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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09-06-29 19:13: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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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드레명상 작가 김수호 칼럼니스트
해마다 6월의 현충일이 오면 서울 동작동 국립묘지 현충원에는 무표정한 사람들의 무거운 발걸음을 볼수 있다. 특히 금년(2009년)은 유가족들의 참배객이 너무나 많아서 한때 이 일대 도로의 통행이 마비되기도 했다.

왜 금년 현충일에는 이렇게 많은 인파가 밀려 들었을까? 그 이유는 오직 유가족들만 잘 알고 있을 뿐이다.

“어떤 사람은 빽이 좋아서 남편이 군대를 안가 부부해로 하고 어떤 사람은 빽이 좋아 자식을 군대 안 보내고 그 아들 덕분에 잘도 살고 있고 어떤 사람은 빽이 좋아 군에간 아들을 후방에 빼내어 편한 군대생활 시키는데……

1970년대 당시 현충일의 국립묘지 취재를 할 때 아들과 남편의 묘비를 부여잡고 신세타령하며 목놓아 울던 어머니들의 모습이었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전쟁 유가족들의 이 절규의 통곡소리를 전해 듣고 비장한 결단을 내렸다.

1) 대한민국의 국회의원과 그리고 장군의 아들들이 군대를 기피하는 것을 철저하게 조사를 하라!온갖 이유를 내세워 아들에게 국방의 의무를 기피 시키는 자가 어떻게 국가의 요직을 맡을 수 있겠는가!

2) 국회의원과 장군의 아들이 군 입대를 하면 무조건 솔선수범적으로 휴전선 최전방 GOP에서 야간 보초를 세우게 하라!

당시 박정희 대통령의 이 정책은 70년대 그가 주도했던 경제발전이나 새마을운동 업적에 못지 않는 깊은 인상을 국민에게 심어 주었다.

그러나 박대통령 서거후 다시 우리 사회는 국가 요직이나 사회지도층 인사들이 자기 자식을 군대에 보내지 않으려고 그야말로 황소도 웃을 갖가지 이유를 만들어 군 면제를 받았다.

한편 호국보훈의 달 6월만 되면 50여년전 많은 국민들이 애송(愛送)했던 시(詩) 모윤숙의 <국군은 죽어서 말한다>를 기억할 것이다.

6.25 전쟁이 막 끝난후 특히 당시 우리나라 중, 고, 대학생들치고 이 詩를 모르는 학생들이 없었다.


0 산옆 외따른 골짜기에 혼자 누워있는 국군을 본다.

장미 냄새보다 더 짚은 피의 향기에 엎드려 그 젊은 주검을 통곡하며 나는 듣노라 그대가 주고간 마지막 말을……

0 조국의 산맥을 지키다가 드디어 나는 숨지었노라 조국이여!동포여!내 사랑하는 소녀여!……

0 나는 자랑스런 내 어머니의 조국을 위해 싸웠고 내 조국을 위해 또한 영광스리 숨지었노니 여기 내몸 누운곳……

0 바람이여 저 이름모를 새들이여 그대들이 지나는 어느길 위에서나 고생하는 내나라 동포를 만나거든 부디 알려다오 나를 위해 울지말고 조국을 위해 울어 달라고…… (※ 부분적 발췌한 것임)

모윤숙 시인의 이 詩는 당시 6.25 전쟁에서 전사한 장병들의 유가족들에게는 큰 위로와 국방의무에 깊은 긍지를 심어 주었다.또한 이 詩는 국군장병들의 호국정신을 후대에 영원히 계승하기 위해 육군본부 <명예의 전당>에 설치되었다.

그러나 2005년 당시 국회 국방위원회 국정감사때 열린우리당 임 모의원의 주장으로 이 詩가 철거되었다고 한다.이유는 모윤숙씨가 단지 친일(親日) 시인이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한편 앞에서 언급된 금년(2009년) 현충일에는 동작동 국립 현충원 일대의 차량통행이 마비될 정도로 유달리 수많은 유가족들이 몰려든 그 이유는 간단하다.

