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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7호 (2011.12.1발행) - 6.25 전쟁때 고아 하우스 보이가 미…
6.25 전쟁때 고아 하우스 보이가 미백악관 대통령 안보 비서관이 되기까지 (4편)
(※ 지난 줄거리)
6.25 전쟁때 부모님이 인민재판에서 총살형을 당하는 모습을 본 당시 14살의 임종덕 소년은 서울역을 무대로 소매치기와 절도 짓을 하면서 자신이 데리고 있는 100여명의 어린 고아들을 먹여 살렸다. 그러던 어느날 임종덕 소년에게 그의 앞길을 인도해 줄 사람이 나타났다.
즉 그날도 서울역 앞에서 소매치기 대상자를 관찰 하던중 한 미군장성이 탄 승용차가 도착하는 것을 보았다.
임종덕은 불과 몇십초 사이에 승용차의 뒷좌석에 놓였던 가방 하나를 들고 사라졌다. 그 가방안에는 당시 한창 진행 중이던 6.25 전쟁에 미국 공군의 특급 작전이 담긴 극비 작전 문서가 들어 있었다. 미군의 수사 의뢰를 받은 한국 경찰은 이것은 틀림없이 임종덕의 소행으로 쉽게 판단 임종덕을 찾아가 가방을 받았다.
그런데 그 가방 안에는 극비 문서가 이미 사라졌다. 임종덕은 가방에 든 카메라만 남대문 시장에 팔았다고 하면서, 서류종이는 서울역 건물 옆에 버렸다고 했다. 다행히 그 극비 문서는 버려진 장소에서 되찾았다
임종덕 소년이 형사들에게 취조를 받는 동안 그가 데리고 있는 수십명의 어린 고아들이 형사들을 둘러 쌓고 우리형님 용서해 달라고 울고 있었다. 이 광경을 보고 있던 가방의 주인공인 그 미군 장성은 임종덕 소년의 처지를 다 알고 나서 임종덕을 불쌍히 여겨 자신의 하우스 보이로 채용했다.
그 미군 장성이 바로 6.25 전쟁에 미국공군을 총지휘하는 미국 제5공군사령관 스티브 토마스 화이트 공군 중장이었다. 이렇게 맺어진 인연으로 임종덕 소년은 화이트 장군의 양아들로 입적되어 서울중학교를 졸업후 아버지를 따라 미국으로 건너가 하버드 대학교 국제정치학 박사를 거쳐 월남전에 그린베레로 참전했다.
임종덕은 월남전에서 부하 3명을 살리기 위해 자진해서 월맹군에게 포로가 되었지만 그는 구사일생으로 탈출에 성공 당시 존슨 대통령으로부터 은성 무공 훈장을 받았다. 그후 임종덕은 5년후 닉슨 대통령의 부름을 받고 백악관의 대통령안보 비서관이 되어 키신저와 함께 중국과의 국교수립을 위한 소위 핑퐁외교를 전개해 나간다.
임종덕은 그동안 모택동을 다섯 번 만났고 당시 중국 총리였던 주은래와도 여러 차례 만났으며, 특히 임종덕의 또 하나의 이름인 임성래란 이름도 당시 주은래가 작명을 해줄 만큼 주은래는 임종덕을 동생처럼 호의를 베풀었다.
한편 미국 탁구 선수단은 베이징, 상하이, 광저우등지를 순방하면서 탁구 경기를 통한 양국의 스포츠 교류를 서서히 진행시켜 나갔다. 그리고 이미 1971년 키신저의 중국 극비 방문에서 합의한데로 닉슨 대통령은 1972년 2월 중국을 공식 방문 상하이 공동성명이 발표된다.
세계 역사는 이때를 서로 적성국가였던 미국과 중국이 핑퐁외교 즉 탁구 외교가 양국간 수교의 징검다리의 출발이라고 기록했다. 당시 중국은 모택동의 문화 혁명으로 외국의 어떤 문화도 침투할 틈이 없었는데, 오직 이 탁구 경기만이 중국 정부와 국민들의 거부 반응이 없었다.
불과 2.5g의 가볍고 작은 탁구공이 미국 중국간의 외교 관계를 성사시키는데 일등공신이요 이야말로 노벨평화상 감으로 전세계를 흥분시겼다.
-미국 LA에 이민 교회 창립에 나선 임종덕
임종덕은 미국 LA를 출장중에 우연히 한국에서 온 목사의 부흥회 장소에 들어가게 되었다. 설교를 하는 목사의 얼굴이 어디서 많이 본 사람이었다. 바로 1953년 임종덕이 열다섯살 소년때 서울 여의도의 미공군 교회 주일예배때 한국 공군 장병들에게 설교를 했던 당시 공군군종감이 었다.
그때 이승만 대통령과 아버지 화이트 장군이 함께 예배를 드렸는데 그날 임동선 군종감의 설교에 감동했던 임종덕은 약 20여년만에 이곳 부흥회에서 다시 만났다. 두사람은 그때 주일예배의 기억을 회상하면서 임종덕은 임목사에게 중대한 제의를 했다.
즉 70년대는 한국에서 많은 사람들이 미국에 이민을 올 것인데, 이들을 위해 빨리 이민교회를 만들자고 했다.
이렇게 해서 1970년에 오늘의 LA 동양선교 교회가 창립되었다. 동양선교 교회는 미국으로 이민 온 많은 한국 사람들이 낫선 타국땅 이역에서 서로가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모이기 시작하여 성도 수가 한때는 8천명에 달하는 미국의 한인교회중에 가장 큰 교회가 되기도 했다.
한편 임종덕은 주일날만 되면 꼭 LA에 있는 동양선교 교회에서예배를 드리기 위해 워싱턴에서 LA까지 먼 거리를 왕복하면서 교회를 섬겼다. 그러나 국가 공무로 국내외 출장이 잦은 관계로 매 주일마다 LA까지 가는 교회 출석이 쉽지 않았다.
교회 창립 5주년이 되던 1975년 동양선교 교회는 교회창립의 맴버였던 임종덕을 장로 추대에 나섰다. 이때 임종덕은 과연 자신이 장로가 될수 있는지를 고민했다.
그래서 그는 당시 장로 후보자의 필독서로 알려진 이판석 장로의 과 이성봉 목사의 두권의 책을 밤을 세워가며 여러번 깊이 탐독했다. 결론은 아직 장로로서 직분을 감당할 능력이 부족하다는 것을 깨닿고 장로 추대를 사양했다.
한편 자신과 함께 일했던 헨리 키신저 외교안보 보좌관이 국무장관이 되면서 미, 중 외교관계는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임종덕은 1974년에 그의 생애에서 가장 슬픈날을 맞이했다. 즉 그의 양아버지였던 화이트 장군이 83세로 서거했다.
서울역에서 소매치기와 절도행각을 했던 자신을 오늘이 있기까기 키워준 그 아버지의 위해했던 일생이 끝나는 것이 너무나 아쉬워 임종덕은 하루종일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많이 울었다. 화이트 장군은 아들 임종덕에게 훌륭한 교육을 시켜준 하버드 대학교와 또한 자신의 모교인 미공군 사관학교에 유산을 기중했다.
-백악관을 떠나야만 했던 임종덕 대령
핑퐁외교 즉 탁구 친선경기로 시작된 미,중국간 외교는 드디어 1979년 양국간의 국교가 수립됨으로서 임종덕의 중차대했던 사명도 끝났다.
그러나 임종덕은 계속해서 닉슨, 포드, 카아터 대통령에 이르기까지 백악관 대통령 안보 비서관으로써 세계 각국의 정보를 석 대통령께 보고하는 일에 매진하고 있었다. 한편 임종덕의 백악관 근무에 생각지도 않았던 시련이 닥아왔다.
즉 카아터 대통령이 주한 미지상군을 4,5년 사이에 완전 철수하겠다고 발표하자 주한 미군 사령부 참모장 싱글러버 소장이 기자회견에서 철군 반대를 주장했다. 싱글러버 장군은 1977년 5월 17일자 워성턴 포스트지와의 대담에서 “지난 1년간의 집중적인 정보 활동결과 북괴의 군사력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강력하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런데도 철군 결정자들은 북괴의 군사력에 대해, 2,3년전 낡은 정보에 근거를 두고 철군을 할려고 한다.”라고 하면서 카아터의 철군 계획에 정면으로 반대했다. 이상과 같은 워싱턴 포스트지와의 대담 기사가 나간지 이틀 뒤 즉 5월 19일 카아터 대통령은 크게 분개하여 싱글러버 장군을 즉각 소환하라고 브라운국방 장관에게 명령했다.
즉 미군의 최고 통수권자인 자신에게 철군 반대에 대해 직접 보고 하라고 했다. 싱글러버 장군은 당시 군사정전위원회 UN군 측 수석대표에 주한 미군 사령부 참모장 등 서열에서는 제3인자의 위치였다. 미국 대통령이 해외 주둔 미군 장성을 소환한 것은 1951년 6.25 전쟁때 트루만 대통령이 맥아더 장군을 소환한 이래 처음 있는 일이었다.
임종덕은 당시 카아터 대통령과 싱글러버 장군과의 대담 내용은 밝힐 수 없다고 했다. 한편 카아터 대통령은 싱글러버 장군을 주한미군참모장 직에서 해임시킨 뒤 어느날 임종덕을 불러 “당신의 조국이란 입장을 떠나서 나의 철군 계획과 한반도 정책에 대해 말해 보시고”라고 질문을 했다.
임종덕은 평소의 생각데로 말했다. 즉 4만여명의 주한 미군이 있으므로 북한이 전쟁도발을 하지 못하며 대신 한국은 경제부흥과 더불어 미국이 바라는 민주주의 국가로 성장했음을 강조했다고 한다. 한편 임종덕이 카아터에게 정면으로 강력하게 제시한 사례가 있었는데 이것이 그가 백악관을 떠나야 할 계기가 되었다.
즉 국가안전보장 이사회에서 카아터 대통령은 과거 월남전에서 도망친 도망병들을 전부 사면하라고 지시했다. 이 지시에 아무도 반대 의견을 내지 못하자 임종덕은 카아터의 사면 지시를 반대한다고 했다.
즉 자신이 월남전 참전용사로서 전투중에 자기만 살겠다고 무기를 버리고 도망을 친 장병에게 대통령이 사면을 한다면 앞으로 전쟁터에서 누가 미국을 위해 생명바쳐 전투를 하겠느냐고 말했다. 임종덕의 반대 의견을 듣던 카아터의 심기가 좋을 리가 없었을 것이다.
이때 임종덕은 대령에서 장군 진급을 불과 두달 앞두고 있었는데, 자신도 앞서 싱글러버 장군의 전철을 밟고 있는 것을 느꼈다. 임종덕은 사사건건 대통령에게 결레가 되는 처신을 할 수 없기 때문에 그는 자진해서 대통령에게 대통령 안보비서관 직에서 다른 군부대 전근을 건의 했다.
그리하여 임종덕은 미국의 어느 예비군 부대의 심리전과 창설 임무를 받고 백악관을 나섰다, 정든 백악관을 나올 때 그는 몇 번이나 뒤를 돌아 보면서 그의 발길은 교회로 향하고 있었다.
텅빈 교회안에서 그는 모처럼 하나님께 긴 시간의 감사 기도를 할 수 있었다. 임종덕은 1986년 육군대령으로 예편하면서 LA동양선교교회 장로 장립을 받았다.
현재 부인과 함께 LA에 살고 있으며 슬하에 딸만 셋을 두고 있는데 이 딸들에게 학생시절 조국의 긍지와 자부심을 심어주기 위해 서울 정신여고에 청강생으로 유학을 보내기도 했다.
-고국에 올 때마다 서울역을 찾아간다
서울역은 임종덕에게 평생을 두고 잊을 수 없는 고향이다. 그래서 그는 서울에 올 때마다 서울역을 찾아간다. 서울역앞 광장을 넋을 잃은 듯이 보고 있는 동안 임종덕의 머리에는 61년전 14살의 전쟁 고아로 배고팠던 그 시절의 자신의 모습이 주마등처럼 지나간다.
밥을 얻어먹지 못할때는 종로구 내자동의 무물가를 찾아가서 물배라도 채우겠다고 샘물을 꿀꺽 꿀꺽마셨다. 어느날 허기에 지쳐 우물가에 힘없이 누워있던 임종덕에게 외국 신문기자가 와서 영어신문 한 장을 펴서 보여 주었다. 기사 내용은 알 수 없지만 임종덕 자신의 얼굴이 나와 있었다.
즉 신문에 난 자신의 모습은 너무 배가 고파서 두레박으로 물을 올리던 할머니에게 물을 얻어 먹는 장면의 사진이었다. 후일에야 알았지만 이 사진은 미국의 타임즈 기자가 찍은 “우물가의 소년”이란 기사로 당시 너무나 유명한 풀브라이트 종군 기자상을 수상했던 사진이었다.
한편 서울역 광장은 당시 임종덕에게는 없어서는 안될 생활의 근거지요 직장이었다. 15살의 나이에 수십명의 코 흘리게 전쟁 고아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그의 눈은 항상 돈과 귀중품을 가진 사람만 노리고 있었다.
15살 소년 임종덕의 소매치기와 절도 기술은 그야말로 귀신도 놀랄 정도었다. 매일같이 진행되는 소매치기와 절도의 순간적인 기술의 승패는 바로 임종덕만 바라보고 살아가는 어린 고아들의 생사와 직결되었기 때문에 아예 그 순간의 실패란 감히 생각도 할 수 없었다.
당시 서울역에서 큰 절도 사건이 터지면 형사들이 제일먼저 임종덕을 지목하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임종덕은 지금도 61년전 이곳 서울역 광장에서 양아버지와의 그날의 인연은 바로 하나님이 맺어준 것임을 천번 만번 확신한다고 강조했다.
즉 하나님께서는 임종덕으로 하여금 미국 제5공군 사령관인 3성 장군의 가방을 훔치게 하여 임종덕을 장군의 양아들로 입적 시키기 위한 바로 하나님의 완벽하고 빈틈없는 시나리오였다고 굳게 믿고 있다.
만일 그날 하나님께서 그날의 인연을 맺어 주지 않았다면 자신은 영영 그 길을 벗어나지 못하고 교도소를 평생토록 드나들며 70평생을 폐인으로 망쳤을 것이라고 했다. 임종덕이 서울을 방문하면 서울역 이외에도 앞서 언급했던 굶주린 배를 즉 물배로 채워줬던 내자동, 그리고 양아버지와 함께 난생처음 교회를 나갔던 여의도를 가본다.
그러나 그때의 내자동 우물터와 여의도 비행장의 교회는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고층 빌딩들은 뉴욕의 맨하탄을 방불케 한다. 6.25 전쟁으로 페허가 되었던 당시 서울 거리는 넝마주의 소년들과 거지들이 줄을 이었고 빈(貧)과 궁(窮)은 이 나라 산천을 휩쓸었다.
올해(2011) 75세인 임종덕도 바로 그 시대에 불쌍한 고아였다. 자신 혼자도 먹고살기 힘든 그 난리판에 소매치기와 절도로 어린 고아들을 먹여 살리던 임종덕을 하나님은 결코 무심치 않았다. 이말은 바로 하나님은 남을 위해 스스로 돕는자를 도와 준다는 진리를 우리에게 깨우치고 있다.
한편 세계를 움직이는 미국의 최고 두뇌들만 일할 수 있는 백악관에 그것도 대통령의 안보비서관으로 등용시킨 것은 바로 하나님의 섭리였다고 임종덕은 또 한 번 강조했다. 서울역 광장은 임종덕 인생에 너무나도 창피스럽고 또한 슬픔과 눈물의 기억만 있어 두 번다시 찾을 곳이 못되지만 그래도 그가 이곳을 찾는 이유는 바로 이곳에서 하나님의 첫사랑을 받은 장소였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는 이곳을 찾을 때마다 마음속으로 부르는 찬송이 404장이라고 하면서 필자와의 대담을 마쳤다. 『하늘을 두루마리삼고 바다를 먹물삼아도 한없는 하나님의 사랑 다 기록 할 수 없겠네. 하나님의 크신 사랑 그 어찌다 쓸까. 저하늘 높이 쌓아도 채우지 못하리 하나님 크신 사랑은 측량 다 못하여 영원히 변치않는 사랑 성도여 찬양하세』
끝
글 : 김수호 (안드레명상 발행인 주님의 교회 협동장로)
이병식 장 로 (주님의 교회)
이을형 장 로 (주님의 교회)
인태호 장 로 (상도성결교회)
이공진 장 로 (화평교회)
최진성 장 로 (인천성가단 단장)
길가에 교회
장경희 권 사 (주님의 교회 3부 찬양대)
배홍자 권 사 (주님의 교회 1부 찬양대)
강석인 안수집사 (주님의 교회)
박규택 안수집사 (주님의 교회)
김민기 (전 KBS 언론인)
김용운 (일산에서)
박남태
※ 지난번 106호는 1천부를 주렸기 때문에 고정독자(군인교회) 1천명이 106호를 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이번 107호는여러분의 귀한 헌금으로 정상 발행되었음에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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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뉴스
2012-0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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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쟁때 고아 하우스 보이가 미
6.25 전쟁때 고아 하우스 보이가 미백악관 비서관이 되기까지 (3편)
(※ 지난 줄거리)
6.25전쟁때 고아가 되어 서울역을 무대로 소매치기와 절도 행각으로 자신이 데리고 있던 100여명의 고아들을 먹여 살렸던 임종덕 소년이 어느날 그의 인생에 큰 변화가 생겼다.
즉, 서울역 앞에서 그날도 임종덕은 절도 대상자를 유심히 관찰하던중 한 미군 장성이 탄 승용차가 도착하는 것을 보고 그야말로 눈 깜짝할 사이에 승용차의 뒷자리에 있던 가방 하나를 들고 도망쳤다.
그러나 즉시 미군 헌병들에게 체포되어 경찰서로 넘겨지는 과정에서 이 광경을 본 미군 장성은 임종덕 소년을 불쌍히 여겨 그를 자신의 하우스 보이로 채용했다. 그 미군 장성이 바로 미국 제5공군 사령관 스티브 토마스 화이트 중장이었다.
이렇게 맺어진 인연으로 임종덕 소년은 화이트 중장의 양아들로 입적되어 미국으로 건너가 하바드 대학교 정치학 박사가 되었다. 그후 월남전에 참전 그린베러가 되어 미군 포로들의 구출 작전중 월맹군에게 포로가 되어 마지막 생사의 갈림길에서 극적으로 탈출해 온다.
-“하나님은 항상 나와 함께 계신다”
밀림속에서 미군 헬리곱터에 극적으로 구출된 임종덕은 사이공의 공군병원으로 후송되어 즉시 미국 공군 참모총장 화이트 대장과 전화 통화가 되었다.
아버지 화이트 대장은 포로가 되었던 아들이 탈출해서 사이공에 왔다는 아들의 육성을 듣고 “이게 혹시 꿈이 아니냐 아들아 너가 포로로 잡혀간 그날부터 네 어미와 나는 밤낮으로 너를 위해 기도했단다”……
당시 월남전에서 8명의 미군이 포로수용소에서 탈출에 성공했는데 그중 임종덕 대위가 제1호 탈출이었다. 그래서 미군은 물론이며 미국내 참전 가족들의 환성이 대단했다. 화이트 대장은 “아들아 내가 너를 직접 보아야 실감이 날 것 같구나 그래 어디 부상 당한데는 없느냐”며 계속 울먹이며 질문을 했다.
임종덕은 울먹이는 아버지를 오히려 위로하면서 그가 항상 아버지께 한 말을 했다. “아버지 하나님은 항상 나와 함께 계신다고 늘 얘기 했잖아요”……
임종덕은 1주일간 공군병원에서 요양을 하면서 3개월간의 포로 생활에서 특히 그 생사의 갈림길에서 끝까지 자신의 생명을 지켜준 하나님께 감사 기도를 드리고 있었다.
사이공에 도착한지 8일째 되는날 임종덕은 미국 백악관으로부터 긴급 통보를 받았다. “존손 대통령께서 귀관을 백악관으로 초청하라는 명령이니 급히 오십시오”……
임종덕은 즉시 아버지께 이 내용을 알렸드니 아버지도 이미 알고 있다면서 나와 함께 백악관에 들어가니까 너무 긴장하지 말라고 했다.
-은성 무공 훈장과 1계급 특진을 받은 임종덕
임종덕은 키가 팔대장 같은 거구의 존슨 대통령으로부터 은성 무공 훈장을 받으면서 감격했다.
한편 대위에서 6년후 소령이 되는데 임종덕은 대위에서 바로 소령 특진을 받았다.
특히 은성 무공 훈장을 받은 것은 부하 3명을 살리기 위해 자신이 직접 포로가 되었다는 것이 결정적 요인이었다고 한다.
훈장 수여가 끝나자 존슨 대통령은 임종덕을 신기한 표정으로 아래 위를 살피며 미소를 지었다.
키가 1m64cm의 이 작은 체구에서 어떻게 그 엄청난 행동과 지혜가 있었는지에 궁금하다는 표정이었다. 존슨 대통령은 공군 참모총장에게 “귀관은 어떻게 이런 자랑스럽고 훌륭한 아들을 두었소”하고 물었다.
대통령의 질문에 아버지가 답변을 못하자 임종덕은 “대통령 각하 하나님은 항상 저와 함께 하십니다”라고 말하자 존슨 대통령은 다소 놀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임종덕의 굳건한 신앙에 큰 미소를 지었다.
한편 임종덕의 포로수용소 탈출 기자회견을 계기로 그가 겪었던 수용소 생활과 특히 러시안 룰렛 즉, 권총 살인게임 등을 소재로 한 영화가 제작 되었다. 감독에 마이클 치미노 주연 배우에는 로버트 드니로를 비롯한 존케세일, 존세비지 등이 출연한 이 영화가 바로 디어헌터 (The Deer Hunter)였다.
1978년에 제작된 디어헌터는 우리나라는 물론 전세계 영화 펜들을 감동시켰다.
임종덕은 당시 영화 제작사로부터 기막힌 소재를 제공한 대가로 당시 15만불을 받았다.
또한 미국 육군사관학교는 임종덕의 수용소 탈출과 15일간의 정글 생활에서 살아나온 과정을『정글 탈출기』란 책으로 만들어 육군사관학교 정식 교과서로 사용했다. 다시 월남전선으로 복귀한 임종덕 소령은 그린베레로서 맡은 직무 수행에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한편 미국은 존슨 대통령이 물러나고 닉슨이 대통령이 되었다.
닉슨은 하바드대학교에서 국제외교 분야의 베트랑급인 키신저 교수를 대통령 안보담당 특별 보좌관으로 임명하고 장차 중국과의 수료를 위한 극비 연구를 지시했다. 닉슨이 키신저 교수를 보좌관으로 임명한 것은 과거 타임즈에 게제되었던 『21세기의 공존 공생』이란 기사를 감명깊게 읽었기 때문이다.
