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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10-07-16 10:17: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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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도 운문산(해발 1188미터)


낮은 곳에 선다.
가장 낮은 곳이다.
더는 내려갈 곳이 없다.
높은 곳에 오른다.
가장 높은 곳이다.
더는 올라갈 곳이 없다.

낮은 곳에서,
둘러보면 혼자이다.
가장 낮은 곳에서 서서 세상에 대적한다.
그러하니 혼자라도 세상은 아직 살만한 곳이 된다.

높은 곳에서,
둘러보면 무리가 생긴다.
가장 높은 곳에서 서서 세상에 겸허해야 한다.
그러하면 무리에서도 세상이 속속 다 보이는 것이다.
무리에 있으면서도 오만을 물리칠 수 있다.

운문산이 마치 석류같다.
그 둥글기가 석류모양같다.
그 두꺼움이 석류껍질같다.
껍질로 알을 감싸고 있는 운문산이다.
껍질이 되어 고이고이 능선을 지키려는 산이다.

겨울의 운문산이다.
그 초입에서 모성애가 떠오른다.
어린아이를 품은 어머니 같은 형상이다.
초입부터 엄청 가파른 산길이다.
초입부터 심층의 계곡이다.
산은 거친데 마음은 한없이 안온하다.
어머니의 크나 큰 품에 접어든 것이다.
석골사에서 시작한 산행이다.
석골사를 끼고 있는 계곡이 그렇게 깊다.

선녀가 못하는 것이 하나 있다.
앉는 것을 못하는 것이다.
햇살내리는 바위에 턱하니 앉는다.
옛적에는 선녀가 내려 멱 감았을 것이다.
산에서는 계곡이 선두에 서서 겨울채비를 한다.
계곡의 물이 그 청아한 맑음으로 변색하는 것이다.
그곳이라면 분명 선녀가 목욕을 즐겼을 것이다.

깊은 산은 그늘도 짙다.
그늘조차도 산을 닮은 것이다.
옛적에는 그 그늘에도 터 잡고 살았을 것이다.
산길 양옆의 집터며 논의 흔적이 아스라하다.
산천은 세월을 대면하여 피하지 않는데,
인간은 세월에 대적하지 못하고 사라지는 것이다.

화살촉같다.
딱밭재를 가리키는 이정표다.
발밑에 지천인 돌들을 밟는다.
역동하는 기운이 돌에 부딫혀 소리가 요란하다.
돌들이 소리로서 인간에 응수를 하고 있다.
깊은 산임에도 야트막한 곳의 오솔길이다.

피난하여 살터를 찾는다.
살터를 찾아 입산을 하였을 것이다.
저마다의 사연은 달라도 그것은 처절한 생존이었을 것이다.
나무에 감춰진 산길은 그 생존의 징표인 것이다.
임란에서는 왜적의 침탈을 무찔렀던 의병의 길이었을 것이다.
조선말기에는 관가에 대항하는 민초들의 길이었을 것이다.
동란의 전후에는 이념에 목숨을 맡긴 빨치산의 길이었을 것이다.

그들이 걸이다.
그 길을 따라 걷고 있는 것이다.
그들의 입산은 하산이 없었기에 너무나 처절하였던 것이다.
그 사연을 다 알고 있다는 듯 바위가 한낮의 상념에 젖어있다.

딱밭재에 바람이 인다.
능선과 능선의 연락병처럼 바쁘다.
딱밭재의 차가운 바람을 온몸으로 맞아 머리가 상쾌하다.
그 맑은 머리로 상념의 바위들을 하염없이 올려다본다.
딱밭재에서 올려다보는 바위는 그 품격에서 명품인 것이다.
바위위에 상생하고 있는 푸픈 소나무가 그렇게 만들고 있다.
명품은 혼자 즐기려 감추는 것이 아니라 함께 더불어 있음인 것이다.

인간의 것은 옹졸에 친하다.
움키고 감싸면서 자신을 가두기 때문이다.
산의 것들은 관용에 친하다.
능선은 하늘에 닿고 다른 산에 이르기 때문이다.
능선에 소복하게 쌓인 하얀 눈에 뒹군다.
바람을 피하여 한곳에 모인 적설이 고마운 것이다.