아까운 생명을 바쳐 조국을 지켜냈는데 오늘에 와서 대한민국을 부정하는 소위 좌파세력들의 심상치않은 행동들을 보니 내 남편 내 자식들의 장렬하게 전사한 그 주검이 개주검보다 못했단 말인가!

대부분 먼길 시골에서 올라온 이들 유족들은 음식 보따리를 풀어놓고 비석에 연신 소주잔을 부우며 오늘의 이 세태를 원망했을 것이다.

70년대 한국 교회 부흥을 선도했던 어느 원로 목사는 오늘날 교회마다 나라를 위한 통성기도 소리를 들어본지 오래되었다고 했다.

또한 주일예배에서 대표 기도자는 대한민국을 위한 단 한줄의 기도는 없고 선배들이 수십년간 사용했던 기도문장 하나도 틀리지 않고 오직 청중 의식의 작문만 낭독하고 있다고 안타까워 했다.

지금 하나님이 진정 듣고 싶어하는 것은 나라의 안정을 위한 간절한 살아있는 눈물의 기도를 원한다고 했다.

6.25 전쟁때 대한민국이 흥망의 갈림길에 놓였던 낙동강 전투를 승리로 이끌게 한 이승만 대통령의 당시 그 구국의 기도가 바로 살아있는 간절한 기도였다.

이승만 대통령은 그 당시 영남지역의 목사들을 불러모아 미공군 B29 폭격기가 낙동강 전투에 작전을 할 수 있겠끔 우리나라 상공에서 계속되는 악천후의 날씨를 쾌청하게 해달라는 기도였다.

목사들의 뜨거운 통성기도회가 끝나자 한국의 상공은 구름 한점 없는 쾌청한 날씨로 변하고 있었다.

이 때를 기다린 B29 폭격기 99대가 오끼나와 기지를 이륙해 8월 16일 오전 12시경부터 4시간 동안 공산군 진지에 융단폭격을 감행함으로써 공산군의 낙동강 도강을 차단시켰다.

만일 당시 B29 폭격기의 출격이 하루나 이틀만 늦었어도 낙동간 교두보는 무너졌으며 이 나라는 영영 공산국가로 변했을 것이다.

그만큼 당시 이승만 대통령의 구국기도회는 낙동강 전투에서 풍전등화에 놓인 나라를 구해낸 잊을 수 없는 기도 모임이었다.

오늘날 나라의 어려움이 생기면 통성기도회를 갖는 것도 그 시작은 이승만 대통령의 구국기도회가 효시이다.

한편 오늘날 나라가 혼란할 때 일수록 교회 목사들은 성도들에게 정확한 국가관을 성경적으로 설교를 해야 할 것이다.

교회마다 좌파 우파가 마치 카멜레온처럼 그 색깔을 속이고 있는 위선적 기독교인들 때문에 목사들은 설교의 애로를 느끼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목사의 설교권이 이들 때문에 절 때 위축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6.25 전쟁때 미국의 저명한 언론인이 신문컬럼을 통해서 세계지도에 보이지도 않는 조그만 나라 한국에서 왜 미국 청년들이 죽어가야 하느냐며 한국전 참전을 결사 반대한다는 선동을 주장했다.

결국 이 언론인은 미국 국가정책의 선동죄로 법정에 섰다.

이 언론인은 판사를 향해 미국 수정헌법 제1조의 언론자유의 법적 보장을 강력하게 주장했다.

그런데 이때 연방법원 판사의 명 판결문이 낭독되었다.

“첫째 미국이란 나라가 존재하기 때문에 수정헌법 제1조가 존재한 것이다.

둘째 미국이란 나라가 없어지면 당신 같은 언론인이 언론의 자유를 외칠곳이 없을 것이다.