또한 이 기사에서 키신저가 제자인 임종덕 학생의 글 『21세기는 중국의 시대가 올 것이다』라는 내용을 언급했는데, 닉슨은 당시 임종덕 학생을 만나기를 원했다.
키신저는 며칠후 임종덕이 월남전선에서 그린베레 소령으로 근무하는 것을 확인하고 이를 닉슨에게 보고하자 닉슨은 즉각 임종덕을 백악관으로 불러 오라고 지시했다.
-백악관에 두번째 불려간 임종덕 소령
존슨 대통령을 만난지 5년만에 임종덕은 키신저와 함께 백악관의 대통령 집무실로 들어갔다.
닉슨은 매우 반가운 표정으로 하바드 대학교 57년도 학생잡지를 임종덕에게 보이면서 여기 당신의 글을 관심있게 읽었다면서 앞으로 중국이 어떻게 변하겠느냐고 물었다.
임종덕은 닉슨 대통령에게 “사상과 이념의 역사는 100년이상 간 것이 없었다”는 아놀드 토인비 교수에게 들은 강의 내용을 언급하면서 지금부터 (1970년) 앞으로 40년 후에는 (2010년) 지금의 중국과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경제 대국으로 성장할 것이라고 전망하면서 이것은 바로 군사력과도 직결된다고 했다.
뿐만 아니라 중국이 만일 공산주의를 포기하면 중국은 세계 문화의 중심지가 될 것이라고 했다. 임종덕의 말을 다 듣고난 닉슨 대통령은 이날 바로 임종덕 소령을 미국 국가안전보장 이사회 근무를 명하고 키신저와 함께 중국과의 수교를 위한 극비 작업을 지시했다.……
임종덕은 이날밤 호텔에서 하나님께 불평어린 기도를 했다. 즉 “하나님 나는 전쟁터에서 미군 포로를 탈출시키는 특수 작전을 전문으로 하는 그린베레인데, 어떻게 저를 갑자기 백악관 근무를 하게 하십니까, 나는 국가간의 비밀 외교수립을 배워 본적도 없는 문외한(門外漢)입니다.……
그러나 임종덕은 기도를 하는 중에 갑자기 큰깨 달음이 왔다. “내 인생이 지금 여기까지 오게된 모든 과정이 내 마음대로 된 것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께서 항상 나의 앞날을 인도하고 있다는 즉 하나님은 항상 나와 함께 하신다는 것”……
한편 임종덕의 아버지 화이트 공군 참모총장은 미국 군인의 최고의 자리인 합동참모본부 의장 즉, 합참의장으로 승진했다. 화이트 장군은 아들이 백악관 대통령 안보 비서관으로 오게된 것을 매우 기뻐하면서 자신의 승진과 아들의 백악관 근무는 전적으로 오직 하나님의 은혜라고 하면서 모처럼 가족이 함께 모여 하나님께 뜨거운 감사 예배를 드렸다.
-중국과의 수교를 위한 임종덕의 사명
임종덕은 대통령 특별안보 보좌관인 키신저의 비서 역할을 하면서 중국 근세사를 열심히 공부 했다.
당시 미국은 중국을 완전 적성국으로 인정했기 때문에 일체의 교류가 없던 시절이다.
그래서 임종덕은 중국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스포츠 바로 탁구 시합을 구상하게 되었다.
때마침 1971년 3월 제31회 세계 탁구 선수권 대회가 일본 나고야에서 개최되었다.
임종덕은 이 대회 기간에 미국과 중국과의 탁구 경기를 상호 친선방문 개최를 은밀하게 추진했다.
때마침 중국의 모택동이 나고야 대회가 끝나는 날 4월 6일밤 현지에 있는 중국 대표단에게 미국 탁구선수단 초청을 지시했다. 그리하여 나고야 대회가 끝난후 3개월만에 미국 탁구선수단이 중국의 공식 초청으로 베이징을 방문했다. 이때부터 임종덕은 중국의 실권자인 주은래와 미국의 키신저를 만나게 하는 물밑 작업을 비밀리에 착착 진행시키고 있었다.
임종덕은 파키스탄에서 대기중 중국으로부터 상해로 오라는 비밀연락을 받고 달려갔다.
이 자리에서 키신저와 주은래의 회담 주선이 결정되어 71년 6월 키신저는 임종덕을 데리고 극비리에 베이징을 방문한다.
키신저와 주은래의 베이징 비밀회담에서 미국과 중국은 서로가 적성국이지만 앞으로 수교를 하자는데 합의하고 닉슨 대통령의 중국 방문 일정까지 정했다. 키신저는 귀국길에 우방국인 일본을 방문 일본 수상에게 베이징의 비밀회담 내용을 알렸다.
한편 임종덕은 키신저에게 한국에도 이 사실을 당연히 알리자고 말하자 키신저는 한국은 당신이 가라고 했다.
-박정희 대통령과 임종덕의 첫 만남
임종덕을 처음 본 박정희 대통령은 매우 반가운 표정으로 한국인이 미국 대통령 외교 안보비서로 근무한다는 것에 대해 격려를 해 주었다.
특히 임종덕의 신장(1m64cm)이 자신과 같다는 것도 호감을 가졌다. 한편 박정희 대통령은 임종덕으로부터 보고를 듣고 이때 새로운 구상을 하게 된다.
그것이 바로 그해 8.15 광복절 경축사에서 밝힌 앞으로 적성국과도 외교를 할 수 있다는 것과 그리고 우리의 자주국방을 확고하게 진행해 나가겠다고 발표했다.……
그후 임종덕은 한국을 방문할 때마다 청와대를 방문 박정희 대통령과 교분을 쌓아갔다. 박정희 대통령은 임종덕이 36세의 나이에 아직 미혼인 것을 안타깝게 생각하고 꼭 자신이 중매를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임종덕은 대통령의 중매 이야기는 안드레 명상에 언급하지 말라고 했지만 필자가 탐문한 바에 의하면 박정희 대통령이 육영수 여사에게 의뢰를 했고 육영수 여사가 좋은 규수감을 물색하던중 독립지사의 가문인 즉, 민영익의 후손으로 대학교수인 민씨 집안 아가씨를 선정 결혼이 성사되었다.
이때부터 박대통령과 임종덕의 사이는 더욱더 가까워졌다.
한 번은 임종덕이 박대통령에게 아들 지만이를 미국에 유학을 시키자고 하면서, 모든 학비 일체를 자신이 부담하겠다고 제의를 했다. 이 말을 듣고난 박대통령의 얼굴이 상기되면서 버럭 화를 냈다.
“내가 내 아들을 유학을 보내면 지금 장관 차관 그리고 국영기업체 사장들이 내 눈치만 보고 있는데, 자기 자식들도 전부 다 유학 보낼 것이다. 공장의 여 직공들이 피눈물로 벌어드리고 있는 외화가 장관 차관 자식들의 학비로 사라진다면 이 나라가 언제 자립하고 언제 자주 국방을 하겠느냐!! 지만이는 육사 졸업후 다행히 중령까지 가서 예편한다면 그 연금으로 살 수가 있다.
그러니 자네 앞으로 지만이 유학 이야기는 절대 입밖에도 내지 말게!!……
한편 임종덕은 이때 자신이 알고 있는 중대한 정보가 틀림없다는 것을 알았다.
즉, 미국의 무기회사 부사장이 박대통령에게 한국의 무기 구입에 대한 감사의 표시(리베이트)로 무려 100만 달러의 수표를 건네자, 박대통령은 이를받아 “이 돈이 내 개인 앞으로 주는 것이냐 혹은 청와대에 주는 것이냐”고 물었다.
무기회사 부사장은 “이 돈은 대통령 각하 개인에게 드리는 것입니다.” 박대통령은 이 수표를 청와대 공식 봉투에다 넣고 “이 100만 달러는 지금부터 내 개인의 돈으로 무기를 구입하겠다”고 하면서 이 돈을 다시 부사장에게 건넸다.
무기회사 부사장은 당시 박대통령의 그 청렴한 애국정신과 특히 자주국방을 위한 그 투철한 집념에 감탄했다고 한다. 이 회사가 전세계와의 무기 거래 역사상 국가 원수가 자기 개인주머니로 들어오는 거액의 돈을 거부한 예는 전무후무한 일로서 그 소문이 백악관은 물론 미국 정부 고위층에도 알려졌다고 한다.
한편 임종덕은 백악관에서 닉슨, 포드, 카터 대통령 등 3명의 대통령 안보비서관을 지내다가 장군 진급을 2개월 앞두고 갑자기 백악관을 떠나게 된다. (다음 호에 계속됨.)
글 : 김수호 (안드레명상 발행인 주님의 교회 협동장로)
※ 안드레 명상 106호는 예산 부족으로 평소의 발행 부수에서 1천부를 주렸습니다.
이 글을 보신후 꼭 다른 사람들과 돌려가면서 봅시다.
이병식 장 로 (주님의 교회)
이을형 장 로 (주님의 교회)
김유호 아산병원 심장내과 교수(주님의 교회 피택장로)
최진성 장 로 (인천 성가단장)
차재완 장 로 AD 농어촌 방송선교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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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뉴스
2011-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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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과 고아 하우스 보이가 미 백…
* 6.25전쟁과 고아 하우스 보이가 미 백악관 비서관이 되기까지 (1편)
하우스보이란 6.25 전쟁때 미군 부대에서 막사 청소를 하고 미군의 군화를 닦아주고 그리고 각종 심부름을 해주는 소년을 말한다. 주로 전쟁 고아들 중에서 선정했는데, 당시 미군부대의 하우스 보이가 된다는 것은 대단한 행운이었다.
6.25 전쟁때 하우스 보이로 성공한 잘 알려진 인물로는 미국 워싱턴주 상원의원이된 신호범 장로와 수원중앙교회 김장환 원로목사 그리고 미국 하바드대학교 정치학박사 임종덕 장로를 들 수 있다.
이들 세사람 중에서 임종덕 장로는(2011년 현재 나이 75세) 그가 오늘이 있기까지 살아온 그 파란만장의 위대한 생애를 아는 사람이 많치 않다. 그 이유는 임종덕 장로는 미국 육군대령으로 예편하기까지 백악관에서 닉슨대통령, 포드대통령, 카터대통령 등 세분 대통령의 안보비서관으로 근무했기 때문에 2014년 까지는 자신의 과거 직책과 관련된 일체의 말을 절대 못하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 미국의 여러 교회에서 그의 신앙 간증을 요청해도 일체 거절하고 있다.
사실 안드레명상도 이미 3년전 임종덕 장로의 인생 역정을 게재할려고 시도했으나 거절당했는데, 마침 지난 5월 한국을 찾은 임장로를 송승엽 안수집사의 소개로 다시 만나 인터뷰가 성사되었다. 단, 백악관 안보비서관 시절의 그의 직책과 관련된 내용은 일체 언급하지 않기로 약속했다.
1949년 당시 12세의 임종덕은 중국 용정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부모님과 함께 귀국하여 서울중학교에 입학했다. 그러나 1년뒤 북한의 6.25 남침으로 미쳐 피난을 가지 못하고 고아가 된다. 임종덕 소년이 고아가 되어버린 그날의 불행을 6.25전쟁 61년이 지난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당시 잘 알고 지내던 형님뻘 되는 청년이 임종덕에게 서울중학교 한쪽 교실에 불을 지르라고 했다. 당시 서울중학교는 인민군들이 주둔해 있었는데 이곳에 수감된 수십명의 청년들이 훈련을 받고 곧 북한 의용군으로 전쟁에 나가게 된 것이다.
바로 이 청년들을 탈출시키기 위해서 임종덕에게 불을 지르라는 지시를 한 것이다. 평소부터 의협심이 강했던 임종덕은 그 청년이 전해준 기름통을 들고가서 교실옆 목조 건물에다 불을 지르고 북아현동에 있는 자신의 집으로 도망을 갔다.
집에 도착한 임종덕은 집안에 있던 큰나무에 올라가 나무속에 숨었다. 잠시후 인민군 찌프차가 집앞에 도착 인민군 요원들이 대문을 박차고 들어와 마침 마당에 있던 어린 여동생의 머리에 총검을 데고 부모님을 찾았다. 어린 여동생은 겁에 질려 와들와들 떨더니 지하 창고에 부모님이 있다고 말을 해 버렸다.
잠시후 부모님이 양손을 뒤로 묶인채 마당에 섰다. 인민군은 당신네들은 반동문자이기 때문에 인민 재판에 의해 처형하겠다고 했다. 임종덕을 학교 방화범으로 체포하러 온 것은 아니었다. 형식적인 재판이 끝나자 총 소리와 함께 부모님은 쓰러졌다. 아버지 임성규는 독립운동가였고 어머니는 당시 숙명여고 교사였다.
인민군들은 미리 준비해온 장작 위에 시체를 얹어 놓고 기름을 부어 불을 질렀다. 이 무서운 만행을 나무 위에서 직접 목격했던 임종덕은 그 길로 서울을 탈출 피난민 대열에 끼어 정처없이 걷다가 다시 9.28 수복때 미군을 만났다.
한 미군 대위는 임종덕을 친동생처럼 보살펴 주면서 데리고 다녔다. 그러나 원산과 흥남까지 임종덕을 데기고 간 그 미군 대위가 전사하면서부터 임종덕은 외로운 고아로 거지생활을 시작했다.
주로 서울역 앞에서 거지생활을 하던 임종덕 소년은 고아들을 데리고 당시 불광동에 있는 희망원으로 들어갔다. 그때 그의 나이는 열다섯살이었다.
자신보다 어린 고아들을 동생처럼 보살폈다. 그러나 어느날 고아원 원장의 놀랄만한 부정행위를 목격한 임종덕은 몽둥이를 들고 원장실로 쳐들어가 사무실을 박살냈다. 원장은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산으로 도망쳤다. 임종덕도 주위 형들이 너도 빨리 도망가라고 권유해서 고아원을 나와 서울역을 향해 달렸다.
그런데 뒤를 돌아보니 동생뻘 되는 아이들이 “형, 오빠”하면서 29명이 따라오고 있었다. 임종덕은 깜짝 놀라 돌맹이를 던지면서 따라오지 말고 고아원으로 다시 들어가라고 소리를 질렀다. “내 혼자도 얻어 먹기 힘든데 너희들을 어떻게 먹이고 또 잠은 어디서 잔단 말이냐”하면서 계속 돌맹이를 던지면서 저지했으나, 어린 소년, 소녀들은 함께 손을 잡고 울며불며 임종덕을 따랐다.
저녁때가 되어 서울역에 도착한 임종덕은 염천교 다리 밑에 임시 거처를 정하고 모두가 밥을 얻으러 나갔다. 두시간 후에 이들이 얻어온 각종 음식을 다 모아서 비빕밥을 만들어 골고루 배식을 했다.
그러나 정작 임종덕은 자신이 먹을 음식이 없었다.
그러나 다행히 잠잘 곳을 찾아서 임종덕은 행복했다. 즉 큰 방공호로 만들어 놓은 장소를 깨끗이 청소를 하고 나니 그곳에 많은 아이들이 들어갈 수 있었다. 나이별로 남·녀 구분과 엄격한 규칙을 정했다. 임종덕은 어느날 염천교 밑에서 당시 거지왕자로 소문난 김춘삼을 만나서 거지로써 살아가는데 지켜야할 중요한 규칙 몇가지를 교육받았다.
1) 밥을 얻으러 갈 때 대문을 두드리지 말고 깡통 소리를 내라.
2) 밥을 얻을 때는 꼭 깡통이나 그릇을 준비해 가라.
3) 하루에 같은 집에 두번 가지마라.
4) 땅에 떨어진 음식은 절대 먹지 말아라.
한편 날이갈수록 고아들이 계속 모여들어 129명이 되었다.
* 129명 고아들을 살리기 위해 임종덕은 소매치기와 절도범으로 변했다.
129명의 아이들이 제대로 못먹고 질병으로 그동안 24명이 죽었다. 어떤 날은 8명이 한꺼번에 죽는 날도 있었다. 약 사먹을 돈이 없기 때문에 심한 감기만 걸려도 고열로 쓰러져 죽어갔다. 그래서 임종덕은 중대한 결심을 했다. 그것은 바로 소매치기와 도둑질을 해서라도 약값을 모으기로 했다.
그 해가 1952년이었다. 매일매일 소매치기로 번 돈으로 당장 아이들에게 옷도 사 입히고 그리고 약값에 충당했다. 임종덕은 서서히 간이 커지면서 소매치기에서 부잣집들의 담을 넘기 시작했다. 주로 서울 장충동이 활동 무대가 되었고, 특히 제니스 라듸오를 훔치는 날은 아이들에게 특식으로 꽈배기 빵을 한 보따리씩 사가지고 왔다. 어느날 임종덕 소년에게 그의 인생의 운명을 바꾸는 날이 왔다.
서울역 대합실에서 좀 고급스러운 손님을 찾기 위해 대기하고 임종덕은 미국 공군 장성이 탄 승용차 한 대가 미군 전용 주차장에 도착하는 것을 목격했다.
미군 헌병들의 호위를 받으며 차에서 내린 장군은 환송차 대기 중이던 사람들과 악수를 나누며 잠시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바로 이때 임종덕은 승용차 뒤의 트렁크가 약간 열린 것을 발견하고 그안에 있는 가방 하나를 훔쳐 비호처럼 도망갔다. 그러나 그는 멀리 못가고 미군 헌병들에게 붙잡혔다.
임종덕은 과거 미군부대에 조금 있을 때 배운 서투른 영어로 자신이 절도를 하지 않으면 자신이 데리고 있는 고아들이 굶어 죽는다고 말했다.
근처에서 임종덕을 유심히 보고 있던 장군은 곧 절도죄로 파출소로 연행할려는 헌병들에게 임종덕을 조선호텔 즉 장군의 숙소로 보내 하우스보이로 일하게 하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임종덕은 이 절호의 기회, 이 좋은 직업을 사양했다.
이유는 내가 없으면 100여명의 고아들이 당장 굶어죽는다고 했다. 장군은 헌병들에게 100여명 고아들의 생활 현장을 확인하고 그것이 사실이라면 그 고아들 전원을 미국 공군이 운영하던 제주도 고아원으로 입소시키고 그리고 임종덕은 자신의 하우스 보이로 일하겠금 명령했다.
그가 바로 미국 5공군 사령관 스티브 도마스 화이트 중장이었다. 당시 사령부는 일본에 있지만 작전 지시 관계로 서울 조선호텔에 상주하고 있었는데, 안타깝게도 전투비행기 조종사인 그의 외아들이 전투비행중 전사했다.
한편 화이트 장군은 임종덕을 데리고 약 1년동안 유심히 관찰한 후 어느날 임종덕에게 “너는 오늘부터 내아들이 되었다”며 양자로 입적을 시키겠다고 했다. 모처럼 장군의 가슴에 푹 안긴 임종덕은 탱큐를 연발하며 엉엉 울었다. 임종덕은 다시 서울중학교 3학년에 복학하여 중단되었던 학업을 계속했다.
어느날 임종덕은 사령관을 따라 수원의 미공군 기지를 찾았다. 그는 이곳에서 좋은 친구를 만났다. 즉 같은 하우스 보이로 이곳 공군기지 막사에서 일을 하는 김장환이란 소년을 만났다. (후일 수원중앙교회 원로목사) 김장환 소년은 임종덕을 아주 경계하는 눈초리로 보면서 “너는 도대체 누구냐 너는 무엇 때문에 여기왔느냐”며 매우 못 마땅한 표정으로 임종덕의 어깨를 툭툭쳤다.
그 이유는 자신이 일하는 이곳의 하우스보이 자리를 임종덕이 차지할려고 온 것으로 오해를 한 것이다. 그러나 잠시후 오해가 풀린 김장환은 임종덕에게 “너는 어떻게 장군의 하우스 보이가 되었느냐, 누구 빽이냐”며 너무나 궁금하다면서 계속 캐 물었다.
임종덕은 하는 수 없이 자신의 살아온 과거와 특히 장군과의 인연이 된 사건까지 다 말해 주었다.
임종덕의 말을 다 듣고난 김장환은 임종덕의 손목을 꼭 잡고 앞으로 좋은 친구가 되자며 격려를 해주었다.
그리고 자신도 하우스 보이가 된 사연을 간단하게 말했다. 즉 김장환이 동네 아이들과 지게를 지고 산에 나무를 하러 가는 길에 당시 수원형무소 근처에서 미군들의 야외 회식자리가 있었던 현장을 발견했다.
현장에는 민군들이 먹다 남은 각종 음식이 많이 있어서 김장환은 친구들과 함께 신나게 먹었다. 음식을 다 먹고 나자 한 친구가 흙 투성이가 된 미군 군화가 몇 켤레 있는 것을 보고 “저것도 가지고 가서 시장에 팔면 돈이 될 것이다”라고 하면서 가지고 가자고 했다. 그러나 김장환은 절대 반대했다.
“음식은 남은 것이니까 다 먹고 가도 되지만 군화는 가지고 가다 들키면 도둑놈으로 형무소에 간다”면서 적극 만류했다. 김장환은 친구들이 떠난후에도 혼자서 흙투성이가 된 군화들을 전부 깨끗이 닦아 가지런히 놓아 주고 일어섰다. 그때 뒤에서 누군가가 김장환 어깨를 쓰다듬어 주었다. 바로 미군이었다. 김장환은 이날의 인연으로 나무 지게꾼 소년에서 하루아침에 당장 수원의 미공군부대 하우스 보이가 된 것이다.
김장환의 얘기를 다 듣고난 임종덕은 마음 속으로 우리는 다 절도와 관련된 운명으로 하우스 보이가 되었구나 하면서 앞으로 자주 만나자고 했다.
김장환도 일요일이면 여중생들과 항상 모임이 있는데 너도 꼭 놀러 오라고 했다. 그후 임종덕은 일요일만 되면 초코렛과 온갖 과자를 가방에 가득히 넣고 김장환을 꼭 찾아갔다.
김장환을 꼭 찾아가는 첫째 목적은 여중생을 사귀기 위해서였다. 한편 김장환은 임종덕과의 우정이 깊어질 즈음 미국으로 건너간다. 하우스보이 제1호 출국이었다.
* 임종덕에게 본격적인 신앙과 교육을 위한 양아버지의 원대한 계획
1953년 어느 주일날 임종덕은 양아버지 화이트 장군과 함께 당시 여의도 비행장에 있는 미군 교회를 찾았다. 미군들의 예배가 끝나자 바로 한국 공군 장병들의 예배가 시작되었다. 이날 예배석 제일 앞줄에는 이승만 대통령과 김정열 국방장관, 김신 공군참모총장 그리고 화이트 장군과 그외 외국 고관들이 앉았다.
