기를 보호할 수 있다.
바람을 피하기에는,
날씨가 너무 차가워졌다.
그럴 바에야,
차라리 가슴을 펴고서 맞는다.
한 해의 먼지를 쓸어가는 바람이다.
맞서는 바람이 참으로 시원하다.
아마도,
바람이 그렇게 정리를 마치면,
태양은 저으기 떠오르는가 보다.
동터 오르기 전의,
차가움은 극에 달하는 것이다.
미명은 그렇게 퇴각을 하는 것이다.
그렇게 새해가 오는 것이다.
새벽 즈음의 차가움은
바람이 태양의 눈치를 살피다가,
미동의 게으름을 떨치고서,
그제서야 정리정돈에 서두르기 때문인가 보다.
바람의 요동이 만든 차가움인 것이다.
그 맑음의 연후에,
태양이 둥글게 떠오른다.
둥글어 세상을 다 비추는 것이다.
부채살을 만들어
직선으로 내리는 햇살을 넌지시 바라다본다.
날마다 태양은 떠오르건만,
바라다보는 그 모습은 날마다 다르다.
올려다보는 그 색깔은 날마다 다르다.
하나에서 다름이 나오는 것인가 보다.
태양이 떠올랐으니,
그저 하루가 열리는 것은 아닐 것이다.
아침에 기상하였으니,
그저 하루를 시작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날마다 바둥쳐 보고,
날마다 구상해 보고,
날마다 꿈꾸어 보고,
날마다 도전해 보고,
그것이 생인 것이다.
생은 껍질을 깨는 것이다.
생은 상상하고 꿈꾸고 나아가는 것이다.
바람에 이는 나무도,
차가움에 움추리는 화초도,
얼음장 밑으로 졸졸 흐르는 물도,
그 가녀린 몸짓에도 의미가 있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살았음의 징표다.
살아 있으니,
기대어 보는 것이다.
기댈 수 있으니,
기꺼운 호흡을 나누는 것이다.
세상의 모든 것은 그렇게 의미가 있다.
무수히 시도한다.
나무들이 어떻게 이야기를 나누는지,
묵묵한 바위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산능선들끼리 저마다 어떤 밀어를 나누는지,
그들끼리는 분명 대화가 있을 것이다.
그들끼리는 분명 의미전달이 있을 것이다.
대화가 있기에 마주보는 것이다.
대화할 수 있기에 흩어지지 않고 군집하여 있는 것이다.
다만 자연의 한 조각인 인간인 우리가 들을 수 없을 뿐이다.
나무들의 이야기,
화초의 움틀거림,
산능선의 밀어,
그것을 들을 수만 있다면 다른 차원의 세상이 열릴 것이다.
대화란 그렇게 찬연한 것이다.
대화란 다름에 다가가는 것이다.
하나의 태양에서 다름이 나오듯,
여러 다름을 하나로 만드는 것이 대화이다.
대화는 원래로 귀일하는 것이다.
쓰르륵 화초가 꽃피우는 소리,
조르륵 개울물이 흐르는 소리.
싸르륵 소나무숲에서 부는 소리,
자연은 어즈버 인간에게 그런 선물을 준 것이다.
자연의 소리를 청음하듯,
다른 사람의 말을 먼저 경청하는 것이 대화이다.
2010년 경인년 새해에는,
그 누구라도 마주하여 격의 없는 대화로 꿈과 희망을 나누는 한 해가 되길 염원한다.
대화가 부재하면 희망을 바라보는 세상 또한 존재하지 않는 것이니 말이다.
2010년 경인년 희망의 태양 새해 아침을 기다리며...
정극원 취재기자
2009-12-30
-
영천 기룡산
자연의 것은 인간의 것에 비해 항상 위대하다.
자연에 가까운 생명체는 인간에 비해 영적으로 더 뛰어나다.
역설적으로 말하자면,
인간은 능력이 우월하지 못하기에 세상을 지배하는 것은 아닐까?