故로 미국의 존립자체가 모든 것의 우선이며 언론의 자유는 2차, 3차 문제다,,……

신문없는 정부보다 정부없는 신문을 택하겠다는 미국의 3대 대통령 재퍼슨의 말은 그가 대통령이 되기전 언론의 중요성을 강조한 언론에 대한 인기 영합 주의에서 나온 말이다.

그러나 재퍼슨이 대통령 취임 2년부터 자유를 남용하는 반대파 신문들을 억제하기 시작했다.

만일 대한민국이 공산화 된다면 이 나라의 기독교는 즉 교회도 바로 그날부터 폐쇄된다는 것은 삼척동자도 알고 있는 사실이다.

나라의 기강이 흔들릴 때마다 가장 울분을 토하는 사람들이 상이군인들이다.

오늘의 60,70대는 기억할 것이다.6.25 전쟁이 끝났을 때 전쟁에서 손목과 발목이 짤린 상이군인들이 의수에다 쇠 갈고리를 차고 길거리에서 열차에서 상품을 강매하던 그 모습들!

특히 양다리가 다 절단된 사람은 양 손목으로 몸을 이끌고 다녔고 또한 두 눈을 다 상실한 사람은 검은색 안경을 끼고 어린딸의 손을 잡고 물건을 팔러 다녔다.

오늘의 20, 30대가 이런 말을 들으면 “무슨 소설 같은 이야기”라고 생각할 것이다.그러나 그 당시 우리 국가는 그들을 도와줄 경제력이 없었기에 그들은 완전 거지 취급을 받으면서 살기 위해서는 문전걸식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서울 잠실에 있는 주님의교회 박원호 담임목사는 미국에서 목회 할 때는 6.25가 되면 교회마다 6.25기념 주일로 특별행사를 한다고 했다.

즉, 6.25때 참전한 60, 70대 역전의 용사들이 이날은 군복에다 훈장까지 달고 나와 특별찬양을 한다고 했다.

또한 교회 벽면에는 군복무시절의 각자의 사진을 부치고 조국을 위해 충성했던 기억을 잊지 않는다고 했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교회가 6.25에 대해서 너무나 무관심한 것을 보고 박원호 목사는 크게 놀랐다고 했다.

가뜩이나 고국의 정치상황이 이상하게 전개되는 것에 대해 미국의 교포들은 모두가 어쩌다가 대한민국이 저렇게 변하고 있는지? 교포들의 한숨 소리는 높아지고 있다고 한다.

또한 모처럼 고국방문 비행기를 타는 교포들은 즐거워야 할 고국방문이 마치 병든 부모님을 찾아 가는 심정이라고 한다.

동족상잔의 그 처절했던 6.25 비극을 우리 국민들은왜 이렇게 빨리 잊어버릴까.

그래서 박원호 목사는 금년부터 (2009년) 처음으로 6.25기념 주일예배를 드렸는데 예배 마지막 순서에 주님의교회 출석하는 예비역 장병 출신 성도들의 특송순서를 만들었다.

이날 강단에는 6.25 전쟁에 직접 참전한 80대의 두 노인과 그리고 예비역 육군중장 임헌표 장군과 역시 육군중장 박용득 장군 그외 영관출신 장교들이 모두 군복차림으로 나와서 찬송가 352장 “십자가 군병들아”를 힘차게 불렀다.

뒤이어 전체 성도들과 함께 애국가를 합창할 때는 눈시울을 적시는 성도들도 보였다.


전 육사교장 김충배 장군의 영상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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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의 현충일을 앞두고 동인교회 담임목사를 역임했던 지상섭 목사의 주선으로 육사교장과 한국 국방연구원장을지낸 예비역 육군중장 김충배 장로를 만날 수 있었다.

김충배 장로는 육사교장 시절 말로만 들었던 청소년들의 의식구조 특히 국가관에 대해서 놀랐다고 한다.