임종덕 소년은 이날 이승만 대통령을 처음으로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볼 수 있었다. 이 날의 설교를 맡은 한국 공군 군종감의 설교중 후반부의 설교가 임종덕의 마음을 울렁거리게 했다. “지금 이 나라는 온갖 부정부패의 척결을 단행하지 않으면 이 자유당의 정부는 오래가지 못할 것입니다.”……
자유당의 총재인 대통령에서부터 국방장관 그리고 군종감의 직속상관인 공군참모총장까지 앉아 있는 자리에서 새파란 20대의 청년 군종목사가 거침없이 설교를 해나갔다.
감수성이 예민했던 임종덕은 마음 속으로 “저 목사님은 오늘 당장 형무소 가겠구나”하고 걱정이 되었다. 그러나 예배가 끝나자 이승만 대통령은 강대상에서 내려온 군종목사를 덥석 안으면서 “아주 훌륭한 설교였소, 이 자리에 참석한 여러분들이 목사님의 설교를 모두가 다 깊히 생각하고 각자의 소임을 성실히 해 나가십시오”하면서 다시 군종목사의 손을 잡고 목사로서 애로 사항이 있다면 말해보라고 했다.
그래서 그는 특히 공군초대 군종감의 입장에서 제일 큰 애로사항으로 교회가 없어 미군 교회를 빌려쓰는데 하루빨리 우리공군도 자체 교회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이승만 박사는 앞으로 서울 대방동에 건설될 공군본부 건설 때 공군 교회부터 먼저 건축하라고 공군참모총장에게 지시했다.
이날의 설교를 했던 공군 군종감이 지금(2011년) 미국 LA의 동양선교교회 원로 목사인 임동선 목사다. 한편 임종덕 소년은 서울중학교를 졸업후 양아버지의 권유로 미국으로 가게 되었다. 그러나 처음에는 미국행을 극구 반대했다.
이유는 공산당에 의해 부모님의 그 처참한 현장을 목격했기 때문에 자신은 앞으로 군인이 되어 공산당을 타도 한다는 것이 그의 목표였다. 그러나 양아버지는 앞으로 미국에 가서 고등학교와 대학을 졸업하면 다시 군대에 가서 군인이 될 수 있다고 임종덕을 타일렀다.
한편 임종덕은 지금 양아버지께서 미국 본토로 근무지가 바뀌어서 곧 출국하는데 만일 아버지를 따라가지 않으면 자신은 또다시 고아 신세가 된다는 것은 뻔한 일이었다. 그래서 임종덕은 1953년 12월 김장환에 이어 하우스보이 제2호 입양아가 되어 미국으로 건너갔다. (계속)
※ 임종덕의 후반부 이야기 즉, 하바드대학 정치학 박사를 거쳐 월남전에 특수부대 그린베레로 참전 두번의 포로와 두 번의 탈출 그리고 생사의 마지막 갈림길에서 만난 하나님의 간증 이야기가 게재됨.
(글 김수호 : 안드레명상 발행인 주님의교회 협동장로)
이병식 장 로 (주님의 교회)
정재윤 장 로 (주님의 교회)
황의완 안수집사 (주님의 교회)
배홍자 권 사 (주님의 교회)
한득현 장 로 (길가에 교회)
최진성 장 로 (인천 장로 성가 단장)안드레명상 선교헌금안내
국민은행 268802-04-031127
(예금주 김수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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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뉴스
2011-0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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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드레명상 눈물로 얼룩진 나의 人生 노트 - 제103호 (2011.4.1발행)
안드레명상 눈물로 얼룩진 나의 人生 노트 - 제103호 (2011.4.1발행)
1981년 가을 우연히 기독교 방송을 듣고 있던 서울의 이금안이란 처녀는 한 남자가 겪고 있는 너무나도 딱한 처지의 방송을 듣고 충동을 받게 된다. 즉, 사지마비가 되어 밥도 먹여 주어야 하고 하루종일 누워서만 지내는 불쌍한 이 남자를 단 하루만이라도 도와주고 싶은 간절한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직장에 다니는 몸으로 특히 상대가 남자인지라 생각과 현실은 달랐다. 그래서 이금안은 그 불쌍한 남자를 위해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기 시작했다. 17세 때부터 교회에 나간 이금안은 직장의 휴가 때면 국내 큰 기도원을 순례하면서 부흥집회에 참가하여 신앙을 키워온 성숙한 믿음의 처녀였다.
이금안은 어느날 기도 중에 이 남자에게 위로의 편지라도 보냈으면 하는 생각이 나서 성경에 나오는 각종 소망의 글과 희망을 가지라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편지를 보내자 금방 답장이 왔다.
내용은 77세된 노모의 보살핌으로 근근히 살아가고 있는데 지금은 그 노모마저 병이나서 자신을 도와줄 사람이 없어 이제는 그야말로 하루 하루가 절망 속에 지낸다고 했다. 그런데 이금안이 보낸 위로의 편지를 받아보고 다시 삶의 의욕이 생긴다고 강조했다. 이금안은 이때부터 그 환자를 위해서 더 열심히 기도를 했다.
특히 자신의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은 절망에 처한 그 환자를 불쌍히 여기시고 소망을 가지게 해 주셨다는 확신이 왔다. 그래서 이금안은 여러차례 편지를 주고 받은 후 82년 12월 11일 일주일간의 휴가를 내어 그 환자를 찾아 갔다. 전라북도 옥구군 옥산면, 버스를 네 번이나 바꿔타고 사지마비로 누워서 지낸다는 김정언氏를 물어 물어 찾아간 곳은 초라한 시골의 오두막 집이었다.
-26세 나이로 쓰러진 김정언의 기구한 인생
김정언은 공군본부 의장대 출신으로 신장 176cm의 건강한 남자였다. 그러나 제대후 제약회사에 다니던 1969년 갑자기 길에서 쓰러졌다.
병명은 강직성 척추염과 류마티즘성 관절염으로 몸 전체가 서서히 굳어가는 병이었다. 김정언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백방으로 노력했으나, 엄청난 병원 치료비로 인해 유복했던 가정은 파산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결국 김정언은 대전에서 직장생활을 정리하고 어머니와 함께 시골 고향집으로 내려갔다. 목에서부터 어깨, 허리, 엉덩이 관절을 비롯하여 손가락과 발가락의 마디관절 등 온 몸의 관절이 마치 나무 막대기처럼 굳어갔다.
밥도 떠 넣어 주어야 되며 대, 소변도 자리에 누운채로 보고 항문까지 딱아주어야 하는 그야말로 남의 도움이 없이는 도저히 살아갈 수 없는 신세가 되었다.
이 모든 힘든 일을 어머니가 해내고 있으며, 또한 어머니는 남의 집 농사일을 도와주고 그 품삯으로 생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어머니가 일거리를 찾아 아침에 나가면 저녁에 돌아올 때까지 그동안에 아들 김정언은 격렬한 통증에 고함을 지르며 울어댄다. 그러나 어느 누구 한사람 김정언의 몸을 주물러 줄 사람이 없었다. 그의 슬픈 울음 소리는 밤,낮 주야로 그칠날이 없었다.
드디어 나쁜 소문까지 퍼졌다. 즉, 김정언의 집에 귀신이 찾아와서 귀신이 우는 소리라고 했다. 특히 비가 내리는 밤에 김정언의 통증은 더 심해져서 울음 소리는 멀리까지 슬프게 들였다.
그래서 동네 사람들은 저녁이 되면 김정언의 집앞을 피해 지나갔다. 어쩌다 휘영천 둥근 보름달이 김정언의 오두막집 창문으로 보일때면 그는 지난날의 왕성했던 자신을 되돌아보며 잠시나마 아름다운 추억에 눈물이 젖는다.
군산 상고를 졸업하고 공군에 입대했는데, 우선 키가 크고(176cm) 체격이 좋다는 이유로 그는 공군본부 의장대로 차출되었다. 공군본부 의장대는 내외 귀빈이 참석하는 각종 행사에 자주 참가했는데, 그때마다 김정언은 의장대원이 된 것을 영광으로 생각했다.
둥근 보름달 빛이 창문에서 사라지면 김정언의 추억의 회상도 사라진다. “내가 어쩌다 이런 신세가 되어 버렸나” 김정언은 자신의 처지가 너무나 비관이 되어 세 번이나 자살을 기도했다.
잠을 못 잔다는 핑계로 수면제를 모아서 먹기 직전 어머니에게 들켰다. 그리고 전기줄을 합선 감전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또 한번은 벽에 머리를 박치기를하여 뇌진탕으로 죽겠다고 시도했으나 역(力)부족으로 피만 흘리고 실패했다. 이렇게 해서 김정언의 모진 생명의 고통은 13년이 흘러갔다.
특히 80을 바라보는 노모가 가끔 몸이 아파 앓고 있을 때는 김정언의 깊은 한숨소리는 노모의 마음을 더 아프게 한다. “이놈아 어쩌든지 같은 날 같은 시간에 내하고 같이 죽어야지 너 때문에 내혼자 죽고 싶어도 죽을 수가 없다”……
-김정언 앞에 나타난 천사 이금안 처녀
김정언의 오두막집을 찾아온 이금안은 침대에 반듯이 누워 있는 김정언을 처음보는 순간 공포와 무서움에 떨기 시작했다. 긴머리는 김정언의 얼굴을 덮고 있었다. 또한 머리는 먼지와 비듬으로 찌들어 있었고 얼굴은 심한 피부병으로(열상) 퍼져 있었다. 방의 천장은 온통 거미줄로 뒤덮혀 마치 모기장을 쳐놓은 것 같았다. 거기에다 대,소변을 제때 처리를 못해 방안은 흉칙한 냄새로 가득찼다.
이금안은 기막힌 이 현장 앞에서 잠시 넋을 잃고 있었다. 당장 도망치듯 뛰쳐나가야 할지? 그러나 이금안은 우선 방바닥에 꿇어앉았다. 그리고 하나님께 속삭이듯 기도를 했다. “하나님 저분의 저 추함과 흉함도 사랑할 수 있게 해 주세요”……
기도가 끝나고 몇분쯤 지났을 때 조금전 그 무서움과 두려움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김정언에 대한 불쌍한 마음과 함께 앞으로 며칠간이나마 이 남자에게 열심히 봉사를 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금안은 바로 이 생각이 지금 하나님께서 내 마음을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금안은 우선 방안의 대청소를 시작했다. 그리고 뒤이어 김정언의 긴머리를 짜르고 면도를 한 다음 김정언의 몸을 닦기 시작했다.
김정언은 자신의 몸을 닦는 이금안을 보고 이것은 꿈에서나 있을 것 같은 일이 지금 자신의 눈앞에서 전개되고 있으니 이 처녀가 혹시 하늘에서 내려온 즉 말로서만 들었던 바로 그 천사가 아닌가 하고 순간 두려움도 느겼다.……
방안의 대청소와 목욕이 끝나자 이금안은 가정 예배를 드렸다. 찬송가 책을 김정언과 함께 보면서 찬송을 같이 불렀다. 저녁 때가 되어 일을 마치고 돌아온 어머님은 완전 새롭게 변화된 집안 분위기를 보고 나서 이금안을 빤히 쳐다보았다.
혹시 이 처녀가 정신 이상자는 아닌가? 또는 청소 해주고 돈이나 뜯어갈 사람은 아닌가? 이금안은 손수 저녁밥을 지어 김정언에게 먹여주고 밤에는 이미 굳어져 버린 김정언의 전신을 2시간 가량 마사지를 해주었다.
-“나는 살고 싶습니다” 김정언의 눈물의 청혼
이금안의 휴가가 다 끝나갈 무렵 즉 5일째 되던날 밤 예배를 드리고 나서 김정언은 이금안에게 뜻밖의 말을 했다. “이미 오래전에 인생을 다 포기하고 하루빨리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었는데 당신을 만나보니 나도 살고 싶은 의욕이 생겼습니다.
저와 함께 이 곳에서 같이 살아 주십시오”…… 바로 이금안에게 청혼을 한 것이다. 마치 어린아이처럼 울면서 청혼을 하는 김정언의 모습을 바라본 이금안은 충격과 함께 당황했다.
사실 이금안은 김정언과의 결혼이란 꿈에서도 생각할 수 없는 일이요, 오직 이번 직장 휴가는 평생을 두고 가장 보람있고 잊을 수 없는 봉사 활동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이날밤 김정언이 잠든 시간에 이금안은 하나님께 김정언을 위한 간절한 기도를 하게 되었다.
긴 기도 시간이 끝나고 깊이 잠든 김정언의 얼굴을 바라보는 순간 이금안은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주룩주룩 흘렀다. 며칠을 봉사해 봤지만 이 남자는 남의 도움 없이는 이제 도저히 생명을 유지하기에는 한계점에 와 있다는 것을 느꼈다.
26세의 청년이 병마에 시달려 온지 13년 그의 나이 39세, 이금안은 39세의 김정언이 아직 인생을 포기하기에는 너무나 아까운 나이라고 생각했다. 이금안은 눈물 속에 다시 기도를 했다.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한알의 밀알이 썩어져야만 그 결실이 더 많아지고 풍성해진다고 했습니다.
나를 이 세상에 보내주어 연약한 자를 도울 수 있겠끔 건강을 주신 것을 우선 감사드립니다. 주님도 보셨습니다. 송장처럼 누워서 지내는 저 사람을 위해서 내가 봉사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네 이웃을 네몸 같이 사랑하라고 하신 주님, 병들고 추하고 송장처럼 누워 있는 저 불쌍한 김정언씨를 내가 꼭 도와 주어야 하며, 그리고 저 분을 사랑해야만 나도 진실한 주님의 제자가 될 수 있다고 믿습니다”…… 일주일간의 휴가가 끝나고 서울로 오던날 이금안은 김정언에게 직장과 여러 가지를 정리하고 다시 오겠다고 작별 인사를 했다.
그런데 다시 오겠다는 말을 듣는 순간 김정언은 놀란 표정으로 “하나님 앞에 지금 약속하십시오” 하고 다그쳤다. 이금안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눈물로 범벅이된 김정언의 얼굴을 닦아주며 꼭 잡고 있던 손을 억지로 떼고 방문을 나섰다.
-길고도 먼 시련과 고난의 길로 들어선 이금안
서울에온 이금안은 어머니에게 직장을 군산의 좋은 곳으로 옮기게 되었다고 거짓말을 했다. 몸은 서울에 있어도 온갖 고통을 겪으며 지낼 김정언을 생각하면 이금안의 마음은 이미 시골 김정언에게 가 있었다.
이금안이 2개월만에 다시 시골로 내려 오던날 마치 시집간 새색시가 친정집을 가는 것처럼 기쁨이 넘쳤다. 이금안은 이 기쁜 마음이 바로 하나님이 주신다는 것을 즉각 알았다.
2개월만에 이금안을 맞이하는 김정언은 감격의 눈물을 흘리면서 계속 울었다.
불치의 병마에 지친 몸, 거기에다 음식을 제때에 못먹어 뼈와 가죽만 남은 김정언의 몸은 마치 아프리카의 어느 민족을 연상케 했다.
이금안은 먼저 김정언의 굳어져 버린 각종 관절을 주무르는 일에 전력을 다했다. 그동안 정부에서 두 모자에게 주는 양곡과 그리고 노모가 남의 일을 해주고 몇푼씩 받는 돈으로 근근히 살아왔다. 그래서 이금안은 우선적으로 생계문제 해결에 발벗고 나섰다.
당장 먼저 시작한 것이 십자수와 쉐타에 꽃무늬 놓는 일이었다. 환자 곁을 잠시라도 비울 수가 없는 처지라 항상 환자 가까이에서 일을 했다.
그러다가 동네 이웃집을 찾아 다니며 일거리를 맡아 한푼 두푼모아 환자의 약값에 보탰다. 어쩌다 수입이 좋은 날은 동태를 사다가 찌개를 끓여 남편에게 먹여주면 남편은 너무나 오랜만에 먹는 동태찌개라면서 정말 고맙다고 하면서 항상 찡그린 얼굴만 보이다가 그때만은 얼굴에 함박꽃이 된다.
이금안이 그 모습을 물끄러미 보면서 내 한몸의 노력으로 꺼져가는 저 불쌍한 생명이 동태찌개 하나로도 저토록 행복해 하는 모습에 기쁨을 느꼈다. 식물인간처럼 지내는 남편을 지극 정성으로 모시는 이금안에 대한 소문이 동네에 금방 퍼져 나갔다.
한쪽에서는 하늘에서 보내준 천사라고 하면서 영화나 소설에서나 볼 수 있는 처녀라고 말했으며, 또 한쪽에서는 과연 저 서울 아가씨가 며칠이나 살 수 있을까? 왜 저렇게 예쁜 아가씨가 이제 얼마 안 있으면 죽게될 남자에게 저렇게 열성을 다해 보살펴 줄까?
이금안은 그들의 말에 조금도 흔들리지 않고 일편단심으로 남편을 보살피며 오직 하나님께만 의지하면서 특히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인지를 동네 사람들에게 자신의 행동으로 보여주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이금안에 대한 하나님의 뜨거운 사랑은 마을사람들에게 크게 퍼졌다. 드디어 생각지도 않는 전도의 기류가 흐르기 시작하여 이웃 동네까지 복음이 전파되어 작은 시골교회가 갑자기 부흥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기도원 원장이 마련해 준 눈물의 결혼식
이금안은 남편에게 좀더 확실하고 깊은 신앙을 심어주고 싶어 남편을 트럭에 싣고 부흥회가 열리고 있는 호렙산 기도원을 찾았다. 남편은 목을 움직일 수 없고 허리도 꾸부릴 수 없기 때문에 택시를 탈수가 없다.
그래서 마치 시체를 담은 관처럼 침대에 누운 그대로 트럭에다 싣고 갔다.
퍽 오랜만에 기도원을 찾은 이금안의 마음은 금방 뜨거워졌고 남편을 위한 40일 철야기도에 들어갔는데, 첫날부터 이금안은 은빛 찬란한 십자가의 환상을 보고 섬짖놀라기도 했다. 이금안은 하나님께 우선 남편의 건강을 위해 간절히 기도했다.
지금 꺼져가는 저 생명을 연장시켜 주시고 그리고 남편이 벌떡 일어나게 해달라고 했다. 수백명의 성도들이 일사분란하게 찬송을 부르고 또 통성기도를 하고 있는 모습을 멀리 한쪽 구석에서 보고 있는 남편 김정언은 너무나 생소한 광경에 얼떨떨하고 있었다.
어느날 기도원 백성애 원장이 이금안에게 찾아와 침대 에 누운 사람과 어떤 관계이냐고 물었다. 기도원 원장은 이 두사람이 너무나 가련하고 불쌍해 보였기 때문이다. 이금안으로부터 자초지종(自初至終) 이야기를 다 듣고난 기도원장은 이금안을 친딸처럼 껴안고 위로를 해 주었다.
며칠이 지난 후 백성애 기도원장은 이금안을 불렀다. 기도원장은 당신들을 위해 기도를 했는데, 신랑은 침대에 누워 있고 그 곁에 신부가 서서 결혼식을 올리는 장면을 하나님께서 선명하게 환상을 보여 주셨다면서 이금안에게 저 불쌍한 불구의 남자와 혹시 결혼식을 하겠느냐고 다시한번 확인하는 것이다.
이금안은 두말 없이 그렇게 하겠다고 했다.
백성애 기도원장은 결혼식때 신랑 신부가 입을 한복 두벌에 금반지와 음식까지 장만했다.
기도원에 온지 16일만에 거행된 이날 결혼식엔 남편은 병원용 침대에 누운채 고향 친구들에 의해 식장에 입장했고, 신부 이금안은 그를 데리고 입장할 일가친척 한사람도 없어 외로이 서 있었는데 그때 어떤 장로가 나와 신부 입장을 시켜주었다.
침대에 누워 있는 신랑 옆에 선 신부는 예식이 진행되는 동안 소리없이 울고 있었다.
부흥회에 참석한 오백여명의 성도들은 이 희안한 결혼식을 보고 특히 신부가 너무나 불쌍해서 어느 누구의 제의도 없었는데, 모두가 각자 천원씩을 축의금으로 내면서 눈시울을 적시고 있었다.
특히 예물 교환때 신랑이 손을 쓸수가 없기 때문에 기도원 원장이 신랑 대신 신부에게 금반지를 손가락에 끼워주었다. 이날의 결혼식에서 이금안은 하나님의 오묘한 섭리에 의해서 자신의 결혼식을 하게된 것에
대해 하나님께 뜨거운 감사 기도를 드렸다.
이금안은 만일 이때 결혼식을 올리지 못했다면 자신들의 처지나 형편으로는 지금까지도 결혼식을 못 올리고 살았을 것이라고 회고했다. 한편 당시 여러 기관에서 이금안에 대한 소문을 듣고 그에게 표창을 주었으며, 특히 결혼을 앞둔 예비 부부들이 이금안을 찾아와 깊은 감동을 받았다고 했다.
또 한가지 특이한 일은 이 동네 젊은 부부들의 싸움이 일체 없어졌다고 한다. 즉 이금안 부부의 사는 모습을 보노라면 싸울 이유가 없어진다고 했다.
한편 이금안의 소문은 서울의 친정집에도 알려져서 어느날 어머님과 남동생이 찾아왔다.
식물인간처럼 누워 있는 김정언의 모습을 본 이들은 한탄을 하면서 이금안을 밖으로 불러내어 무조건 서울로 가자고 했다.
이금안은 먼저 어머니께 용서를 빈다음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고 지금도 그날의 했던 말은 기억하고 있었다. “만약 어머니의 자식 중에 이러한 사람이 있는데 저처럼 누군가가 보살펴 주겠다고 하면 그 얼마나 고마운 일입니까? 우리 인간의 생명은 누구나 다 소중한데 이러한 사람을 너도 나도 외면해 버리면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눈물로 애원하는 딸의 말을 다 듣고난 어머니는 긴 한숨을 쉬고난 뒤 그럼 기왕 어려운 결심을 했으니 너의 인생을 너가 책임지고 그리고 고생이 되겠지만 세상에 귀감이 되는 딸이 되어 살아가라고 짧은 말한마디를 남기고 서울로 갔다.
-보석처럼 빛나는 하나님의 선물
세상 사람들의 예상을 뒤엎고 이들 가정에는 아들과 딸이 태어났다. 아이들이 성장하면서 날이 갈수록 살림살이는 더 어려워졌다.
그래서 이금안은 어느날 중대한 결정을 내렸다. 즉 하나님이 선물로 준 이 귀한 아들과 딸을 제대로 키우고 교육시킬려면 시골에서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느끼고 군산으로 이사를 왔다.