사각사각 눈길 걷는다.
걸으면서 남기는 발자국의 의미가 떠오른다.
“들판의 눈위에 발길 함부로 남기지 마라.
뒤따라오는 사람의 좌표가 된다.”
사명대사의 “답설야중(踏雪野中)”의 글귀이다.
내가 다시 걸어가지 않는다고 눈길을 망칠 수는 없는 것이다.

운문산의 바위이다.
산비탈에 듬성듬성 바위이다.
그 모양새가 그야말로 석류를 닮았다.
곳곳에서 알알이 혼자서 산중턱을 차지한 바위이다.
알알의 바위들은 서로가 사무쳐 산의 가운데로 기울고 있다.
산중턱의 바위가 온통 그렇게 특색을 띠고 있다.

능선위의 바람이다.
그 차가움을 윙윙 예고음으로 들려준다.
저편 산넘어 운문사 사리암이 하얀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이편 산안에 상운암이 평화로움을 구가하고 있다.
저 멀리의 사리암이 마치 쪽빛 바다 망망대해의 하얀 돛단배 같다.
감탄이외에 그 무슨 말로도 덧칠할 수 없는 절경이다.
그곳에 들면 바위를 뚫고서라도 승천할 수 있을 것이다.
산 중턱의 사리암의 하얀 운치가 하늘에 닿아 있는 것이다.

정상에 선다.
운문산의 구름은 간데없고 엄동설한이다.
구름이 운집하여 문하를 이루었을 것이다.
구름은 저 홀로 휴식을 떠난 것이다.
차가운 날씨가 구름에게 겨울휴가를 준 것인가 보다.
구름없는 저 편의 끝간 곳에 천황산이 보인다.
딱 1미터가 더 높은 천황산(해발 1189미터)이다.
첩첩으로 숨어있는 재약산이 그 오른편에 우뚝하다.
보무도 당당한 진군을 환영하는 듯 품을 벌린 간월산이 왼편에 편안하다.

늘 그러하듯이 정상에 서면 마음이 숙연하다.
늘 그러하듯이 올라선 정상보다는 더 높은 정상이 있는 것이다.
늘 그러하듯이 정상에 올랐으니 하산을 하여야 하는 것이다.
늘 그러하듯이 정상에서는 자연앞에 겸허하여지는 것이다.
늘 그러하듯이 나는 한낮 인간에 불과한 것이다.

상운암에서 차가운 물 한모금 마신다.
결빙을 뚫고서 졸졸 솟아나는 샘물이다.
산이 나를 놀려 먹으려고 농을 건다.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운 명당을 말하라” 한다.
나는 주저하지 않고서 말하리라.
그곳은 바로 이곳 상운암이라고.

나는 오대산의 적멸보궁을 절터라 한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경치가 “절경”이니,
이에 비견하여 가장 멋진 절의 터는 “절터”인 것이다.
그 적멸보궁이 그 내보임으로서 분명 명당인 것이다.

상운암의 스님이 떠오른다.
낮선 내방객을 위하여 큰 주전가 가득 차를 내놓는다.
산에 귀하지 않은 것이 무엇이 있으랴.
그 귀한 온갖 약초를 다 넣어서 끓인 차이다.
수인사를 나눈 내방객에게 내어 주는 것이 아니라.
그 누구라도 마음껏 마실 수 있도록 내놓는 차이다.
스님의 한량없는 그 베풂은 아마도 명당의 기운도 한 몫을 하였을 것이다.
그곳의 사람조차도 감응하게 하는 곳이 그보다 더한 명당은 없는 것이다.

상운암의 요사채가 소담하다.
처마에는 고드름이 키재기를 하고 있다.
고드름은 산의 꼭대기를 닮아서 뾰족한 것이다.
고드름은 그 객기를 부려서 산의 형상으로 크는 것이다.
고드름 한 개를 입에 웅얼거리면서 십어 먹는다.
상운암 요사채의 굴뚝에서 장작불의 연기가 피어오른다.
명당을 만나 피어오르지 못하는 것이 그 무엇일까.


산행일: 2007년 12월 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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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극원 취재기자 정극원 취재기자의 다른 기사 보기
  • 대구대학교 법과대학 학장
    대구대학교 법대 졸업
    독일 콘스탄츠대학교 법대 법학박사
    한국헌법학회 총무이사(전)
    한국비교공법학회 총무이사(전)
    한국공법학회 기획이사
    한국토지공법학회 기획이사
    유럽헌법학회 부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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