자연앞에 인간은 왜소하다.
그런데에도 세상은 인간에 의하여 가공된다.
정복과 파괴를 더 본성으로 하는 데에도 인간만이 우월하다.
직감하는데 있어서 더 무능한 인간들이지만,
자연과의 영적인 대화에 있어서 더 무력한 인간들이지만,
그럼에도 지구를 지배하고 있는 이유는 공존에 있다.
그럼에도 더 큰 능력을 행사하는 것은 기록하는 데에 있다.
그럼에도 더 번창하는 것은 기원하는 데에 있다.
인간의 정복을 피해가는 자연의 방법이 대재앙이다.
홍수가 되어,
태풍이 되어,
지진이 되어,
화산이 되어,
인간에 의한 자연의 파괴를 경고하는 것이다.
파괴되어 버린 자연을 원상으로 바꾸려 하는 것이다.
선행을 많이 베푼 사람이 아주 운좋은 날이면,
백록(흰 노루)을 만날 수 있는 산이 기룡산이다.
전설의 이야기가 아니라 현재의 이야기이다.
묘각사에서 차가운 물한모금으로 시작하는 걸음이 가볍다.
수북하게 쌓인 낙엽을 밟으며 능선을 향하는 몸짓이 설레인다.
수십리 길의 산을 넘어야만 했다.
그렇게 절에 올 수 있었던 그 옛날이 떠오른다.
마음이 단순하여 소망도 더 명료하게 이루었을 것이다.
걸음이 더 건강하여 정신이 더 고결하였을 것이다.
삶의 지향이 더 소박하여 이웃으로부터 행복을 만들었을 것이다.
단숨에 나아간 0.8키로의 겨울산길을 걸어 산능성이에 당도한다.
양면의 바람을 동시에 맞으며 통쾌한 정한에 젖는다.
소통이 있어 날씨가 차다.
하얗게 쌓인 잔설이 띠를 만들어 길게 선을 긋고 있다.
이편의 걸어가야 할 길만이 그런 것이 아니라
저편의 바라보기만 하는 길도 그렇게 일목요연게 드러내고 있다.
정상으로 이어진 능선이 기운을 준다.
양면을 볼 수가 있어 눈에 기운을 얻고,
소통하는 공기로 호흡할 수가 있어 코가 뚫린다.
목적지가 가까이에 있서 마음이 가볍다.
몸에 담은 욕심을 벗어던질 수 있어 걸음이 경쾌하다.
산 공기는 한없이 맑은데,
산의 능력으로 치유할 수 없는 도시의 공기들이다.
그로 인해 도무지 멀리까지 조망하지 못하는 것이 안타깝다.
정상에 서면,
안타까움은 멀고
공명처럼 세상을 다 삼키는 마음은 넓다.
기룡산의 정상에 우뚝선다.
정상석에 적힌 해발 931.8 미터를 읽는다.
윙 소리는 내는 차가운 바람도,
응달을 타고 오르는 혹한의 공기도 개의치 않는다.
그 어딘가에 남아있을 전설의 흔적을 찾아 본다.
그 어딘가에서 불쑥 나타날 백록을 기다린다.
백록의 위엄이라면 분열과 파탄의 시대를 접고,
공존과 공영의 시대가 도래될 수 있기 때문이다.
정극원 취재기자
2009-12-16
-
포천 운악산
멈춘다.
창조가 시작된다.
멈춤의 간극에서 새로운 창조가 태동한다.
어둠이다.
밝음이 시작된다.
어둠의 교차에서 환함이 펼쳐진다.
천지창조란
멈춤과 어둠의 떨침이다.
심장이 멎었다.
운악산에 압도당한다.
뜨거움이 얼어붙은 것이다.
다시 박동하지 못한다 하여도 억울하지 않을 것이다.
이미 운악을 보았으니 말이다.
의식이 멈췄다.