새벽 4시에 일어나서 학교 청소에서부터 건물 청소 등 닥치는대로 일을 하면서, 아이들의 교육비와 남편의 약값을 만들어 나갔다. 한편 서울 친정에서는 남편 때문에 친정 발걸음이 끊어진 것이 안타까워 남동생이 서울 영등포 양평동에 30평 규모의 아파트를 얻어 주어 2010년에 이사를 왔다. 그리고 아파트 근처 부동산 사무실에 취직까지 했다.
지난 2월말 (2011년) 부동산 사무실에서 필자와 만난 이금안은 가족들의 근황을 자세히 알려주었다. 결혼할 때 39세였던 남편 김정언은 지금은 69세(2011년)의 노인이 디어 43년을 누워서 지내고 있으며, 29세된 딸과 27세의 아들은 직장에 다닌다고 했다.
그리고 24세에 시집온지 30년 그동안 새색시 이금안도 그의 나이 55세가 되었는데 주위에서는 그의 모습이 탈랜트 고두심을 닮았다고 한다.
시집올 때 77세의 시어머니는 90세로 세상을 떠나면서 이금안의 손을 꼭잡고 말 한마디를 남기고 눈을 감았다. “고마웠다”…
아파트가 사무실 근처에 있어서 두시간마다 집에가서 남편의 몸을 마사지하고 그리고 식사도 챙겨 준다고 했다. 이금안의 필사의 노력으로 건강도 좋아져서 특히 손가락이 호전되어 지금은 TV 리모콘 작동과 전화도 받을 수 있다고 한다.
현재 출석하는 교회는 양평동의 영은교회(고일호목사)인테 주일날 아들과 딸을 양쪽에 세우고 함께 교회로 갈때마다 이금안은 잠시 회상에 잠긴다. 이 아이들을 임신 했을 때마다 영양실조로 몇차례씩 쓰러지기도 했으며, 한밤중에 남편이 위독할 때는 아기를 업언체 약을 구하러 추운 겨울 밤길을 걸었다.
특히 겨울철 땔감 나무를 구하기 위해 임신 7개월의 무거운 몸을 이끌고 산에 올라가 가시덤불과 억새풀을 짤라다 날랐다. 또한 일감을 구하기 위해 당시 버스비 340원을 아끼려고 아기를 업은채 하염없이 걸어 다녔다.
그러나 그 힘들었던 일들도 하나님께서 자신을 항상 보살펴 주셨기 때문에 그 아이들이 지금 이만큼 훌륭하게 성장했다고 한다. 한편 이금안의 인생에 시련과 두려움 그리고 고통과 절망감이 엄습해 올 때마다 그는 성경 이사야 41장 10절을 가슴에 품고 오직 하나님을 믿었다고 한다. 『
두려워 하지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글 김수호:안드레명상 발행인 주님의 교회 협동장로)
※ 그동안 안드레명상 독자들에게 발송된 편지 봉투의 주소 표기가 이번부터 깨끗하게 변모되었습니다
즉 과거의 주소는 필자가 자필로 쓴 주소 원본을 그때마다 복사해서 그 것을 다시 일일이 가위로 짤라 풀로 부쳤던 것입니다. 이러한 사정을 안타깝게 생각한 전 KBS TV 기술국장 김영호 독자께서 주소록을 라벨로 제작해 주셨습니다.
이로 인해 안드레명상 발송 작업이 한결 쉬어졌습니다.
김영호 독자님의 그 정성어린 협조에 경의를 표합니다.
이병식 장로 (주님의 교회)
이병식 장로 (주님의 교회)
류석우 장로 (주님의 교회)
인태오 장로 (상도성결교회)
김승기 장로 (길가에 교회)
강석인 집사 (주님의 교회)
박혜원 권사 (주님의 교회)
이동명 권사 (주님의 교회)
권석자 집사 (주님의 교회)
정선화 집사 (샬롬찬양대)
안드레명상 선교헌금안내
국민은행 268802-04-031127
(예금주 김수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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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뉴스
2011-0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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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문화부장관 이어령을 기독교인으로 만든 딸 이민아
월드뉴스
2011-01-14
-
한국의 백정(白丁) 제도를 폐지시킨 하나님의 역사
백정은 구 한말까지 5백년간을 일평생 천대만 받으며 살았다. 우선 머리에 상투를 못하게 했고 또한 머리카락을 다듬지(이발) 못하게 할 뿐만 아니라, 봉두 난발을(머리카락을 쑥대 밭처럼 엉크러짐)해야 한다. 또한 갓이나 망건을 못쓰게 했으며 도포도 못입게 했다.
특히 백정은 호적에도 못 올리며 나라의 인구조사에도 제외시켜서 사실상 거지보다 못한 최하층의 사람들이었다. 특히 슬픈 일은 백정은 죽어도 상여를 사용못하며 시신은 지게에 지고 산으로 가서 묻었다.
또한 자녀들이 결혼할 때는 가마를 탈수가 없기 때문에 아버지가 신부를 업고 시집을 가야했다. 특히 백정은 아무리 돈이 있어도 집을 건축할 때 기와를 얹지 못하게 했다.
길거리에서 양반이 지나가면 백정은 즉시 땅바닥에 엎드려 고개를 숙여야 한다. 당시 양반들은 나라에서 각종 좋은 혜택을 받으며, 과거 시험도 보며 병역은 물론, 세금과 부역을 면제 받았다.
그러나 간혹 양반이라도 죄를 지으면 가벼운 회초리 몇대만 맞고 큰 몽둥이로 때리는 매는 자기집 머슴이 대신 육모 몽둥이로 맞아준다. 또한 백정이 정부 관리로부터 몽둥이로 맞아 죽는다 해도 그것을 하소연 할 수가 없는 그야말로 인권이란 말 자체가 없었다.
이러한 인간 이하의 멸시 천대를 받으며 500년간을 살아온 백정들이 구 한말 교회 출석 1년만에 장로 선거에서 양반을 누르고 장로가 되었다.그가 바로 백정 장로 박성춘이다. 백정 박성춘이 장로가 되기까지 그 파란만장의 생애를 보면 바로 하나님의 위대한 섭리와 역사가 있었다는 것은 직감할 수 있다.
박성춘은 1862년 서울 관자골 지금의 종로구 관훈동에서 백정의 아들로 태어나 한번 백정은 죽을 때까지 백정이기 때문에 백정의 딸과 결혼 백정 아들을 낳았다. 박성춘은 소를 도살해 주고 수고비를 받아서 살아가는 어려운 가정이었다.
박성춘의 가정이 풍지박살이 난 것은 허가 받지 않는 소를 몰래 잡아 주었다는 이유로 군관과 포졸들이 박성춘을 체포할 때, 그의 부인이 결사적으로 막으려다 그들이 휘두르는 육모 방망이에 맞아 죽었다.
그리고 며칠후 둘째 아들까지 병으로 사망하자, 박성춘은 큰아들 봉출이 만은 천추의 한이 되었던 백정으로서 멸시천대를 면하게 하기 위해서 공부를 시키기로 했다.
그래서 아들을 데리고 당시 교회 안에서 아이들을 무료로 가르친다는 소문을 듣고 지금의 서울 을지로에 있던 곤당골교회 예수교 학당을 찾았다. 박성춘은 학교에 대해 조건을 달았다. 즉, 내아들 봉출이를 무료로 공부시켜 주는 것은 대단히 고맙지만, 아들을 주일 예배에는 보내지 않겠다고 했다.
이렇게 해서 아들 봉출이는 대대로 내려온 이 백정 집안에서 처음으로 학생이 되었고, 학교에서는 봉출이의 이름을 서양(瑞陽) 즉 상스러운 태양이란 뜻에서 박서양이라고 새로 지어 주었다.
박서양은 열심히 공부하여 모범학생이 되었고 선생님들은 서양이가 비록 백정의 아들이지만 성품이 바르고 오직 공부에만 열중하는 것을 보고 서양이를 친자식처럼 보살폈다. 이때가 1894년 동학운동이 일어나고 청일전쟁이 터져 구 한말 조선반도는 열강들의 전쟁의 먹구름이 덮고 있었다.
한편 1892년 미국 북장로교의 파송으로 사무엘 포먼 무어 선교사가 인천 제물포항에 도착 본격적인 선교 활동에 들어갔다. 그가 처음 노방전도를 한 곳은 지금 서울시청앞 롯데호텔 부근인 곤당골이었다.
이 지역에서 매일같이 열심히 전도지를 나누어주면서 16명의 결신자를 모우고 곤당골 교회라는 간판을 걸고 첫 예배를 드린 날자가 1893년 3월 19일이었다. 이곳 곤당골 지역에도 백정들이 많이 살고 있어서 무어 선교사는 특별히 백정들에게 더 많은 전도 활동을 했다.
한편 1894년 당시 전국에서 콜레라가 번지기 시작 하루 3백명씩 죽어갔다. 안타깝게도 박서양의 아버지 박성춘도 이 무서운 전염병에 걸려 곧 죽게 된다는 소문이 학교에 퍼지자, 외국인 선교사 두 사람이 박서양을 앞세우고 박성춘을 찾아갔다.
두 사람의 선교사는 곤당골 교회의 무어 목사와 고종황제의 주치의였던 에비슨 박사였다. 이 분들의 치료로 박성춘은 기적적으로 생명을 건졌다.
특히 박성춘이 기절초풍할 정도로 놀란 것은 어떻게 감히 고종황제의 주치의가 짐승보다 못한 취급을 받는 백정의 초라한 집까지 친히 찾아와서 진료를 해준다는 것은 꿈도 꿀 수없는 것이었다.
박성춘은 며칠후 아들 서양이가 다니는 예수교 학당을 찾아가서 이제부터 아들을 주일 예배에 참석시켜 달라고 했으며, 아울러 자신도 예수교 학당에서 공부를 하겠다고 했다.
이렇게 해서 박성춘은 글을 배워 성경을 탐독하면서 신실한 기독교인으로 그의 인생관은 하루가 다르게 변모되어 갔다. 그가 출석하던 곤당골 교회는 양반들과 정부관리 그리고 백정들도 많이 참석하여 교회는 날로 부흥했다.
양반 성도들이 “백정들과 함께 예배를 드릴 수 없다” 양반들과 정부 관리들은 백정들과 한자리에서 같이 예배를 드릴 수 없다면서, 무어 목사에게 중대한 제의를 했다. 즉 양반들은 예배당의 제일 앞에 특별석을 마련해서 백정들과 분리해서 앉게 해 달라고 했다.
그러나 무어 목사는 한마디로 거절했다. “하나님 안에서는 양반과 천민의 구별이 없고 모두가 평등합니다”라고 선언했다. 특히 백정은 포졸, 광대, 고리장, 무당, 기생, 갓바치 등 천민 중에서도 가장 천한 최 하류의 신분이다.
한편 박성춘은 1895년초에 무어 목사에게 세례를 받는다. 그때 그의 나이 33세로서 교회봉사와 전도에 열성을 다하자 무어 목사는 박성춘이 앞으로 교회의 큰 일꾼이 될 것으로 확신했다.
그러나 앞서 특별석을 만들어 달라던 양반들은 개나 소, 돼지 등 동물을 전문으로 때려 잡는 백정 박성춘을 절대 교회에 못 나오겠끔 무어 목사에게 또한번 압력을 넣기도 했다. 그러나 무어 목사는 일언지하로 거절했다.
결국 양반들은 백정들과는 함께 예배를 볼 수 없다면서 새로운 교회를 개척해서 나갔다. 그 교회가 지금의 광교동 근처 문숫골 교회다. 교회가 분리되자 제일 크게 상심한 것은 백정 박성춘이었다.
박성춘은 자기와 같은 백정교인들 때문에 무어 목사의 처지가 난감해지자 그는 전도에 용기를 내어 매일같이 노방전도에 나갔다. 박성춘의 친절한 전도에 백정들이 하나둘씩 곤 당골 교회로 몰려오면서 교회는 활기를 찾고 크게 부흥했다.
곤당골 교회는 결국 성도들 수용에 한계점에 달했고 반면 분리해 나간 순수 양반교회인 홍문수골 교회는 점점 쇠퇴하면서 양반들이 다시 곤당골 교회로 되돌아오는 처지가 되었다.
-한국 최초의 외과의사가 된 박서양
한편 박성춘의 아들 박서양은 예수교 학당을 졸업한 후 왕립병원인 제중원에서 에비슨 박사의 도움으로 의학공부에 전념하면서, 장차 외과 의사가 되겠다는 목표를 정했다. 이 목표 달성은 바로 백정의 아들이 아닌 완전 자유와 평등의 인간으로 즉 백정과 천민의 굴레를 벗어나는 것과 직결된다고 생각했다.
한편 에비슨은 미국의 대 사업가 세브란스의 거액 기부금으로 남대문 봉숭아골에 한국 최초의 병원을 준공하여 병원 이름을 세브란스 병원이라고 지었다. 한편 에비슨이 의학교육을 시작한지 10년만인 1908년 6월 3일 7명의 첫 졸업생이 배출됐다.
이 졸업생 중에 박서양은 후배 교육을 위해 교수로 재직했는데 그의 전공은 화학과 인체 해부학이었다. 당시 사람들이 병이나면 한의사를 찾는 길 이외는 다른 방도가 없었다. 특히 수술로서 중병을 고친다는 것은 상상도 못하는 시절이었다.
결국 수술하지 않으면 죽는다는 것을 훤히 알고 있는 양반층 환자들이 세브란스 병원의 박서양 의사에게 가서 수술만 받으면 살 수 있다는 사실이 서울 장안에 소문으로 크게 퍼졌다.
그래서 양반 환자들은 박서양 의사에게 진찰이라도 한번 받기 위해 줄을 섰고 그 앞에서 정중하게 인사를 해야 하는 바야흐로 양반이 백정출신 의사에게 고개를 숙이는 시대가 도래했다.
박서양이 한국 최초 외과 의사가 된지 2년만인 1910년 8월 29일 “한국 황제 폐하는 한국 전부(全部)에 관한 일체의 통치권을 완전하고도 영구히 일본국 황제 폐하에게 양여함”이란 대한 제국의 국권이 일본에게 빼앗기는 소위 국치일(國恥日)을 당하게 된다.
박서양은 국권을 강탈 당한 땅에서 의사 노릇을 계속할 수 없었다. 비분강개한 박서양의 가슴에 드디어 애국의 혼이 불타면서 독립운동을 하기 위해 고국을 떠난다.
1917년 15만여명의 우리 동포가 살고 있는 간도 연길현으로 가서 구세병원을 개업했는데, 한국인이 경영하는 병원으로는 처음이었다. 구세병원은 년간 1만명 이상의 우리 동포 환자를 진료하는데, 그중 약 3천명 이상을 무료 진료를 해주었다.
박서양은 병원 건축과 동시에 교회도 설립하여 동포들에게 기독교 신앙과 민족의 혼을 심어주기 위해 초등 교육기관으로 숭신학교를 설립 자신이 교장으로 봉사했다.
병원과 교회와 학교 바로 이곳은 앞으로 조국의 독립운동에 무한한 자산이 된다고 확신했다. 또한 조국에서 일어난 3.1운동에 맞추어 만주 지역에서는 대한국민회라는 독립운동 단체가 결성되었는데, 이때 박서양은 대한국민회 군사령부의 군의관으로 임명되었다.
한편 1931년 만주사변 이후 일본은 만주지역의 우리 독립운동을 막기 위해 1차적으로 민족의 혼을 양성한다는 이유를 내세워 숭신학교를 폐교시켰다. 학교가 폐교되자 박서양은 1936년 고국으로 돌아와 황해도 연안읍에서 의료활동을 하다가 1940년 지금의 고양군 수색으로 이사를 왔다.
이사온 그해 12월 15일 박서양은 그토록 갈망했던 조국의 독립을 보지 못하고 55세의 나이로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다. 아마 하늘 나라에서도 박서양이 꼭 필요한 인재(人材)였기 때문이었을까? 지난 2008년 우리 정부는 뒤늦게나마 박서양을 독립운동 유공자로 선정해 건국포장과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백정 박성춘과 승동교회의 부흥
백정들과는 절대 같이 예배를 드릴 수 없다고 나갔던 양반들이 곤당골 교회로 되돌아오자 곤당골 교회는 수용의 한계점에 도달했다. 그래서 무어 목사는 인사동에 새 교회를 건축하는데, 이 지역은 불교의 본산지라 할 수 있는 조계종을 비롯한 크고 작은 암자들이 많아서 동네 이름도 불교 마을로 불렀다.
그러나 무어 목사는 이와 같은 불교 마을에서 교회가 굳건하게 서기 위해서 즉 승리하기 위해서 이길 승(勝)과 마을 동(洞)자를 넣어 교회 이름을 승동교회로 정했다.
승동교회가 이곳으로 옮겨 갑자기 부흥할 때 크게 협력한 사람이 성서한국 번역가요 대 전도자인 서상륜이었다. 참고로 새문안교회 개척당시 설립자 14명중에 13명을 서상륜이 전도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한편 승동교회 부흥의 또 한사람의 일꾼이 백정 박성춘이다. 무어 목사로부터 신앙 훈련을 철저하게 받았던 박성춘이 노방 전도를 나가면 금방 수십명에서 수백명 사람들이 모여든다.
특히 양반층의 사람들이 “도대체 백정 놈이 무슨 말을 어떻게 잘 하길래”하면서 많은 양반들이 구경을 나온다. 박성춘의 전도 내용의 핵심은 “내가 교회를 나가지 않았다면 백정놈이 감히 이 자리에서 여러분들에게 전도 연설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 여러분도 예수 믿고 천당 가십시오. 지금 내 등 뒤에는 여러분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성령님께서 나를 인도해 주고 있습니다”.....청산유수 같은 연설이 끝나면 전도지를 나누어 준다.
백정들은 글을 모르니까 전도지를 소중하게 가지고 있지만 양반들은 전도지를 받는 즉시 땅바닥에 던지고 신발로 비벼 버린다. 박성춘은 이 때가 제일 마음이 아프다. 이때 그는 큰 소리로 외친다.
“지금 양반 여러분은 성령님을 모독하고 있습니다. 두고 보십시오. 앞으로 하나님은 틀림없이 전도지를 땅바닥에 버린 사람들에게 벌을 내리실 것입니다.”
박성춘의 전도 연설은 서울 장안에 널리 알려져 독립협회가 주관하는 시민대회 연사로 등장한다. 즉 1898년 10월 29일 서울 종로에서 제2차 관민공동회 개막 연설을 했는데, 그 날의 연설 초반부만 소개한다.
“나는 대한의 가장 천한 사람이고, 무지 몽매한 자입니다. 그러나 충군애국(忠君愛國)의 뜻은 대강 알고 있습니다. 나라를 이롭게 하고 국민을 편하게 하는 길은 관민(官民)이 합심한 이후에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저 천막에 비유하자면 한 개의 장대로 받치면 역부족이나 많은 장대를 합하면 그 힘이 심히 견고합니다.
원컨데 관과 민이 합심하여 우리 대 황제의 성덕에 보답하고 국운을 만세에 누리게 합시다”.....
-장로 선출에 양반과 백정이 대결했다.
1911년 승동교회는 상회의 허락으로 장로 1인을 선출하는데, 세례 받은지 1년이 지나고 만 30세 이상이면 누구나 장로될 자격이 있습니다 라는 공고문을 교회 벽에 부쳤다. 백정 박성춘은 주위의 권고로 후보에 나가 양반 후보와 대결했다.
선거 결과는 “박성춘이 공동 의회에서 회원의 3분 2 이상을 득표하여 승동교회 초대 장로가 되었습니다”라고 무어 목사가 크게 외치자, 백정 교인들은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나 큰 함성을 지르며 춤을 추었다.
이날의 기적은 한국 기독교 역사에 또 하나의 새로운 이정표를 세웠다. 한편 양반들은 박성춘 백정이 장로가 되자, 백정 밑에서 신앙 생활을 절대 할 수 없다면서 안국동에 안동교회를 개척해 나갔다.
한편 박성춘이 장로가 되면서 경총노회 재정위원회 임원직을 맡으면서 그의 활동 범위가 계속 확장돼 갔다. 특히 전국에 백정 교회를 계속 세워 나가면서 당시 내각 총서 유길준에게 장문의 탄원서를 보냈다. 그 내용은『백정 차별 금지법』을 만들어 백정들도 갓과 망건을 쓰게 해달라고 했다.
유길준은 당시 해외 국비 유학생 1호로서 미국 보스톤대학을 졸업했는데, 후일 그가 세상을 떠나던 날 아들과 조카에게 꼭 신약성서를 읽어라는 유언을 했다. 특히 유길준은 개화 사상가로서 박성춘의 탄원서의 주장은 당연한 것으로 즉시 허락해 주었다.
박성춘은 백정들이 500년간 써보지 못했던 망건과 갓을 제일 먼저 썼던 백정으로 그가 처음 갓을 썼던 날이 얼마나 행복하고 기뻤던지 그 날밤 잠을 잘때도 갓을 쓰고 잤다는 일화가 있다.
다음 주일날 아침 박성춘 장로가 도복차림에 갓을 쓰고 당당하게 교회로 들어오는 모습을 보고 많은 성도들이 웃고 우는 희비가 연출되었다. 박성춘 장로 장립 2년후 이 교회에는 흥선대원군의 조카이며 왕손이었던 이재형이 장로가 된다.
백정 장로와 왕손 장로가 서로가 손을 잡고 교회를 위해 간절히 기도하는 모습을 상상만 해도 가슴이 설레인다. 일자 무식이었던 천민 백정이 아들의 손목을 잡고 교회로 향했던 그 날의 그 발걸음이 이들 부자(父子)의 운명을 바꾸어 놓았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역사였다.
-찬송가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가 작곡된 얘기
우리나라에서 작곡된 찬송가 중에 외국에서 가장 많이 알려진 찬송가를 든다면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를 들 수 있다. 이 찬송은 현재 독일어, 영어, 라틴어, 중국어, 이탈리아어, 일본어로 번역되어 이들 나라에서 애창되고 있다고 한다. 특히 외국 사람들의 경우 명곡은 원어로 불러야만 가치가 있다고 해서 한국말 그대로를 부르는 사람이 많다고 한다.
한편 국내에서도 세종문화회관이나 큰 공연장의 음악회를 보면 이 찬송이 꼭 프로그램 순서에 들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이 찬송은 잔잔한 시냇물이 흐르듯이 진행되다가 서서히 장엄하고 웅장함으로 변하다가 다시 우렁찬 곡으로 변화되는 것이 이 찬송의 특징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 찬송은 교인뿐만 아니라 음악을 하는 사람치고 누구나 다 배워두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한다. 그런데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란 이 불멸의 찬송가를 누가 작곡했으며, 특히 이 찬송가가 작곡된 그 배경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으로 본다.
이 찬송은 목원대학교 대학원 교수이며 작곡가였던 고(故) 나운영 장로가 6.25전쟁 때 부산 피난생활에서 작곡한 것이다. 필자도 이 찬송이 작곡된 내용을 ‘인간만세’ 방송을 제작할 때 비로소 알게 되었다.
1950년 피난지 부산에서 어느날 성경을 읽고 있던 나운영 장로는 시편 23편을 읽어가는 중 생각지도 않았던 악상이 갑자기 눈앞에 전개되었다고 한다.
그 순간의 모습은 마치 비가온 뒤 무지개가 선 것 같이 선명했다고 한다. 나운영 장로는 즉시 연필을 잡고 악보를 그려 나갔는데, 그 순간 순간의 연필 놀림은 마치 다급한 시외전화를 메모하는 것보다 더 빨랐다고 한다. 성경 시편 23편은 그 문장이 너무나 훌륭해서 우리나라 서예전 전시회에서 이 글의 출품이 빠지는 일이 없다고 한다.
그러나 그 긴 문장을 가사로 해서 악보로 만들어간 시간이 정확하게 꼭 3분이었다고 한다. 보통 악보에 멜로디만 기록해도 3분 이상이 걸린다고 했는데,그 당시 그 순간에 어떻게 해서 불과 3분만에 특히 반주까지 완성을 했는지?
나운영 장로는 그 3분동안에 일어났던 그 일을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뛴다고 한다. 나운영 장로는 평소 작곡을 하나 할 때 보통 30번 이상을 고쳐야만 마음에 들 듯 말 듯한다고 했다. 그런데 이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는 그야말로 1점 1획도 고치지 않고 하나님이 불러주는 영감 그대로를 단숨에 작곡을 했다고 한다.
그래서 나운영 장로는 평소 자주 듣던 ‘하나님의 영감’이란 말을 직접 체험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나 영감 앞에서 우리 인간은 먼지보다도 못한 나약한 존재일 뿐이라고 했다.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두 번째 지시
나운영 장로가 두번째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것은 그후 29년이 지난 1979년 8월 24일 제주도 어느 호텔에서 기도를 하던 중에 일어났다. “너는 지금부터 매월 일곱곡의 찬송가를 작곡해서 봉헌하라”는 내용이었다고 한다.
그날의 그 명령을 실천하기 위해 나운영 장로는 매월 일곱곡의 찬송을 작곡해서 91년 11월 세째주일에 드디어 1천곡을 작곡 봉헌했다고 한다.
나운영 장로는 이미 중앙고보 3학년때 지금도 중학교 3학년 교과서에도 있는 ‘아 가을인가요’를 작곡했고 18살 때 동아일보 신춘문예 작곡 부문상을 받았는데 이때 ‘가려나’를 작곡했다. 나운영 장로의 음악생애에 가장 비애를 느낀 것은 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서 손기정 선수가 마라톤에서 우승을 했을 때라고 한다.
그때 우리 민족은 이 기쁨의 감격을 표현해서 다같이 부를 노래가 없었다고 한다. 당시 그가 일본 동경제국 음악학교로 급히 유학을 떠난 것도 이러한 연유에서 기인된 것인지도 모른다.
평생을 찬송가 작곡으로 살아온 나운영 장로에 대해서 외국의 학자들이 ‘나운영 성가’라는 연구 논문을 집필해서 석사학위를 받은 분도 있고, 또한 국내 학자들도 ‘나운영 가곡 연구논문, 나운영 교향악 작품’등 각종 연구논문을 발표하기도 했다. 한사람의 작곡가가 음악을 통해서 인류 역사에 엄청난 업적을 남긴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글 : 김수호 (앙드레명상 발행인, 주님의교회 협동장로)
주님의 교회 최명문 선생님
" 이병식 장로
창 천 교 회 김영석 권사
조 규 공 (소속을 밝히지 않았음.)
안드레명상 선교헌금안내
국민은행 268802-04-031127
(예금주 김수호)
* 안드레 명상은 KBS로고스와 월드 뉴스에도 동시 게제됩니다.
* KBS로고스 : (www.kbslogos.com)
* 월드뉴스 : :(이글은 www.worldnews.or.kr, 또는 www.월드뉴스.kr의 칼럼연재 내 김수호 코너에서 볼수 있습니다)
* 인터넷 : www.andre.pe.kr 한글로『안드레 명상』을 쳐도 됩니다.
발행처 : 안 드 레 명 상
서울시 강남구 청담동 17-4
H. P : 011-9871-0685
월드뉴스
2010-0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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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드레명상, 전쟁과 신앙 3편
월드뉴스
2010-0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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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주월 한국군 사령관 채명신의 전쟁과 신앙 3편
- 월남전에서 역사적인 오작교 작전
오작교 작전은 당시 맹호사단이 주둔하는 퀴논에서 백마사단 북단 투이호아 까지를 개통시키는 작전인데 미군제 101공수사단이 이 지역 투이호아 지역에 10개월간 있으면서도 개통작전에 실패했던 도로다.
이곳 1번 도로는 제일의 항만, 비행장 등의 군사시설과 또한 월남 산업의 중추 지역으로 월남 전체 경제의 80%이상의 수입원이 집중되어 있는 곳이다. 또한 한국의 기술인력의 진출여건을 보장하여 한국군과 한국의 국가 이익의 교두보 역할을 할 수 있는 중요성을 갖는 곳이다.
작전을 앞두고 주월 미군사령관 웨스트 모얼랜드는 채명신에게 "그 작전은 절대하지 마시오. 그 지역 주변의 주민들은 전부가 베트콩들이요"하고 극구 말렸다.
그러나 드디어 작전은 시작되었다. 1967년 3월 15일 맹호사단은 북에서 남으로 백마사단은 남에서 북으로 적을 소탕하는 오작교 작전의 서막이 올랐다.
먼저 맹호와 백마사단이 적진 깊숙히 들어갈 지역에 미 제7전술 공군의 항공 폭격이 시작되어 이 지역을 숙대밭으로 만들었다. 뒤이어 우리 장병들을 태운 수백대의 미군헬기는 하늘을 까맣게 덮고 적진을 향해 날고 있었다.
채명신은 이 광경을 보면서 헬기에 의한 공중 기동작전은 한국군이 현대화로 가는 시험이라고 만족하게 생각했다. 작전이 시작된지 한달이 넘으면서 맹호와 백마는 마지막 목표 지점을 향해 진격을 계속했다.
베트콩과 월맹 정규군은 곳곳에서 포착 사살되고 전의를 완전히 상실한 적들을 생포하여 이들을 통한 적들의 비밀동굴 진지를 폭파하는데 이용했다.
연 35일간 폭염이 내려쬐는 더위, 험준한 산악, 그리고 앞이 잘 보이지 않는 정글의 숲속에서 불굴의 투지로 전투는 계속되었다.
그 결과 지금까지 미군과 월남군이 난공불락으로 내세운 베트공의 푸엔성 본부를 파괴 소탕함으로써 드디어 맹호와 백마는 1번 도로에서 맹호사단장 유병현과 백마사단장 이소동이 감격의 포옹을 했다.
이 역사적인 연결식에서 채명신은 하늘을 향해 하나님께 뜨거운 감사기도를 했다. 이 작전을 그가 바로 구상하고 작전명 까지도 견우와 직녀가 상봉한다는 오작교 작전으로 정했다. 이날 연결식에는 미군 장성과 월남 푸엔성장 내외신 기자들이 총 집결 되었다.
이곳 1번 도로는 월남의 사이공과 월맹의 하노이를 연결하는 월남 제일의 동맥으로 우선 17도선 이남 지역의 1번도로가 개통됨으로서 군수물자와 산업설비, 통신, 기타 민간 버스까지도 신나게 달렸다.
이 오작교 작전의 성공으로 전세게 유력신문과 통신은 일제히 ‘한국군을 배워라, ’랑데뷰 작전의 성공, ‘맹호와 백마의 만남, 등으로 크게 보도했다.
이 오작교 작전의 전과와 손실을 요약하면 맹호사단은 적사살 608명 포로와 귀순 437명에 아군전사자 16명, 전상자 108명 그리고 백마사단은 적사살 266명 포로와 귀순 214명 아군 전사 19명 전상 59명이었다.
한편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오작교 작전의 위대한 성공에 대하여 본인은 주월한국군 사령관 채명신 장군과 휘하 전 장병에게 만강의 치하를 보내며 아울러 무운 장구를 기원합니다."라는 치하 전문을 보냈다.
또한 미군사령관 웨스트 모얼랜드는 "나의 군대 생활중 가장 인상깊었던 것은 한국군의 오작교 작전이며 전략적인 방침과 장병들의 완전 무결한 전술적인 행동으로 상상할 수 없는 베트남전의 새로운 경지를 개척했다"라고 공식 석상에서 여러차례 연설을 했다.
참고로 현 중앙일보 상임고문 전응덕 원로 언론인은 웨스트 모얼랜드는 채명신을 매우 사려깊은 위대한 장군으로 보아왔고, 또한 채명신도 웨스트 모얼랜드를 감성적이고 탁월한 장군으로 존경했을 것이다.
이렇게 두사람의 관계가 매우 친숙했기 때문에 한국군의 모든 작전에 미군의 항공작전 지원과 군수물자 지원이 크게 있었을 것이라고 증언했다.
- 브라운 각서의 내용
우리국군의 월남전 참전에서 경제적 기여도는 매우 큰 것이었다. 그것이 바로 브라운 각서에도 명시되었다. 브라운 각서는 1966년 3월 4일부 주한미국대사 브라운이 대한민국 외무부장관 이동원에게 보내는 서한 형식의 약정서이다.
그 주요 골자는 한국군의 1개 전투사단 증파에 따른 대체사단의 추가 비용을 미국이 부담하며 거기에 대해 군사 및 경제적 이익을 제공한다고 기록했다. 브라운 각서의 항목 중에서 특히 제6항의 미국의 해외 판매에 있어서 한국에 보다 많은 특별한 참여 기회를 부여한다고 했다.
이 6항목에 의해 한국기업, 한국기술자, 근로자들의 월남 진출이 열렸으며, 휴대식량, 군복, 군화 등의 수출이 시작되었다. 한편 1965년 우리 기술자의 베트남 진출은 93명에서 다음 해에는 2만명을 넘었다.
이들이 본국으로 송금하는 액수는 한해 평균 1억2천만 달러에 달했다. 또한 파월 장병들의 전투 수당은 기술자들에 비하면 훨씬 적은 액수였는데, 대령이 195달러, 대위 150달러, 상사 75달러, 상병 30달러였다.
당시 필자는 군 현역으로 국군의 방송에서 파월장병 가족들의 육성을 월남으로 보내는 이란 프로그램을 제작했는데, 40여년이 지난 지금도 이때의 감동장면이 잊혀지지 않는다.
"판걸아 내 애미여, 아까는 울면서 말을 했더니 우리 군수님이 소주를 사가지고 와서 큰컵에 한잔씩 쭉 부어 주길래 나도 뿔떡 뿔떡 단숨에 다 마셔버려서 내평생에 군수님이 주는 술을 마시고 나니 죽어도 한이 없겠다.
우리 군수님 사무실에도 처음 와봤고 차비도 주고 또 운동화도 선물 받았다. 선상님 나 이제 할말 없는데유" "더 하십시오. 아드님 보낸 월급은 어떻게 하고 있는지 그리고 아드님 애인 있으면 애인 소식도 전하세요" "아참! 니 월급이 올때마다 아버지가 돼지를 계속 사 넣어서 큰놈만 60마리가 넘었다.
새끼들은 나도 숫자를 몰라 얼마나 많은지 그리고 그동안 저금한 돈과 큰돼지 몇십 마리를 팔아서 노샛꼴의 소작으로 붇치든 논 열마지기를 사서 니 명의로 등기를 한다고 하니 그렇게 알고 있어, 그리고 니 애인은 그렇게도 자주 오더니 요새는 발걸음 싹 끊었다.
그 인간이 지 얘비가 이번에 면장이 되니까 또 엉덩이 뿔이나서 바람이 난 모양이다야" 이때 옆에 앉은 파월 가족 할머니가 "아이구 이 여자여 전쟁터에 있는 자식에게 애인 바람난 얘기를 왜 하는거여" 그러자 이 어머님은 깜짝 놀라면서 "아이구 어쩌잠, 판걸아, 니가 귀국하면 논 열마지기에 돼지 사장이 되는 거여 그때는 색씨들이 줄을 설테니까 장가갈 걱정은 손톱만치도 하지마라......
월급으로 돼지를 사고 논을 구입하고 또 직업 군인의 경우 사글세 집에서 전셋집으로 전셋집에서 드디어 내집 마련을 했다는 등의 방송이 나가고나면 장병들의 송금 실적은 100%에 달할 때도 있다.
- 박정희의 정권연장을 반대했던 채명신
채명신은 백마 9호 작전을 끝으로 1969년 5월 제2군 사령부 사령관으로 부임한다.
당시 군관계 여론은 채명신은 참모총장 아니면 1군 사령관으로 부임할 것으로 예측했던 것이다. 한편 당시 대통령의 지방 순시에는 꼭 2군 사령관 채명신을 동행하게 했는데, 이때 채명신은 가끔 국정에 대한 직언을 하기도 했다.
1972년 대통령이 2군 사령부를 전용 열차편으로 방문한다는 청와대 연락을 받고 대구역으로 마중을 나갔다. 이날 대구역에는 구자춘 경북지사를 비롯한 지방 유지들과 대통령을 보기 위해 역광장이 매우 혼잡했다.
군중을 정리하기 위해 경북경찰국장 서재근 경무관이 군중 정리를 위해 진땀을 흘리고 있었다. 이때 경호실에서 나온 경호원 한사람이 경찰국장을 보고 반말로 호령을 내리는 것이었다.
그 광경을 본 채명신은 "어이 자네 이리와 경상북도 경찰국장 직위가 위냐 네 직위가 위냐? 네가 뭔데 경찰국장에게 반말로 이래라 저래라해!" 경호원은 고개를 숙이며 그 자리를 피해 갔다.
박정희가 대구에 오면 자주 들리는 식당에서 일행들과 식사를 하게 되었는데, 국회의장 이효상 등 고위 인사가 참석했다. 식사가 끝나자 참석 인사들이 다 나가고 대통령은 방옆 별실로 채명신을 불러 독대를 했다.
술상이 다시 들어와 박정희는 "오늘 한잔 합시다"하며 채명신에게 술잔을 권했다. 원래 술을 못하는 채명신은 술잔을 받아 놓고 마시는 시늉만 했다. 박정희는 술기가 오르자 채명신의 눈을 똑바로 보며 무거운 입을 열었다.
"채장군, 김대중에게 정권 맡겨서 앞으로 잘될까?" 뜻밖의 질문을 받은 채명신은 박정희의 의중을 대략 짐작하고 한참후 "각하 바뀌면 혼란이 오겠죠 경제가 지금처럼 잘 되겠습니까? 각하의 뜻은 100% 동감합니다.
그러나 각하께서 스스로 정권 연장하겠다는 말은 하지 마십시오. 3선 개헌때 대통령에 마지막 출마 한다며 눈물까지 흘리신 각하가 아닙니까? 모든 국민이 다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채장군 그래서 나도 고민이야" 채명신은 계속해서 박정희의 정권 연장의 부당성을 솔직하게 직언했다.
"그래 그래 그래서 고민이야" 고뇌에 찬 목소리로 고민을 되풀이 했다. 그로부터 두어달 후 또 대구의 그 식당에서 채명신을 불렀다.
"여보 채장군 아무리 생각해도 집권을 연장해야 겠어 욕을 먹더라도 내가 십자가를 메야겠어" "각하, 십자가란 말을 함부로 쓰지 마십시오" "응 그래 채장군은 기독교 신자지 그건 맞아" 그 말이 끝나자 박정희는 일어섰다. 작별 인사도 없이 헤어졌다. 1970년 여름의 어느날 경주 관광호텔에서 박정희가 직접 전화를 걸어왔다.
"각하 웬 일이십니까?" "나 경주에 왔어 지금 이곳으로 올 수 있나"....
채명신이 호텔방에 도착하자마자 박정희는 "채장군 오해하지마"하면서 시작한 말은 당시 중앙정보부장 김계원이 채명신의 비행이라면서 올린 보고서에서 서울 강남에 땅이 많고 스위스 은행에 비밀구좌 등 갖가지 비행을 조사했다는 것이다.
이 보고서를 본 박정희는 크게 충격을 받고 재 조사를 철저하게 해서 다시 보고를 하라고 지시했다. 재 조사결과 모두가 허위모략으로 밝혀졌다면서 박정희는 이 사실을 알리기 위해 채명신을 불렀다고 했다.
한편 채명신 자신도 여러 정보기관에서 자신을 감시하는 것을 알았고 2군 관할하에 있는 ROTC를 통해 학생을 선동한다는 것 또 채명신이 어떤 야먕을 가지고 뭔가를 노린다는 엉터리 소문 등등이 계속 나돌고 있었다.
이런 저런 정황으로 봐서 자신의 군대생활도 끝나가고 있음을 감지했다. 드디어 1972년 5월 30일 중장계급 정년이 되는 날인데 상부에서는 아무 소식이 없었다.
그날 오후 5시가 될 무렵 국방장관 유재흥의 전화 연락을 받고 헬기편으로 상경 국방장관실로 들어갔다. 유재흥은 매우 안타까운 표정으로 서랍에서 서류를 끄내어 채명신에게 주었는데 박정희의 친필이었다.
『채명신 중장 예비역 편입, 노재현 중장 대장 승진 임육군 참모총장 본인에게 통보는 5시 이후에 할 것. 1972년 5월 30일 대통령 박정희』
옛 고사(古史)에서도 왕은 개선장군을 오래두지 않는다고 했다. 바로 다음날 2군 사령부에서 거행된 전역식(轉役式)에는 연락 조차하지 않았는데, 미8군 사령관과 미1군단에서 까지 참석했다.
전역사를 마치고 사열차를 탈때에는 그도 인간인지라 슬픔이 복받쳤지만 꾹 참고 사열을 했다. 사열차가 기수단을 도는데 기수단의 장병들이 눈물을 흘리는 것이 보였다.
식을 마치고 정문까지 가는동안 도열한 장병들도 눈물을 흘리는 것을 보고 만감이 교차했다. 그가 탄 차가 고속도로 돌게이트에 들어서자 꾹 참았던 눈물이 주룩 흘렸다. 차창 넘어로 전개되는 먼 하늘을 보면서 채명신의 입에서 하나님! 하면서 기도가 터져나왔다.
6.25 전쟁과 베트남 전쟁 두 전쟁터에서 포연이 지축을 뒤흔들고 총탄이 빗발치는 그 생사의 교차로! 그 때마다 지휘관으로서 사명을 완수케 해준 하나님께 눈물의 감사 기도를 드렸다.
한편 전역한지 얼마후 박정희는 채명신을 멀리 스웨덴 대사로 보냈다.
그후 다시 그리스 대사 브라질 대사를 역임하는 동안 고국에는 계엄령과 더불어 유신시대로 들어갔고 다시 박정희 시해 사건을 듣게 된다.
지난날 대구 식당 별실에서 박정희의 집권연장을 반대했던 그날밤 박정희의 고뇌에 찬 그 모습이 자꾸 눈앞에 떠올라 며칠간 잠을 잘 수가 없었다.
10여년간 외교관 생활을 마치고 귀국한 후에도 그는 박정희가 사준 후암동 자택에서 살았다. 부인은 자꾸 아파트로 이사 가자고 날마다 졸랐지만 성냥갑 같은 곳에서는 살수 없다고 했다.
그래도 대통령이 하사한 집인데 어떻게 이 집을 팔고 가겠느냐고 30여년을 버티다 결국 아파트로 이사했다. 과거 주월사령관 시절 일시귀국때 채명신과 대담 녹화를 하기 위해 제작진이 자택을 찾아갔는데, 차가 들어갈 수 없는 골목길이어서 TV녹화 기자재를 메고 올라가는데 큰 고생을 했다.
이런 사실을 청와대 모 대변인이 박정희에게 보고하자 박정희는 깜짝 놀라 차가 들어가는 큰집을 한채 사주었던 것이다. 2009년 여름 퍽 오랜만에 필자를 만난 채명신은 "아파트가 이렇게 좋은 줄 몰랐소, 이 서재에서 저기, 저기좀 보세요, 한강도 내려다 보이잖아요" 하고 껄걸 웃었다.
서재에는 40여년전 중장 계급장에 지휘봉을 든 주월사령관 시절의 멋있는 사진이 걸려 있었다. 그때의 그 모습과 지금은 이미 할아버지가 된 (2009년 83세) 모습을 보니 인생 무상이 마치 흘러가는 구름처럼 생각되었다.
한편 채명신의 오늘이 있기 까지는 부인 문정인(권사)의 기도가 마치 다람쥐 채바퀴처럼 쉴새없이 달려왔다. 문정인은 이화여대 제1회 메이퀸으로 지성미를 겸비한 훌륭한 신앙의 여인이다.
한편 채명신은 월남에서 귀국할 때부터 여의도 순복음교회 협동장로로 적(籍)을 두고 있다. 끝으로 채명신은 월남 전선에서 산화한 옛 전우들과 아직도 고엽제로 고통 받는 전우들을 위해서 교회 갈때마다 그들을 위해 하나님께 간절한 기도를 하고 있다.
글 : 김수호 (안드레명상 발행인 주님의 교회 협동장로)
(이글은 www.worldnews.or.kr, 또는 www.월드뉴스.kr의 칼럼연재 내 김수호 코너에서 볼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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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박 대통령의 어머니 채태원 집사의 위대한 신앙의 열매
본 내용을 저자의 동의없이 무단으로 전제 또는 복재, 살포시는 법의 저촉을받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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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태원 집사는 경북 대구 근교 반야월이란 곳에서 신실한 기독교 집안에서 성장했지만 유교정신을 철저하게 지키는 경북 영일군 흥해면의 이충우씨에게 시집을 왔다. 시집살이에서도 채태원은 끝까지 기독교 신앙을 지킴으로 집안 식구들은 물론 주위 친척들의 따가운 눈총을 받아야 했다.
농토도 없는 이들 부부는 일본으로 건너가 돈을 벌다가 해방을 맞이해서 귀국 도중 연락선이 침몰하는 바람에 가져오던 재산이 바다에 수장되어 버렸다. 빈털터리로 남편의 고향으로 돌아와 근근히 생활의 안정을 찾아갈 때 민족의 비극 6.25전쟁이 일어났다.
포항 시가지는 폭격으로 불바다가 되었고 이들은 산기슭에 곧 쓰러져 가는 빈 절간방을 하나 얻어 일곱 식구가 지냈다. 어머니 채태원 집사의 행상은 바로 이때부터 시작된 것이다.