운악산에 강타당한다.
정신이 풍경속으로 이탈한 것이다.
다시 깨어나지 못한다 하여도 원망하지 않을 것이다.
이미 운악을 품었으니 말이다.
천지창조.
운악산에서 일어나고 있는 광경이다.
심장이 다시 박동한다.
나는 따뜻한 인간이기 때문이다.
의식이 다시 깨어난다.
나는 겸허한 인간이기 때문이다.
미간을 찌푸린다.
화가 치민 것이 아니라 세세하게 보기 위하여서이다.
건성이 아니라 음미하기 위함이다.
떡하니 가로막고 있는 눈썹바위이다.
사방을 에워싼 나무들이 바위의 호위병같다.
눈썹바위가 인간의 마음을 읽었는가 보다.
눈썹바위가 사람처럼 미간을 찌푸리고 있다.
호위를 받아 지켜야할 엄중한 밀명이 있는가 보다.
어느 누구도 산에 들지 못하게 하라는 것인가 보다.
길목 지키는 눈썹바위가 사뭇 근엄하다.
눈썹바위에 아랑곳 않는다.
바위의 등줄기를 타고서 걷는다.
눈썹바위의 정상능선에 털썩 앉는다.
그 온화함이 체온같다.
그곳에 잠시 잠들 수 있다면,
천년의 시간에 감전될 것이다.
천년의 세월동안 의연한 눈썹바위인 것이다.
목조전망대에 선다.
그 난간이 견고한 까닭은
붙잡고서 의탁하라는 것이다.
눈앞에 펼쳐진 병풍바위이다.
수평의 펼침이 백만대군같다.
수직의 펼침이 마천루같다.
꿈이라면 깨어나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눈썹바위가 미간을 찌푸리고서 지키려한 것이 바로 이 장엄함이었던가
눈썹바위가 길을 가로막고 훼방하려한 것이 바로 이 웅대함이었던가.
그것은 바로 멈춤과 어둠을 물리친 천지창조인가 보다.
전망대의 난간이 튼실하지 않았더라면,
나는 그만 천지창조의 불랙홀로 사라졌을 것이다.
나는 형언할 언어를 잃고서 신음처럼 외마디 부르짖는다.
“미증유”
미륵바위이다.
미륵바위가 땅에서 터 잡아 솟아 오른 것이 아니라
미륵바위가 허공에 먼저 자리를 잡았을 것이다.
바위결의 문양이 위에서 아랫방향이 그 방증이다.
허공에 심은 미륵바위가 뜻이 무너져 내리지 않게 기둥바위들이 바치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미륵바위란,
하늘을 살피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살피는 것이다.
허공에 우뚝 솟은 미륵바위가 인간을 닮아 보이는 까닭이다.
가파른 바위난간에서 마주 앉았다.
미륵바위에 눈을 맞춘다.
차마 바로 뜰 수가 없어 지그시 눈을 감는다.
얼마나 흘렀는지 시간조차도 잊었다.
휘익 언덕구비를 돈다.
그곳에 아늑함이 머물러 있다.
쓰윽 깎아지른 가파름을 오른다.
그곳에 소통의 바람결이 상존한다.
만경대로 오르는 길이다.
제법 수고로움을 다하여야 오를 수 있다.
성벽같은 폼새의 만경대이다.
만경대는 공고한 성벽이 되어 아늑함과 소통을 지키려는가 보다.
마치 응달인 듯,
잔잔한 어둠의 배경 속에 있는 광경이다.
서광인 듯 하늘에서 내리는 한 줄기의 빛이다.
그 조차도 만경대의 장엄함에 빨려 들어간 것이다.
숙연하고 또 숙연하여진다.
태양의 빛조차도 소멸되는 곳이기 때문이다.
그곳에 다시 환한 빛이 감돈다면,
그곳에서 천지창조의 시작이 되는 것이다.
정극원 취재기자
2009-12-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