당시 포항 사람들은 다 기억하겠지만 폐허가 되어버린 포항 시내에 유일하게 포항 제일교회만이 그대로 서 있었다. 아이들을 데리고 교회를 갈 때, 이곳 포항 제일교회는 채태원 집사가 마치 친정을 가는 기분이었다.
채태원 집사의 하루일과는 항상 새벽 4시에 아이들을 깨워 기도를 시킨 후 자신은 다시 교회로 달려가 새벽 예배에 참석한다.
둘째 아들 이상득은 소년 시절부터 형제중에서 가장 신앙생활을 잘 해서 교회에서는 그를 학생회장까지 맡겼다. 이상득은 고교를 졸업 후 사관학교에 들어갔으나 다리 관절염으로 자퇴를 하고 집에서 침술로 치료를 받으며 대학입시 공부를 했다.
그래서 어머니 채태원 집사의 행상에는 셋째 아들 이명박이를 데리고 다녔다.
특히 이명박의 하루 일과중 가장 중요한 것은 매일 술도가에 가서 술찌끼를 얻어 오는 일이다. 이명박은 이 술찌끼를 얻어 오면서 수시로 집어 먹어서 술찌끼 속에 소량의 술기운 때문에 그의 얼굴은 항상 홍조를 띠었다.
그가 훗날 장년이 되어 건설업계 특유의 술좌석에서 남들은 다 만취가 되어 뻗어 버려도 그는 이성을 잃는 일이 없었다. 그것이 바로 어린시절부터 술찌끼를 많이 먹어 술에 대한 저항력과 정신력이 단련되어 왔기 때문이라고 했다.
참고로 이명박의 초등학교 시절 어머니와 함께 했던 행상의 종류는 당시 성냥 대신으로 사용했던 나무에 황을 붙여서 사용하는 황성냥 장사 김밥장사, 아이스케키장사, 나무장사 등이었다.
추운 겨울 행상길을 가다가 따뜻한 양지가 있으면 어머니 채태원 집사는 좀 쉬어 가자면서 짐을 내려놓고 성경을 읽는다.
감동적인 장면이 나오면 미소를 짓는데 이것은 이명박에게 성경이 얼마나 재미있는 책이란 것을 은연중 알리기 위한 작전이었다. 고된 행상을 마치고 돌아오면 이들을 반갑게 맞이하는 것은 둘째 아들 이상득이다. 이상득은 관절염으로 아픈 다리를 무릅쓰고 어머니의 일을 돕기 위해 달 동네의 비탈길에 물지게로 미리 물통을 가득 채워 놓고 비록 술찌끼 죽이지만 전 가족들이 함께 먹을 수 있는 저녁 준비까지 해놓고 있다.
이상득은 하루종일 책상에서 일어나지 않고 공부만 하기 위해 자신의 발목을 아예 책상다리에다 줄로 매어 놓고 책을 본다. 이상득이 서울대학교에 입학하면서부터 어머니 채태원 집사의 행상은 더욱 바빠진다. 특히 등록금 낼 때가 가까워 오면 채태원 집사는 안절부절한다. 그래서 행상으로서는 생계비와 등록금을 모을 수가 없어 풀빵을 구워 팔기로 했다.
이상득은 하루종일 책상에서 일어나지 않고 공부만 하기 위해 자신의 발목을 아예 책상다리에다 줄로 매어 놓고 책을 본다. 이상득이 서울대학교 입학하면서부터 어머니 채태원 집사의 행상은 더욱 바빠진다. 특히 등록금 낼 때가 가까워 오면 채태원 집사는 안절부절한다. 그래서 행상으로서는 생계비와 등록금을 모을 수가 없어 풀빵을 구워 팔기로 했다.
어느덧 이명박이 중학교를 졸업하고 포항 동지상고 야간부에 응시, 수석 합격이 되어 장학생이 되었다. 입학금 때문에 수심에 잠겼던 어머니 채태원은 이것은 오직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라고 하면서 계속 감사 기도만 했다.
한편 서울대학에 입학한 이상득은 당시 한국은행 총재 집에 가정교사로 들어가 좋은 집에 좋은 음식을 먹고 대학에 다니고 있으니 이 모든 것이 다 어머니의 기도로 하나님께서 보살펴 준 증거라고 했다. 이때부터 채태원 집사의 얼굴에 모처럼 미소가 흘렀고 특히 매일 먹는 주식도 술찌끼에서 강냉이 가루죽으로 격상되었다.
--고등학생이 된 아들에게 장사를 시킨 어머니 채태원 집사
어느 겨울 날, 채태원 집사는 어디서 뻥튀기 기계를 빌려와서 이명박에게 실습을 시켰다. 실습이 끝나자 “너와 한자리에서 장사를 하니 수입이 신통찮으니 너는 이 뻥튀기 기계를 가지고 너 혼자 장사를 해보라”고 하면서 이명박을 데리고 간 곳은 포항 여고 골목길이었다.
여학생들이 옥수수와 쌀튀긴 것을 잘 사먹을 것이라는 어머니의 계산 때문이었다. 예상대로 장사는 잘 되었다. 단 한가지 문제가 있다면 지나가는 여고생들이 너무 쳐다봐 직업에 대한 창피감이 생겼다. 그래서 이명박은 겨울이지만 밀집 모자를 하나 구해 얼굴이 안 보이게 깊숙이 쓰고서 장사를 했다.
그러면 어머니는 “사내 자식이 뭐가 창피하냐”며 핀잔을 준다. 하루 종일 숯불 연기와 뻥튀기에 그을린 얼굴을 세수도 못한 채 학교로 향하는 이명박의 주경야독은 그의 인생 역정에 중요한 대목의 하나가 되었다.
한편 어머니 채태원 집사가 이명박에게 심어준 또하나의 가정교육은 기독교 신앙생활의 중요한 봉사정신이었다. 채태원 집사는 이웃집에 잔칫날이 다가오거나 또는 부잣집의 회갑잔치가 있을 때는 그 전날 이명박을 그 집으로 보내 일을 도와주게 한다.
이 지시를 처음받던 날, 이명박은 어머니께서 나를 잔칫집에 보내 잔심부름이나 해주고 떡이나 좀 얻어먹으라는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어머니는 이명박에게 철저하게 다짐을 받는다. “열심히 일을 해주되 돌아올 때는 물 한 모금도 얻어먹지 말고 와야지, 만일 떡고물이라도 얻어 먹었다 간 너는 집에 못 들어오는 줄알아라”......
아무 대답없이 어머니를 원망하며 집을 나서는 이명박을 향해 “알았지!”하고 또한번 다짐을 받는다.
강냉이죽 한 그릇 먹고 남의 집일까지 무료로 해준다는 것이 이명박에게는 매우 불만스러웠다. 그러나 이명박의 깨끗한 무료봉사가 동네에 알려지자 특히 부잣집 사람들이 채태원 집사를 붙잡고 “세상에 자식을 어떻게 교육을 시켰길래 그런 착한 일을 하느냐”고 깜짝 놀랐다.
그 때마다 채태원 집사는 “나는 돈도 없고 무식해서 자식 교육시킬 만한 처지가 못되는데 아마 하나님께서 그 아이를 교육시키고 있는 모양입니다”라고 대답한다.
한편 채태원 집사는 이명박의 뻥튀기 장사를 겨울이 지나면서 그만두게 하고 이번에는 과일 장사를 시켰다. 야간학교 수업이 끝나면 손수레에 각종 과일을 싣고 영화관의 마지막 상영이 끝나는 시간에 맞추어 극장 앞에서 장사를 한다.
그러던 어느 여름밤 극장 마당에서 자가용차에 과일 담은 손수레가 받치면서 과일이 전부 땅에 떨어져 버렸다. 그러나 자가용 운전자는 오히려 이명박에게 왜 이곳에서 장사를 하느냐고 윽박지르며 호통을 쳤다. 이명박은 엉겁결에 자신이 잘못한 줄 알고 사과를 했다. 자가용차는 훌쩍 가 버렸다. 땅에 떨어져 깨어진 과일을 보자 뒤늦게 억울한 생각에 화가 치밀어 오르면서 건너편 포장마차 집으로 달려가 소주한병을 달라고 고함을 쳤다.
“이놈의 과일장사 집어치우고 오늘밤 당장 가출해 버리겠다” 이명박의 근면 성실성을 평소부터 잘 알고 있던 포장마차의 아주머니는 끝까지 소주를 주지 않고 이명박을 달래며 위로했다.
마음이 진정된 이명박은 어머니 생각이 갑자기 나면서 가출을 하더라도 어머님께 인사나 하고 떠나자, 그리고 어머님이 평소 과일을 좋아했는데도 과일 한번 대접 못한 것이 마음이 아팠다. 그래서 이명박은 남은 과일을 어머님이나 실컷 잡수시게 하기 위해 흩어진 과일을 다 주었다.
기가 죽어 들어오는 아들의 얼굴과 깨진 과일을 본 어머니 채태원 집사는 아무말 없이 이불을 꺼내어 덮고 누워 버렸다. 평소 나약한 모습을 자식들에게 보이지 않던 채태원 집사는 이날만은 갑자기 흐르는 눈물을 감출 수가 없었던 모양이다.
한편 이명박은 이 밤이 어머니와의 마지막 밤이란 것을 생각하니 잠이 오지 않아 결국 뜬눈으로 새벽 네시 기도 시간을 맞았다. 변함없는 어머니의 기도가 시작되었다. 항상 먼저 나라와 사회 안정을 위한 첫번째 기도에 이어 그 다음 서울에 가 있는 두 아들을 위한 기도,그리고 큰딸 기선이, 이어 이명박과 막내딸 귀분이 순서로 진행되었다.
그런데 이날 어머니의 기도에 일대 혁명이 일어났다. 즉 과거에는 항상 길게 해주던 형님의 기도는 아주 짧아지고 이명박을 위한 기도가 길어졌을 뿐만 아니라 그 내용이 너무나 간절한 기도였다. 모처럼 자신을 위한 기도가 길어진 것에 감동을 받은 이명박은 결국 이날 아침, 서울행 가출 계획은 아침 안개처럼 사라지고 다시 과일장사로 되돌아갔다.
이명박이 고등학교 3학년 때 어머니 채태원은 포항에서 하는 장사로는 서울의 아들 학비와 가족의 생계가 도저히 해결될 수 없음을 알고 이명박에게 막내딸 귀분이를 중학교 졸업을 시키게 책임을 지우고 서울로 갔다.
한달 양식으로 보내주는 보리쌀은 죽을 멀겋게 끓여 먹어야만 겨우 한달을 살 수 있었다. 몇 달간을 그렇게 먹고 나자 두 형제의 얼굴에는 영양실조의 모습이 역력히 나타났는데 어느날 여동생 귀분이가 “10일은 굶더라도 20일은 죽을 좀 되게 끓여 먹자”고 간청을 했다.
식량부족의 불안에다 여동생의 심상치 않은 말에 위기감을 느낀 이명박은 즉시 작은 봉투 30장을 구해 보리쌀을 배분해서 넣고 어떤 일이 있어도 하루 한 봉지만 먹는다는 규칙을 여동생에게 강조했다. 뻥튀기와 과일 장사 등 3년간의 장사로 동지상고 야간부 3년을 수석 졸업한 이명박은 서울의 부모님 곁으로 갔다.
어머니는 서울 이태원시장 노점에서 채소장사를 하면서 역시 부엌도 없는 판자촌에 방 한칸을 얻어 전 가족이 살고 있었다. 이명박은 이 방에서 함께 살 수 없어 건설현장의 날품팔이를 하면서 노동자 합숙소와 고향 친구들의 자취방을 전전하면서 대학입시 공부에 전념했다. 대학을 다닐 수 없는 처지는 익히 알고 있었다. 그러나 합격만 해 놓으면 그것이 대학 중퇴란 말로 이력서에 들어가는 줄 잘못 알았다.
어렵게 입시 책을 구해 열심히 공부를 하면서 낮에는 일거리를 찾아 다녔다. 한 번은 시험공부 도중 졸도를하여 이웃 할머니의 도움으로 살아나기도 했다. 한편 고향 친구 재수생을 따라 갔다가 함께 산 입시원서가 고려대학교 상대 경영학과 원서였다. 경영학과가 무슨 과인 줄도 모르고 산 원서였다. 시험 결과 재수생 친구는 낙방하고 이명박은 합격이 되었다.
이태원 시장 노점 바닥에서 채소를 팔다가 아들의 대학 합격증을 받아 본 어머니 채태원 집사의 얼굴에는 수심이 가득 찼다. 노점 채소장사의 아들이 고려대학교에 합격이 되었다는 소문이 이태원 시장 안에 퍼졌다.
-공중 화장실과 쓰레기 청소로 대학생이 된 이명박
이 모자의 딱한 형편을 알게 된 시장 상인들은 이명박에게 등록금을 선불로 주면서 대신 시장 청소를 하게 했다. 어머니 채태원 집사는 하나님의 오묘한 역사 앞에 연신 기도만 했다. 이때부터 채태원 집사의 새벽 네시 가족 기도는 더 뜨겁게 진행되었다. 새벽 기도가 끝나면 이명박은 다시 이태원의 반석교회로 달려가 이곳에서 다시 기도를 드리고 시장으로 달린다.
먼저 공중 화장실 청소를 하고 다음은 쓰레기를 치우는데 쓰레기를 가득 담은 손수레로 6번을 언덕길을 올라간다. 누군가 밀어주는 사람도 없는데 그 무거운 수레가 힘들지 않고 올라갈 때마다 이명박은 느낌이 있었다. 먼동이 트면서 시장 청소가 끝나면 학교로 간다.
이명박은 대학 2학년까지 시장청소로 학비를 조달해 가면서 그야말로 청운의 푸른 꿈을 키워 나간다. 또한 이때 이 집안의 큰 경사가 겹쳤다. 둘째 아들 이상득이 코오롱에 입사하게 되었으며, 또한 어머니 채태원 집사가 드디어 시장 안에 조그만 노점 자리를 얻게 된 것이다.
사실 이 노점자리가 확보되기까지 채태원 집사의 하루하루 그 초조한 마음은 형언할 수가 없었다. 그것은 남의 생선가게 좌판 바로 옆에서 장사를 하기 때문에 어느날 갑자기 가게의 주인이 고함을 지르면 즉시 쫓겨나야 된다는 사실을 잘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채 집사가 항상 의지할 곳은 오직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 이외에는 아무런 방도가 없었다.
어느날 기도를 하는 중에 지혜가 떠올랐다. 그것은 바로 생선가게 좌판의 청소를 해주기로 했다. 특히 나무판자로된 생선좌판대는 항상 비린내가 진동하는 곳이다. 채태원 집사는 생선가게 상인들이 장사를 마치고 난후 나무좌판대를 물로써 깨끗이 청소를 해주기 시작했다.
자신의 노점 장사는 저녁때면 끝나지만 생선가게는 저녁 늦게까지 장사를 하기 때문에 그 청소를 해주기 위해서는 그때까지 기다려야 된다. 며칠째 어머니의 귀가 시간이 늦어지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한 이명박은 시장으로 달려가서 물청소를 하는 현장을 보고서야 그 이유를 알았다.
채태원 집사의 이러 저러한 여러 가지 어려운 처지를 알게된 시장 상인들은 앞서 언급된 이명박을 청소부로 채용하여 대학등록금을 선불로 주게 되었고 다시 시장 측과 상인들의 호의로 한평 남짓한 좌판 자리를 얻게 된 것이다.
해방이후 그 수많은 세월 행상 생활에 호각소리만 나면 광주리를 안고 이리뛰고 저리숨고 했던 지난날 채 집사의 고달픈 생활을 지켜보고 왔던 남편 이충우씨도 이날부터 얼굴에 화색이 돌기 시작했다.
노점 행상이 끝나고 자신의 좌판자리가 생긴 그 날은 채태원 집사 생애에 그야말로 잊을 수 없는 가정의 경축일이었다. 찾아오는 손님들마다 축하의 인사를 하면 채 집사의 답변은 항상 정해져 있다.
“나는 무식해서 돈도 없고 다 하나님의 덕분입니다”....
한편 이명박은 대학 2학년 1학기 때 일찍 군복무를 마치기 위해 자원입대를 했다가 영양실조로 인한 질병으로 신체 검사에 불합격이 되어 군대를 못가게 되었다. 이명박이 고려대 3학년 때 친구들의 비웃음을 무릅쓰고 상과대학 학생회장에 출마하여 당선이 되었다.
1964년 4학년이 되면서 한·일 국교 굴욕 외교 반대와 군사정권 타도를 외치는 대학가의 데모가 서서히 일어날 때 이명박은 고려대 총학생회장 직무 대행으로 고려대 데모의 선봉장으로 6.3시위에 앞장선다. 그러나 계엄령이 선포되면서 그는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되었다.
어머니 채태원 집사는 이 소식을 처음 듣는 순간 쓰러지고 말았다. 그렇게 착한 아들이 형무소에 들어갔다면 이것은 필경 나라의 대역죄로 다시는 살아올 수는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64년 9월 서대문 형무소에 면회를 갔던 채태원 집사는 이명박을 똑바로 응시하고 나서
“명박아! 너 새벽기도 꼭하고 있나! 그리고 성경도 꼭 보고 있나! 그리고 나는 네가 별볼일 없는 자식인 줄 알았는데 그런데 이번 사태를 자세히 알고 보니 너야말로 대단한 놈이구나! 나는 네 소신이 옳다고 생각한다. 네 소신껏 행동하기 바란다”..... 이 말 한마디를 남기고 채태원 집사는 일어났다.
입회인이 면회시간이 아직 많이 남았다고 더 말씀하라고 했지만 채태원 집사는 다시 한번 “새벽기도와 성경 똑똑히 읽어라”이 말만 남기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나왔다.
형무소 뜰을 걷고 있는 채태원 집사의 입은 무엇인가 계속 중얼거리고 있을 뿐이다. 채태원 집사는 자신이 평소 앓고 있는 심장병이 서서히 악화되고 있다는 징조를 알게 되면서, 어느 날 이웃에서 녹음기를 빌려와 유언을 남긴다.
- 유언을 하기 전 먼저 찬송가 431장을 불렀다.
내주여 뜻대로 행하시 옵소서
온몸과 영혼을 다 주게 드리니
이 세상 고락간 주 인도 하시고
날 주관 하셔서 뜻대로 하소서
찬송이 끝나자 그의 유언은 평소 항상 하는 말 그대로였다. “하나님을 잘 섬기라, 하나님 뜻대로 살아가라”..... 그리고 이명박에게는 “명박이 너는 앞으로 큰 일을 할 것이니 그러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잘 섬겨라. 그리고 교회에 헌신적으로 봉사하라”.....
어머니 채태원 집사는 이명박이 6개월의 형기를 마치고 출소한 지 한달 만인 1964년 12월 15일 소천했다. 둘째 아들 이상득이 조그만 주택 하나를 막 계약한 직후였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행상과 노점생할로 열심히 노력했으나 내집 마련은 도저히 힘들었던 채태원 집사!
그 부모님의 평생의 한을 풀어 드리려고 둘째 아들 이상득이 마련했던 주택! 온 가족 다 모여 오손도손 행복하게 살아보자고 했던 그 소망이 실현되었을 때에 채태원 집사는 하나님 곁으로 갔다. 어머니가 떠나간 후 새집으로 이사 가던 날 가족들은 기쁨의 감격은 없고 어머니 생각으로 눈물만 흘리고 있었다.
부엌없는 단칸방만 찾아 다녔고 화장대, 장롱하나 갖지 못했던 어머니의 희생의 세월! 어머니도 분명 똑같은 여성이었는데 어찌 그것을 갖고 싶은 욕망이 없었겠는가! 가족들은 부둥켜안고 한 없이 울었다. 퇴계원 공동묘지에 어머니를 묻고 오던 날 그 흔한 십자가 하나 구할 수 없어 자식들은 소나무를 꺾어 십자가를 만들어 꽂았다..
채태원 집사의 막내딸 이윤진이 (귀분이) 선교사가 된 사연
큰딸 이기선은 구룡포읍 제일교회에서 권사가 되었고 막내딸 이윤진은 경희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하고 서울 잠실에 있는 성현교회를 다니며 20여년간 신앙생활을 했다.
교회에서 여전도회장까지 했으나 세상이 주는 명예직(모 여성단체 회장)에 유혹되면서 신앙이 흔들리기 시작했고, 뒤이어 남편의 사업 실패와 더불어 심신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뒤따라 두번의 자궁암 수술, 그리고 35세때 악성 관절염으로 치료 불능 판정으로 10년간 대소변을 받아 내었고 43세 때는 치아가 몽땅 빠져 버렸으며 이때부터 산송장 취급을 당하는 비운의 여성이 되었다.
10년간의 진통제 복용으로 기억력 상실 증세가 나타나는 등 갖가지 부작용이 뒤따라 그야말로 죽을 날만 기다렸다. 그러나 그에게 마지막 소망의 기회가 왔다.
어느날 서울 잠실동에 있는 성현교회 부흥회에 가고 싶었다. 지난날 그가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던 교회다. 설교가 끝나고 합심기도(통성기도) 순서가 되었다. 이윤진도 비록 모기 같은 음성이지만 있는 힘을 다해 하나님을 간절히 애타게 불렀다.
잠시 후 그의 몸이 진동하기 시작하면서 입에서 방언 기도가 터져 나왔다. 이윤진을 들것에 싣고 왔던 남편 김진은 부인이 최후의 힘을 다해 부르짖는 통성기도의 처절한 모습을 보고 한숨을 쉬면서 “이제 당신은 정신 이상까지 겹쳐 드디어 미쳐 가는구나. 이 발광이 끝나면 당신은 지쳐서 죽겠구나”.....하면서 눈물을 흘렸다.
부흥회가 끝나자 부인을 들것에 옮기려고 할 때 부인은 또렷한 음성으로 혼자 걸어가겠으니 조금 부축만 해 달라고 했다. 그리고 남편에게 무릎을 봐 달라고 했다. 이때 두 무릎의 피부 색깔이 가지색으로 변해 있었다.
이윤진은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치료의 광선이 오늘밤 내 다리의 관절염까지 고쳐 주었다는 것을 확신했다. 자리에서 일어나 15년만에 걸어 보는 밤길, 예전에 몰랐던 영롱한 밤하늘의 별들이 아름답게 빛나고 있었다.
이 꿈같은 하나님의 기적을 체험한 이윤진은 이 사실을 널리 전파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으로 알고 46세 나이로 신학을 공부하여 전도사가 되었다.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성경 신명기 6:4~9)”
이윤진 전도사가 하나님의 기적을 체험한 후 가장 귀하게 읽는 성경 구절이다.
참고로 이 신명기 6장 4절에서 9절까지를 유태인들은 자손 대대로 가르치는 신앙교육의 핵심의 장으로 삼는다. 이 신앙교육을 통해서 그들은 수천년 동안 전 세계 뿔뿔이 흩어져 온갖 멸시 천대를 받았던 민족을 하나로 만들었다.
그리고 전세계 인구 0.3%밖에 안되는 이 민족이 노벨상의 26%를 차지했고 불과 3백만의 인구로 중동 국가 1억 인구를 제압하고 있다. 세계 최강 미국의 정계와 금융, 언론 등이 이 소수 민족의 손에서 좌지우지되고 있으며, 세계 지도에 보이지도 않을 정도의 이 작은 나라의 안보에 이상 징후가 있을 때마다 미국이 자기 나라 일처럼 나서는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
그것은 바로 이 민족이 하나님의 성민(聖民)이요 이 민족을 섣불리 대한 나라마다 패망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스라엘 민족은 이 신명기 6장 4절에서 9절까지를 아이가 말을 할 때부터 강제로 외우게 한다.
다시 이윤진 전도사의 이야기를 계속하면 지난날 산송장이라고 했던 그에게 의학적으로는 단 1%의 회생 가능성이 없다는 판정을 받았다. 그런데 그가 신학을 공부할 때 자주 느낀 것이 하나 있다고 했다.
즉 그 무서운 병마의 고통에서 자신을 다시 일으켜 세운 것은 하나님이 나를 불쌍히 여겨서가 아니라 평생을 자식을 위한 일편단심 어머니의 기도를 하나님께서 응답해 주셨기 때문이라고 했다.
어머니는 행상, 노점상을 할 때마다 광주리에는 언제나 성경이 있었고 손님이 없을 때는 즉시 성경을 꺼내어 읽었다고 했다. 그래서 물건을 사러 온 손님들이 “아주머니는 장사는 안하고 맨날 책만 보네 그 나이에 공부해서 국회의원이 될꺼요, 대통령이 될꺼요” 하고 핀잔을 받았다고 한다.
한편 이윤진 전도사는 신학을 마친후 주위 친지들의 만류와 세상사의 즐거움을 뿌리치고 힘든 선교사의 길을 택했다.그날밤 그 부흥회때 제발 한 번만 살려 달라고 울며불며 절규의 통성기도를 할 때 마치 전류처럼 스쳐간 그 순간! 생명의 은인 그 하나님을 감히 모른다고 배반할 수가 없었다.
그날의 그 기적의 체험을 증거하기 위해 이윤진 선교사는 오늘도 해외 우리 동포들을 찾아 기독교는 바로 체험의 종교라고 기독교를 증거하고 있다.
한편 채태원 집사가 소천한지 30여년의 세월이 흘러갔다. 큰아들 이상은은 기업가로 둘째아들 이상득은 국회의원으로 셋째 이명박은 대통령이 되었다. 특히 두 아들은 같은 날 같이 장로가 되었다.
만일 지금 채태원 집사가 생존해 있다면 주위 사람들이 “어떻게 해서 대통령의 어머니가 되었느냐”고 묻는다면 그의 답변은 역시 행상 시절의 답변 그대로일 것이다. “나는 돈도 없고 무식해서 자식 교육시킬 형편이 못되었는데 다 하나님의 덕분이죠”...... 좋은 일은 항상 하나님께 돌렸다.
이명박 장로가 대통령에 당선된 후 대규모 집회에서 “나는 지금까지 이 세상을 살아오면서 어려운 일도 많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때마다 힘든 고비를 잘 넘길 수 있었던 것은 지난날 우리 어머님의 간절한 기도를 하나님이 응답해 주셨기 때문입니다”라고 했다.
이명박 장로가 대통령 당선이 확정된 다음날 국내 모든 언론은 그가 자란 고향 마을의 친지 소개, 그리고 뻥튀기 이야기, 기타 현대건설 시절 이야기 등은 보도가 자세히 되었다. 그러나 자식들을 신앙으로 훌륭하게 성장시킨 어머니 채태원 집사의 파란만장한 생애 그 위대한 신앙교육은 단 한줄도 보도가 안되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이 말은 어머니 채태원 집사가 자식들에게 자주 인용한 성경귀절이다.즉 자식들을 위한 어머니로서 자신이 가야 할 희생정신을 미리 예고해 준 것이다.
글 : 김수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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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뉴스
2009-0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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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데렐라가된 토론토 한국 할머니
전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단풍을 소개하라면 카나다의 총독관저옆에 있는 큰 정원을 추천할 수 있다.
10월말부터 시작되는 카나다 단풍축제는 세계 각국의 관광객들을 불러 모운다. 필자가 카나다 방문중 가장 아름다운 기억으로 남는 것은 단풍보다 더 아름다운 토론토의 신데렐라가된 한국 할머니 이야기다.
토론토는 인구 450만의 카나다의 최대 도시다. 이곳 토론토에도 한국 동포들이 상권을 형성하고 있는 한인타운이 있다. 주로 단층과 2층 건물이며 한글로된 간판들을 보고 있으면 마치 우리나라 지방 소 도시를 지나가는 기분이다.
비록 작은 점포들이지만 그 정도의 점포를 마련하기 까지 그들이 살아온 그 힘들었던 이민 역사가 얼마나 고된 삶이 였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곳 한인타운 근처에는 크리스트라는 작은 공원이 하나 있다.이 크리스트 공원이 바로 한국에서 이곳으로 온 한 할머니의 아름다운 사랑의 보금자리를 만들어준 공원이다.
할머니가 카나다로 오게된 것은 손자를 돌보기 위해서였다. 즉 아들 내외가 카나다에 이민와서 자신들의 집과 점포를 마련하기 까지 이들은 그야말로 죽기살기로 열심히 일을 하여 주택과 점포도 가지게 되었다.
그들은 지난날 돈을 모우기 위해 결혼한지 10년이 넘도록 아이를 갖지 않았다. 즉, 아이가 생기면 장사에 지장이 있기 때문에 일부러 임신을 피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어느덧 부인의 나이가 40이 되었을 때 임신을 하여 아들을 낳았다.
그러나 부인이 아이를 키우는 동안 남편 혼자서 장사를 하다보니 치열한 상권 경쟁에서 서서히 밀려나면서 그동안 저축한 통장의 잔고도 없어졌다. 이들 부부에게는 이 아이를 정성껏 보살펴줄 단 한사람의 일가친척도 없었다.
결국 이들은 한국에서 혼자 쓸쓸히 여생을 보내고 있는 어머니를 모셔왔다. 70을 바라보는 나이에 금쪽같은 손자를 안아보는 할머니는 하루하루 일과가 너무나 즐겁고 재미가 있었다. 아들 내외가 새벽일찍 출근하면 할머니는 도시락을 싸서 유모차에 손자를 태우고 집 근처에 있는 크리스트 공원으로 간다.
항상 정해진 벤치에서 손자의 재롱을 보다가 점심때가 되면 도시락을 꺼내 손자와 함께 맛있는 김밥을 먹는다. 그런데 할머니가 앉은 바로 맞은편 벤치에는 항상 꾀재재한 토론토의 한 노인이 앉아있다.
할머니가 보기에는 입고 있는 옷도 남루해 보이고 얼굴도 항상 수심에 차 있어서 할머니는 도시락으로 가져온 김밥을 아예 반을 꾀재재 노인에게 주어 버린다.
노인은 하루, 이틀 매일같이 할머니가 주는 김밥 맛에 푹빠져 할머니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하지만 할머니는 영어라고는 OK라는 한마디밖에 못한다. 그래서 할머니는 꾀재재 노인이 말을 건넬 때마다 무조건 OK라는 말만 계속한다.
그리고 할머니는 매일같이 이 노인을 만날 때마다 첫 인사는 “꾀재재 영감 안녕하시오”하고 아예 꾀재재 영감이라고 부른다. 한편 할머니는 이 꾀재재 영감이 어디에도 의지할 곳 하나없는 불쌍한 처지의 노인으로 생각하고 항상 측은하게 여겨 동정이 갔다.
그래서 이때부터 도시락도 두개를 만들어 와서 한 개를 이 노인에게 주면서 “꾀재재 영감! 젊을 때 돈이나 좀 모아놓지 늙어서 이렇게 쓸쓸하게 사느냐! 마누라도, 자식도 없느냐!”하고 위로의 말을 해주지만 이 노인은 한국말을 한마디도 알아 듣지 못하고 그저 고개만 끄덕인다.
-동정에서 우정으로 그리고 우정에서 사랑으로-
시간이 갈수록 두 노인은 친한 친구가 되어 갔다. 비록 서로가 상대방의 하는 말은 안통했지만 두 사람이 온갖 손짓 발짓 다하다보면 결국 서로의 마음을 알 수 있는 즉 말없는 대화가 이루어진다.
특히 이 꾀재재 노인이 할머니에게 깊은 관심을 가지게된 이유는 손자를 즐겁게 돌보는 그 아름다운 심성과 그리고 자신을 측은하게 여겨 매일같이 김밥을 만들어 오는 아름다운 심성에 깊은 감동을 받은 것이다.
또한 불쌍한 처지의 사람에게 온정을 베풀 줄 아는 한국 할머니의 그 아름다운 마음씨에 큰 호감을 받은 것이다. 한편 할머니는 매일같이 하는 손짓 발짓 대화에서 이 꾀재재 영감이 부인과 사별후 독신으로 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또한 이 꾀재재 노인도 할머니가 역시 독신으로 살고 있다는 것을 알게되어 결국 두 노인은 서로의 처지를 이해하며 더욱더 친한 친구가 되었다.
꾀재재 노인이 기분이 매우 좋은날은 할머니에게 가끔 노래도 불러주지만 OK라는 말밖에 못하는 할머니는 그 노래가 도대체 무슨 노래인지 알아 들을 수 없다고 손을 흔들며 연신 OK OK만 한다.
할머니도 이에 질세라 할머니가 좋아하는 노래 즉 아들이 평소 어머니가 꼭 배울 찬송가라며 찬송가 테입을 어머니께 드렸다. 할머니는 시간 날때마다 이 테입을 틀어놓고 배우는데, 그 가사를 도무지 외울수가 없다. 그러나 뒤의 후렴가사와 곡은 완전히 외우고 있었다.
이 찬송을 듣던 노인이 고개를 끄덕이며 영어로 함께 따라 부르니까 할머니는 “아니 꾀재재 영감이 내 노래를 어떻게 알고 따라 부르시오”하고 반겨했다.
한편 이 노인은 할머니가 찬송을 부르는 것을 보고 교회에 나간다는 것을 뒤늦게 알고 난후 전보다 더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사실 할머니는 토론토에 와서 주일날은 꼭 아들 내외를 따라 교회에 나간다.
예수님이 누구인지도 모르지만 오직 교회에 나가야만 우리 동포들을 만날 수 있고 또 그들과 친구가 되기 위해서는 찬송도 꼭 배워야 된다는 것을 알았다. 한편 할머니가 꾀재재 영감을 만난지 몇 개월이 지난 어느날 할머니는 꾀재재 영감으로부터 평소와 좀 다른 이상한 손짓 발짓을 보게 된다.
그 손짓 발짓을 자세히 관찰해보니 자기와 결혼을 하자는 즉 청혼을 하는 것이었다. 깜짝 놀란 할머니는 담박에 이 노인을 째려보며 “ 이 꾀재재 영감! 우리가 지금 나이가 얼만데 남세스럽게 결혼을 하자는 거냐! 말 친구가 되어 주었는데 그동안 엉큼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느냐!”하고 버럭 화를 내고 유모차를 획돌려 벤치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꾀재재 영감은 할머니의 옷 소매를 붙잡고 눈물을 글성거리면서 사랑의 고백과 애원을 했다. 그러나 할머니는 그 애원이 도대체 무슨 말인지를 알아들을 수가 없으니 계속 남세스럽다면서 “이놈의 영감이 그동안 나의 동정심을 이렇게 배신할 수 있느냐!”하면서 다시는 안본다면 발길을 획돌렸다.
그리고 할머니가 유일하게 할줄아는 영어 한마디 OK! OK!하고 고함을 지르고 뒤도 안돌아보고 집으로 왔다. 그러나 꾀재재 영감은 할머니가 갑자기 큰소리로 OK! OK!하자 자신의 청혼을 받아 준 것으로 착각하고 기쁨 마음으로 돌아갔다.
-사랑의 고뇌에 빠진 할머니-
한편 할머니는 이날밤을 거의 뜬눈으로 보냈다.
할머니는 다음날도 하루종일 집에 있으면서 눈물을 글성이며 청혼을 하던 꾀재재 영감의 모습이 자꾸만 눈앞에서 어른 거렷다.
이틀이 지나면서 할머니는 꾀재재 영감에 대한 배신감이 눈녹듯이 서서히 사라지고 있었다. 그리고 꾀재재 영감에 대한 불쌍한 생각으로 할머니의 머리가 더욱더 아파갔다. 그러나 다음날 할머니는 다시 마음을 고쳐먹고 결단을 내렸다.
결혼 상대자가 한국 사람도 아닌 코쟁이 영감한테 내가 어떻게 남세스럽게 결혼을 하겠느냐! 절대 결혼할수 없다고 결론을 내렸다.
한편 꾀재재 영감은 매일같이 공원에 나와 할머니를 애타게 기다렸다. 분명 나에게 OK! OK!하고 갔는데 왜 나타나지 않을까. 노인의 절망감은 날이 갈수록 더해 갔다.
그런데 할머니도 큰마음 먹고 절교를 선언했지만 시간이 갈수록 꾀재재 영감에 대한 연민의 정을 끊을 수가 없어 다시 깊은 수심에 빠져 들었다.
할머니의 얼굴에 갑자기 수심이 가득찬 것을 눈치챈 사람은 며느리였다. 매일같이 옷을 단정히 입고 공원에 가던 시어머니가 일주일째 집에서 아이를 보면서 웃음을 잃어버린 그 처량한 모습에 며느리는 같은 여자이 입장에서 시어머니가 숨기고 있는 그 무엇을 알아차렸다.
며느리는 즉각 남편에게 귀뜸을 했다.
즉 어머니의 신상에 말못할 중대한 사랑의 고민이 생겼으니 당신이 빨리 해결해 주라고 다그쳤다.
그러나 남편은 말도 안되는 소리라며 펄쩍 뛰었다.
한편 할머니는 꾀재재 영감이 오늘도 자신을 눈이 빠지도록 기다리고 있을 것을 생각하니 한숨이 절로 나왔다. 한편 아들은 어머니의 얼굴이 불과 열흘 사이에 크게 수척해진 것을 보고 어머니를 붙잡고 어머니의 고민이 도대체 무엇인지를 제발 속 시원하게 말좀 해달라고 애원했다.
그러나 어머니는 아무일 없다고 딱 잡아뗐다. 다음날 아들은 다시 어머니에게 매달렸다. 엄마와 자식간에 숨길 일이 무엇이 있겠느냐며 계속 졸라댔다. 그러자 어머니는 크게 한숨을 쉬고나서 이것이 소문이 나면 남세스러워서 어떻게 살겠느냐며 근 몇개월간 지속되었던 모든 이야기를 다해주며 절때 비밀로 하라고 아들을 다독거렸다.
아들은 어머니가 그동안에 겪었던 그 노인과의 아름다운 우정의 관계와 그리고 사랑의 번민을 다 듣고나서야 비로서 크게 호탕하게 웃으면서 어머니를 껴안았다. “어머니 하루빨리 결혼 하십시오. 어머니의 결혼은 하나님께서 짝을 지어주실 모양입니다.
빨리 서두릅시다. 내가 어머니의 결혼을 위해 열심히 기도할 것입니다.” 그러자 어머니는 “예야 내가 지금 이 나이에 남세스럽게 그것도 코쟁이 영감하고 어떻게 결혼 하겠느냐 너 주위에 아는 사람들이 우리집안을 어떻게 보겠느냐! 다 없던 일로 하자”고 했다.
그러자 아들은 어머니의 결혼을 절대 비밀로 하고 양가 가족만 참석하는 것으로 의논해 보자면서 어머니의 재혼을 진심으로 기뻐하며 환영한다고 다시한번 어머니를 힘차게 껴안았다.
한편 그동안 꾀재재 영감은 매일같이 공원에 나와 할머니와 즐거운 대화를 나누엇던 지난날을 회상하며 벤치에 앉아 하염없이 할머니를 기다렸다. 드디어 할머니는 아들의 전폭적인 지지에 용기를 얻어 10일만에 다시 크리스트 공원으로 나갔다.
멀리서 유모차를 밀고오는 할머니를 발견한 꾀재재 영감은 손살같이 뛰어가 담박에 서양식으로 할머니를 포옹할려고 달려들었다. 그러나 할머니는 항상 하는 말인 남세스럽다며 꾀재재 영감을 확 밀어버리면서 할머니의 유일한 영어 한마디 OK라고 했다.
-고목(古木)에서 아름답게 피어난 한쌍의 꽃-
이렇게하여 서로가 그토록 애간장을 태웠던 두 노인은 사랑의 결실을 맺어 할머니의 요구대로 극비밀리에 양가의 가족만 참석하는 조촐한 식을 올리게 되었다. 그런데 이날 호텔에서 진행된 결혼식에서 할머니는 또한번 가슴을 쓸어내리는 놀라움을 겪었다.
검은색 턱시도 예복에 모자까지 쓰고 나타난 신랑을 보는 순간 할머니는 혹시 신랑이 바뀐 것이 아닌가 하고 겁이 덜컥났다. 항상 꾀재재한 옷차림의 모습만 보다가 오늘의 모습이 너무나 다르게 보여 할머니는 의심의 눈으로 신랑을 다시한번 빤히 처다보았다.
그러자 신랑 꾀재재 영감이 할머니의 의심에 찬 눈치를 알아 차리고 손으로 자신을 가르키며 서투른 한국말로 “나 꾀재재 영감이여”하면서 윙크를 했다.
그런데 이 자리에서 또 한사람이 놀란 표정을 지었는데 바로 할머니의 아들이었다. 그 이유는 신랑측 축하객으로 참석한 사람들이 과거 TV화면과 신문에서 자주 보던 사람들이었다.
바로 전 토론토 시장이 참석했고 그리고 토론토의 재벌회장들이 참석했다. 아들은 뒤늦게 알게 되었지만 새 아버지가 토론토의 10대재벌에 한 사람이었음을 결혼식장에서 처음으로 알았다는 것이다.
사실 이 꾀재재 노인은 부인과 사별후 그 허전함을 달래기 위해 크리스트 공원에 나와 명상과 사색의 시간을 가졌는데, 우연하게도 한국 할머니와의 인연이 맺어진 것이다.
한편 결혼식 다음날 카나다의 한 신문에는 “토론토의 신데렐라가 된 한국 할머니”란 제목으로 이 두노인의 아름다운 인연을 보도했다.
이상과 같은 내용을 안드레 명상에 제보한 사람의 말로는 수년전에 토론토 신문에 이 기사가 보도되었다고 하면서 그 할머니의 근황에 대해 자신도 알길이 없다고 했다.
그래서 필자는 토론토 한인회 심재권 사무장과 토론토의 한국일보 김운영 사장 그리고 토론토의 중앙일보 편집국장에게 이 할머니에 대해 문의했으나, 그들은 이런 보도를 본 일이 없다고 하면서 아마 다른 지역 신문에 보도가 된 모양이라고 했다.
이것은 바로 앞에서 언급된데로 할머니의 요청에 의한 그야말로 비밀결혼식 때문이였다고나 할까…… 필자는 두 노인의 아름다운 사랑의 보금자리였던 크리스트 공원을 찾아 보았다.
공원 규모는 작았으며 한인타운이 근처에 있고 특히 노인회관이 공원 가깝게 있어서 할머니가 그동안 꾀재재 노인과의 교제를 할 때 매우 신경이 쓰였던 것으로 짐작이 갔다. 이들이 늘 앉았던 그 사랑의 벤치는 어느 것인지 알수 없었고 벤치마다 아름다운 만추의 단풍 낙엽이 우수에 젖고 있었다.
나는 공원을 떠나오면서 할머니의 아들이 어머니께 한 말이 갑자기 생각났다. “어머니의 결혼은 분명 하나님이 짝을 지어준 것입니다. 내가 열심히 기도하겠습니다.”…… 전세계 그 어떠한 유명 결혼 상담소도 이처럼 아름다운 짝을 만들지는 못할 것이다.
글 : 김수호 (안드레 명상 발행인)
※ 필자의 동의없이 이 글을 전재 또는 복제시는 법의 저촉을 받습니다.
안드레 명상 94호에는 미국 남 뉴저지의 체리힐 제일교회 찬양대 김남옥 집사가 루게릭 병으로 시한부 인생을 살아가는 그의 아내 윤화영씨에게 드리는 글이 게재되었다.
이 글은 수많은 독자들이 가슴이 메어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또한 이분들은 시한부 인생을 살아가는 윤화영씨 생명 연장을 위해 기도를 했다고 휴대폰 문자와 이메일을 보내왔다. 또 어떤 사람은 너무 기독교 신앙적인 이야기는 좀 삼가했으면 좋겠다고 했다. (교회를 다니지 않기 때문에)
안드레 명상을 부산 성가단 대원들에게 배부한다는 부산 성가단장 배재인 장로는 다음과 같은 제의를 해왔다 안드레 명상의 독자들이 1년에 한 번씩 모여 명상의 시간을 갖자고 했다.
(마치 천주교인들의 모임처럼) 배재인 장로는 안드레 명상을 각자마다 한 번 읽어보는 것으로 만족할 것이 아니라 이 글을 읽는 독자들의 단체모임을 통해 신앙의 인생에서 교제하며 명상과 사색을 통해 대화를 나눈다면 우리들의 인생관은 신앙인으로서 더 넓고 풍요로워 질 것이라고 설명했다.
안드레 명상을 항상 아들로부터 전해받아 읽어본다는 어느 교회 할머니 권사는 우표값이라도 보태주고 싶다고 했다.
내 주머니에 천원짜리 한 장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지만 이것도 모우면 나도 문서선교에 참여한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싶다고 솔직한 표현을 했다.
안드레 명상에 우표값이라도 보내고 싶다는 할머니의 요청을 받아 드려 처음으로 통장계좌를 개설했음.
국민은행 268802-04-031127
※ 안드레 명상은 예산관계상 2개월에 한 번씩 발행하며 이번 95호는 제반 사정으로 발송이 늦었음을 양해 바랍니다.
- 안드레 명상을 전도지로 사용할 때는 전체를 그대로 복사해서 사용해도 무방합니다. 그러나 부분적으로 발췌 복사 사용은 금합니다.
- 안드레 명상은 인터넷을 통해 전세계 어디서든지 볼 수 있습니다. (www. andre.pe.kr)
- 안드레 명상은 KBS로고스와 월드뉴스에도 동시 게재됩니다.
- KBS로고스 :(www.kbslogos.com)
- 월드뉴스 :(www.worldnews.or.kr, 또는 www.월드뉴스.kr)
발행처 : 안드레명상 선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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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뉴스
2009-0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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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의 해외여행 “소주와 오징어 때문에”
월드뉴스
2009-0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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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사랑하는 아내 윤화영에게
나의 사랑하는 아내 윤화영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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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미국 남뉴저지 체리힐 제일교회 성가대원 김남옥 집사가 루게릭 병으로 시한부 인생을 살아가는 그의 아내 윤화영씨에게 드리는 글을 안드레명상에 소개해 드립니다.
지금 제 아내 윤화영의 정확한 질병의 명칭은 Amyotrophic Lateral Sclersis(ALS) Lou Gehrigs Disease 즉 근육이 축소되어가는 루게릭이란 병이다. 현재 상태를 간단히 요약하면 정신만 살아있고 그외 인체의 모든 기관은 서서히 퇴화되어가는 증상이다.
사실 안드레명상 집필자인 김수호 장로의 우리집 방문을 정중히 사양한 것도 제 아내에게 어떤 질문을 해본들 그는 말을 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이 루게릭의 생존확률은 5년이상이 그의 없는 절망과 불치의 병이다. 나의 사랑하는 아내 윤화영! 그는 너무나도 예쁘고 사랑스러웠다.
지금 침대에 누워있는 모습을 남들이 보기에는 뼈만남은 처량한 모습으로 보이겠지만 내가 보기에는 아름다운 공주인형처럼 너무나 예뻐 보인다. 나의 아내 윤화영이 루게릭이란 병명을 알게된 것은 발병 1년이 지난 2002년도 였다.
나는 초창기 아내의 병명이라도 알고 싶어 뉴욕을 비롯한 미국의 여러 도시 여러 병원을 안가본 곳이 없었다. 수십번의 X-RAY촬영, MRI검사, 뇌파검사, SPINE검사 등 별별 검사를 다 받았다. 병원마다 의사마다 똑같은 검사를 할때는 귀찮다는 생각보다 제발 더 많이 더 자세하게 확실한 진단을 내려 달라고 애원했다.
그러나 어떤 의사들은 정확한 병명을 알려주지는 않고 오히려 역조사를 하며 계속 재검사를 요구할 때는 그 의사에 대한 믿음 보다는 실망과 불신, 분노, 그리고 더 많은 좌절감에 빠졌다. 그동안 우리 부부는 부모 몰래 또 아이들 몰래 밤마다 참 울기도 많이 울었다.
당시 아내 나이 30중반에 그 절망과 탄식의 슬픈 울음소리는 차마 들을 수가 없었다. 하다 못해 아내 나이가 50이상이라도 되었다면 어느 정도 인내심으로 남편 앞에서는 우는 모습은 다소나마 자제를 했을텐데 그러나 아내는 나를 항상 마치 친정 어머니처럼 껴안고 한없이 울었다.
그런데다 남편으로서 아내에게 격려를 해주고 투병의 용기를 주어야 할텐데 오히려 내가 아내를 껴안고 덩달아 함께 울어댔으니……아내의 몸은 절망감과 더불어 하루가 다르게 말라갔다.
고국에 가면 이 병을 고칠 수 있다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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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런 절망가운데 한가닥 희망과 삶의 용기가 생겼다. 그것은 어느 친지가 이 병은 한국으로 가면 고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즉, 중풍환자를 고치는 한국의 유명한 한의대 병원에 입원을 시키라는 것이다.그 분께서는 오늘날 양의가 못 고치는 병을 한의가 고칠수 있다는 확신을 주었다.
나는 직장 때문에 아내만 한국으로 보냈다. 집을 나서는 나의 사랑하는 아내 윤화영은 참으로 오랜만에 나에게 미소까지 지으면서 “꼭 낳아 올께요”하고 손을 흔들었다. 나는 매일 매일 전화로 아내의 치료상황을 들으면서 격려와 용기를 주었다.
계속되는 침술, 뜸, 물리치료, 그리고 갖가지 한약 등을 열심히 먹는다고 했다.
의료보험이 안되니 매일같이 들어가는 치료비는 눈덩이처럼 불어났지만 그래도 매일같이 전화통화에서 아내의 힘찬 음성소리를 들을 때마다 치료비는 아무 걱정말고 열심히 치료만 받으라고 용기를 주었다.
그런데 어느날 서울의 처남으로부터 걸려온 전화는 매우 불안하고 안타까움에 차 있었다. 나는 즉시 한국으로 가 처가에서 두달만에 아내의 모습을 보는 순간 억장이 무너졌다. 두달동안 계속된 침술과 뜸, 한약 복용, 기타 물리치료 등으로 아내의 몸은 그야말로 서리맞은 겨울 배추처럼 보였다.
그럼 전화할 때마다 그렇게 힘찬 그 음성은 도대체 어디서 나왔단 말인가?
그것은 나를 안심시키기 위해 있는 힘을 다해 말을 했던 것이다. 다음날 나는 아내를 데리고 한의대 병원으로 갔다.
두달전 혼자서 비행기를 타고 갈 정도의 건강했던 몸이 지금은 보행의 장애까지 왔고 말씨조차 어눌해졌으며 병은 더 악화되고 있었다. 우리들의 한가닥희망은 산산조각이 났다. 담당의사는 최종진단으로 불치의 병으로 알려진 루게릭이라고 했다.
그럼 두달만에 비로서 루게릭을 알게 되었는지 아니면 처음부터 루게릭이란 것을 감지하고도 한의학으로 고쳐볼려고 시도했다가 안되니까 포기한 것인지? 나는 단 한마디 질문도 하지 않고 담당의사를 원망의 눈으로 쏘아 보고 단 2분만에 진료실을 박차고 나와 버렸다.
남들은 병이 완치되어 가족들의 포옹을 받으며 즐겁게 병원문을 나서는데 우리 부부는 갈곳 없는 고아처럼 멍하니 서 있었다. 흰 까운을 입은 의사가 지나가면 우리 마누라 좀 살려달라고 고함을 치고 싶을 정도로 나의 감정은 극도로 불안하고 초조했다.
나는 보따리를 안은체 힘없이 계단에 앉아 있는 아내를 일으켜 세우고 우리 무조건 여행이나 가자면서 동생이 있는 부산으로 갔다. 우리는 한달간 무조건 사람이 많이 모이는 곳을 찾았으며, 특히 아내가 좋아하는 바닷가를 자주 갔다.
그리고 먹고 싶은 것도 자주 먹으면서 나는 이 여행이 우리 부부로서 마지막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한달간의 부산에서 여행을 마치고 다시 서울로 올라왔다.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데 친지들이 우리를 대하는 태도는 너무나 어색하기만 느껴졌다. 그래서 우리 부부는 하루라도 더 이곳에 있을 필요가 없다고 판단하고 그 다음날 당장 미국으로 왔다.
우리는 점점 더 어두운 장막 속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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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점 혼란스러워진 내 마음은 모든 일을 엉망으로 만들었고 하루 하루의 생활은 이유없는 짜증으로 진행되었다. 그리고 평소 잘 알지도 못하는 교인들의 방문은 이상하리만치 나에게는 심술같은게 생겨났고 날이갈수록 내 개인의 울타리는 높아만 갔다.
특히 직장 퇴직후 미국으로 와서 은퇴생활로 여생을 보내던 부모님의 입장이 날이 갈수록 난처해졌다. 수심에 찬 부모님을 볼때마다 나는 죄인이 된것 같았다. 그러나 지금 이 상황에 만일 부모님이 없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지금 아내의 대소변과 각종 병수발을 부모님이 다 해냈다. 그런 부모님 덕분에 나는 직장생활을 계속 할수 있었고 또 아이들도 학교를 잘 다닐 수 있었다. 사실 그동안 우리 가정은 크게 웃는 소리가 이미 사라진지 오래 되었고 가족간의 우울한 얼굴들만 보였을 뿐이다.
그럼 지금부터 주 예수님이 우리 가정에 어떻게 역사했는지를 안드레명상 독자 여러분에게 가감없이 기록하고저 한다. 나는 서울중앙고등학교를 다닐 때부터 교회를 다녔다. 그렇게 알게된 예수님은 천천히 아주 천천히 나를 기다리고 계셨고 또한 많은 사랑을 나에게 주셨지만 나는 천방지축으로 살다보니 그 귀한 사랑을 알기까지는 너무나도 오랜 시간이 흘렀다.
크리스찬 학교를 다녔지만 나는 항상 형식적인 신앙생활이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식사때 몇마디 기도하고 주일날 교회가고 또 결혼해서 아이들이 태어나고 그러다가 매사에 좋은 일이 생기면 다 내가 잘해서 생긴 일이라고 자화자찬했던 사람이다.
그러니 내 인생의 중심에는 예수님이란 존재는 아예 없었다. 그래서 기도를 하면서도 그 기도를 받아줄 주체가 없었던 것이다. 더구나 아내의 병이 발병한 후부터 나의 신앙은 더 퇴보하는 것 같았다. 첩첩산중처럼 진행되는 그 고난의 여정에서 나는 남몰래 수없이 탄식하고 울었다.
그러던 어느날 보스톤에 있는 어느 목사님께서 나를 만나자는 연락이 왔다. 사람들 만나기를 싫어하는 나는 귀찮지만 그래도 먼길에서 온 목사님을 생각해서 약속된 장소로 나갔다. 절망의 나락으로 빠져가는 우리 가정에 주님의 손길이 다가왔다.
목사님은 나를 만나자마자 다짜고짜로 자기와 같이 새롭게 신앙생활을 하자면서 나를 위한 감사기도부터 시작했다. 순간 나는 내가 지금 어떤 절망 속에 어떻게 살아가는지 나의 형편을 목사님이 잘 알면서도 어떻게 감사하다는 기도를 하실까?
나에겐 지금 감사할 것이라고는 단 한가지도 없고 오히려 하나님에 대한 섭섭한 마음 뿐이다. 그런데 목사님이 기도중에 갑자기 목이 메이더니 급기야는 눈믈을 흘리기 시작했다. 그 순간 나의 마음에도 표현할 수 없는 평안이 찾아왔다.
처음 겪는 일이라 다소 당황을 했지만 나는 그 목사님의 뜻에 따라 함께 신앙생활을 하면서 전에는 행하지 않았던 나만의 기도를 하면서 성경말씀에 심취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목사님께 요청하여 기도원을 찾아 1주일간의 난생처음 금식기도를 시작했다.
조그마한 방에서 간절한 나의 기도는 처음에는 왜 그렇게도 어색했든지 그러나 시간이 가면서 나의 입에서 터져 나오는 기도는 기도가 아니라 마치 어릴적 엄마에게 매달리며 울어대는 소리와 같았다. “주님! 지금 어디에 계십니까?
지금 저 기도를 듣고 계십니까? 저는 확실하게 주님을 알기를 원하며 주님을 영접코자 하오니 저를 좀 붙잡아 주십시오!…… 이 말이 내가 하는 기도의 전부였다. 더 이상의 기도의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래도 기도를 하고 난후 나는 마치 한여름 낮 사이다를 마신 것 같이 가슴이 시원해졌으며 그리고 한참 기도를 하다 눈을 떠보니 창밖에는 꽁꽁 얼어붙은 호수 한가운데 한쌍의 백조가 너무나도 평화롭게 노닐고 있었다. 저렇게 추운날씨 그것도 얼음 위에서…… 백조는 마치 나를 가까이 오라는 듯 날개를 들어보이기도 했다.
나는 백조의 하얀 날개짓에 이끌리듯 방문을 열고 나서자 따스한 겨울태양이 나를 감싸주었는지 얼음판을 걸어도 춥지가 않았다. 그 백조를 바라보면서 나는 형언할 수 없는 마음의 평안을 찾았다.
그리고 그 백조의 평화스러운 모습을 보면서 나는 다짐을 했다.
나의 형편이 아무리 고통스럽더라도 나를 사랑하는 주님이 내옆에 계신다면 나는 그 어떤 괴로움도 이길 수 있을 것이라는 신앙의 다짐을 가졌다. 그리고 금식기간중 나는 처음으로 성경을 완독하는 기쁨도 가졌다. 기도원에서 돌아온 나의 밝은 모습을 본 아내와 가족들은 감짝 놀랐고 이때부터 우리 집안에는 웃음소리가 나고 가족들의 기도도 열심을 다했다.
한알의 밀알이 아내에게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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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날 아내 윤화영의 얼굴이 이상하게 보였다.
항상 창백했던 그 얼굴이 오늘은 완전 사색이 된채 떨고 있었다. 내용인즉 임신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아이를 꼭 낳아야 하겠다는 비장한 표정까지 지었다.
나는 순간 주저 앉았다. 자기몸 하나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고 통증으로 하루 하루를 살아가는 판국에 아이를 낳겠다니…… 나는 벌떡 일어나 아내를 껴안았다. 나날이 바싹바싹 말라가는 이 몸에! 손바닥만한 이 배안에 새로운 생명이 싹트고 있다는 사실!
나는 모든 책임이 나에게 있다는 사실을 주님께 눈물로 회개하며 깊은 고뇌에 빠져들었다. 도대체 이 난감한 사건을 어떻게 해야 할까? 하루가 지난 다음날 우리 부부는 우리 마음대로 함부로 아이를 뗄수 없다고 합의를 하고 나는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다. “생명을 주시는이도 생명을 거두어 가시는 것도 오직 전지전능한 하나님이십니다. 전적으로 하나님의 뜻에 따르겠습니다.……
나는 그때부터 산부인과, 소아과, 심장의학과, 마취과 등 각 분야의 의사들을 만나면서 아내의 출산문제를 두고 수도없이 토의했다. 그들의 대답은 모두가 한가지였다. 즉, 루게릭 환자의 임신도 기적이지만 특히 루게릭 환자가 아이를 출산한 예는 미국에서는 전무하다는 사실을 말해 주었다.
그러나 아내는 분명하게 “내 생명은 끝나도 내 아이의 생명은 하나님께서 확실하게 지켜주실 것”이라면서 오히려 불안에 떨고 있는 나를 위로해 주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태중에 있는 아이의 활동이 점점 커 가면서 아내의 평소 힘든 호흡도 곤란을 느끼기 시작했다.
아내의 숨결이 점차 힘들고 절박한 상황이 지속되자 우리는 유도분만을 택하는 방법 이외에는 다른 조치를 취할 수 없었다. 이렇게 해서 한달을 덜 채우고 아들 영준이가 태어났다. 그때 아내 나이 38세였다. 한편 앞서 언급된 의사들의 소문으로 아내의 임신과 출산이 미국 의학계의 관심사로 등장했다.
그리고 뉴욕의 17번 채널 TV에서 아내와 특별대담 프로그램까지 준비하고 있었다.
그러나 아내는 TV 대담을 사양하고 아들 영준이의 앞날을 온전히 하나님께 맡긴다고 했다. 그리고 딸만 둘 있는데 손자를 부모님께 안겨준 아내의 표정은 너무나 행복해 보였다.
한편 영준이는 태어날 때 체중미달에 심한 호흡곤란 등이 있었지만 하나님은 영준이를 완전 정상아로 성장시키기 시작했다. 생존기간 5년의 진단을 받았던 나의 사랑하는 아내 윤화영은 현재 (2008년 12월 현재) 7년째를 살고 있다. 아마 하나님께서 영준이를 좀더 보살피라고 아내의 생명을 더 연장시켜 주시는 것으로 나는 확신하고 있다.
특히 내가 출석하는 체리힐 제일교회 성도들과 목사님의 심방기도를 나는 한없이 감사하고 있다.
한편 지금 아내의 상태는 아무말도 못하고 눈만 깜박이며 모든 신체기관은 계속 말라가고 있다. 현재 다섯 살인 영준이는 교회에서 같은 나이 또래의 아이들 보다 제일 튼튼하고 또 얼굴이 잘생겨서 유치부에서 제일 인기가 있다고 한다.
교회에서 예배가 끝나면 나는 세 아이와 같이 모여서 교회 식당에서 식사를 한다.
그때마다 우리 영준이는 자기 친구가 엄마들과 함께 식사하는 모습을 물끄러미 보고 있을 때가 많다.
나는 우리 영준이의 그런 모습을 볼때마다 목이 메어 음식이 넘어가지 않는다.
영준이가 교회에서 집에 돌아오면 엄마에게 달려가 오늘 유치부에서 배운 찬송가와 그리고 영어설교를 엄마 앞에서 또렷하게 말한다. 그때는 아내도 눈을 더 크게 깜박이며 감격의 표정을 짖는다. 이제 고등학교 3학년이된 큰딸과 그 아래 둘째딸도 지난날의 그 악몽에서 벗어나 이제 마음의 평강을 찾았다.
그러나 언젠가는 어머니와의 이별이 있을 것을 알고 미리미리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는 것 같다.
그리고 아내가 몸이 성한시절 우리교회 유치부에서 열심히 봉사했던 것을 생각하면서 나도 현재 체리힐 제일교회 찬양대원으로 봉사하고 있다. 그리고 현재 내가 아내와의 유일한 대화 방법은 내가 글자를 적어서 하는 필담이다.
건강했던 그 시절 흘러간 추억을 회상하는 나의 사랑하는 아내 윤화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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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는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명상에 잠길때가 자주 있는데 그때는 지난날 자신의 건강했던 모습과 그리고 우리들의 고국방문 추억을 회상하고 있었다. 한국에 가서 비록 병은 못고치고 왔지만 그때 아내가 가고 싶어했던 해운대 관광에서 먹고 싶은 것도 실컷 먹었다.
특히 해운대 백사장에서 동백섬까지 백사장을 걷는 코스는 자신의 건강에도 크게 무리가 가지 않아 아내는 매우 좋아했다. 그때 너무나 오랜만에 나는 아내의 함박웃음을 보았다. 그러나 그때 나는 마음 속으로 중얼거렸다.
“사랑하는 나의 아내 윤화영아! 이것이 우리가 부부로서 손을 잡고 걸어가는 마지막 여행이야, 실컷 웃어라”…… 아내 윤화영은 남들이 지금의 우리 모습을 좀 봐 주었으면 하는 표정으로 지나가는 사람들을 향해 미소를 지었다. 과거 같으면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항상 못마땅했던 그가 아닌가?
아내는 찰삭거리는 바닷물을 보면서 “우리 매일같이 이 백사장을 걷자”고 속삭였다. 그때 멀리 도로가의 자동차에서 흘러나오는 노래소리가 우리 부부의 마음을 파고 들었다. 아내는 나의 허리를 쿡지르면서 “당신 제일 좋아하는 18번 노래가 나오네”
『언제까지나 언제까지나 헤어지지 말자고 맹세를 하고 다짐을 하던 너와 내가 아닌가, 세월이 가고 또 너도 가고 만날길이 없다면 못난 미련을 던져 버리자 저바다 멀리 멀리』지난날 노래방에서 이민생활의 고달픔을 달래며 고국이 그리울 때마다 내가 자주 불렀던 “해운대 에레지”란 노래였다.
노래의 가사를 생각하며 우리는 서로를 보며 피식 웃었지만 노래가 계속 나오자 아내는 듣기 싫어하는 표정을 지었다. 이날따라 내가 과거에 그렇게도 좋아했던 그 노래가 그날은 나의 가슴을 사정없이 찌르며 파고 들었다.
『백사장에서 동백섬에서 속삭이던 그 날이 오고 또가는 바닷물 따라 들려오네 지금도 이제는 다시 두번 또다시 만날길이 없다면 못난 미련을 던져버리자 저바다 멀리 멀리』 나는 지금 그 날 그 백사장에서 들었던 그 노래를 생각하면 마치 내가 다시 나혼자 그 백사장을 찾아 6년전 아내와의 그 아픈 추억을 회상하는 그 노래의 주인공이 된것 같아 눈물이 핑돈다.
이제 이 글의 끝을 맺고자 한다. 주님은 먼 시간 전부터 나를 찾았지만 나는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방황했다. 구원의 중심이신 주 예수님께서 참담했던 우리 가정에 어느 날부터 우리 가족 모두에게 미소를 머금게 했고 돌덩이처럼 무거운 나의 가슴에 알수 없는 위로와 평강을 주셨다.
그리하여 항상 무거운 침묵만 흐르던 우리 가족들에게 평안과 사랑을 주신 것을 나는 너무나도 감사하게 생각한다. 이제 주님만이 우리의 반석이시며 피난처이심을 믿사오며 나의 사랑하는 아내 윤화영을 한알의 밀알이 되게하여 아들 영준이를 이땅에 보내주신 하나님의 그 오묘한 섭리를 제 마음대로 판단하기에는 저가 너무나 부족한 인간임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저의 개인적인 글을 안드레명상에 게재 시켜준 김수호 장로님께 감사를 드리며, 이제 안드레명상 독자 여러분에게 한가지 부탁을 드리지 않을 수 없다. 저의 아들 영준이에게 엄마의 존재는 너무나도 크다고 본다.
남들은 지금 제 아내를 식물인간으로 보지만 우리 영준이에게는 비록 식물인간 엄마지만 그래도 매일같이 엄마가 옆에 있다는 그것만으로도 영준이는 행복하다. 이 안드레명상을 읽는 독자 여러분에게 나의 사랑하는 아내 윤화영의 생명을 연장시켜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좀 해 주시기를 간절히 부탁드리는 제 심중이 지금 얼마나 갈급한 것인지를 이해해 주기 바랍니다. 글 : 김남옥
※ 안드레명상은 다음 95호에도 해외 취재편이 게재됨.
안드레 명상은 1991년 당시 교회 성도들의 신앙 교양지로 출발했는데 이 글이 삽시간에 전도지로 사용되면서 전국 교회 선교회는 물론 3군 사관학교를 비롯한 군부대, 교도소, 병원, 직장신우회 그리고 해외 38개국으로 퍼저 나갔습니다. 매호 8만부가 발행되어도 그 수요를 충족치 못했습니다.
안드레 명상은 1호에서 50호까지를 모아서 국민일보와 바울서신사에서 이미 두권의 책을 발행했습니다.
한편 1998년 IMF 여파로 안드레 명상의 동역자들이 없어지면서 74호에서 발행이 중단되고 75호부터 인터넷으로 나갔습니다.
그동안 기존의 많은 독자들이 안드레 명상을 다시 전도지로 사용할 수 있겠끔 요청이 쇄도하여 지난번 92호부터 다시 발행 했습니다.안드레 명상은 무료로 기증되며 특히 현재는 아직 동역자가 없어 개인 자비량으로 인쇄합니다.
그래서 이 글을 보신후 버리지 마시고 꼭 권하고 싶은 분에게 이 글을 전해 주십시오.
이 한 장의 글이 앞으로 그 분의 인생관을 어떻게 변모시킬지? 그것은 아무도 모릅니다.
- 안드레 명상을 전도지로 사용할 때는 전체를 그대로 복사해서 사용해도 무방합니다. 그러나 부분적으로 발췌 복사 사용은 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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