250여명의 가입교 생도들에게 돌린 설문지에서 “우리나라의 주적(主敵)은 누구인가”란 질문에 무려 34%가 미국이라고 대답했다.김충배 장로는 처음에는 눈앞이 캄캄해지면서 머리가 아찔했다고 한다.

국가의 간성을 길러내는 사관학교 교장으로서 또한 전쟁이 발발하면 부하장병들을 이끌고 선두에서 전투 지휘를 해야할 장교가될 이들의 뇌리에 이런 끔직한 사상이 들어 있다는 것이……

이것이 생도들 부모의 책임인가! 또는 이들을 교육시킨 교사들의 책임인가! 더 나아가 이 나라 좌파 정치인들의 책임인가!김충배 장로는 사관생도들의 올바른 역사관을 바로잡기 위해 2004년 당시 조영길 국방장관의 전폭적인 지지로 역사 교수들에게 의뢰해서 한국 근 현대사 편찬에 들어갔다.

그러나 2005년 2월 정권이 바뀌면서 이 책은 육사 생도들에게 배포금지가 되었다.

그후 다시 정권이 바뀌면서 육사 이현수 교수의 기획으로 8명의 역사학자 교수들이 분야별 집필로 2008년 8월 초판에 들어가 현재는 일반 서점에까지 판매하고 있다.

이날 김충배 장로로부터 기증 받은 한국 근현대사를 읽어보면 제1부 외세의 침략과 근대화운동 제2부 일제 강점기 민족독립운동 제3부 대한민국의 시련과 발전이라는 세가지 큰 제목으로 구성되어 있다.이 책은 좌파, 우파, 누가 읽어도 대한민국의 올바른 역사관을 볼 수 있다.

또한 이날 김충배 장로가 전해준『김충배의 영상편지』가 수록된 CD는 배경음악으로 그 유명한 "Foever with you(영원히 그대와 함께) 섹스폰 연주가 깔리면서 전개되는 글 한줄 한줄을 읽어갈 때 마치 안타까운 옛 이야기가 수록된 영화를 보는 것 같았다.

『김충배의 영상편지』는 지금 훈련소나 신병 교육대에서 교육용으로 상영된다고 하는데 이 CD가 제작된 배경에 대해 김충배 장로는 앞에서 언급된 육사 가입교 생도들로부터 받은 그때의 충격 때문이었다고 했다.

오늘날 20대 청년들에게 오늘의 대한민국이 이만큼 성장발전한 것은 바로 오늘의 6, 70대 국민들의 피땀으로 이룩된 것을 증명하기 위해 제작했다고 한다.

이 CD 제작에 앞서 당시 육사교장이었던 김충배 중장은 1천명의 사관생도들에게 특별 강연을 하게 되었는데그 날의 강연 원문을 그대로 옮겨본다.

서독에 간호사와 광부를 보내고 그들의 봉급을 담보로 빌린 1억4천만 마르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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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대한민국의 장래를 짊어질 개혁과 신진의 주체, 젊은이들이여! 여러분들은 6,70대가 겪은 아픔을 얼마나 알고 있는가?

그대들은 조국을 위하여 과연 얼마만큼 땀과 눈물을 흘렸는가?

지금 여러분들이 누리는 풍요로움 뒤에는 지난날 6,70대의 피와 땀과 눈물이 있었다는 것을 결코 잊어서는 안된다.

5.16혁명 직후 한·미관계는 매우 어려웠으며 이를 해결하고자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이 미국을 방문했으나 큰 성과를 이루지 못했다.

그 당시 한국에 돈 빌려줄 나라는 지구상 어디에도 없었다.

그러나 우리와 같이 분단된 공산국 동독과 대치한 서독에 돈을 빌리려 대사를 파견해서 1억4000만 마르크를 빌리는데 성공했다.

당시 우리는 서독이 필요로 한 간호사와 광부를 보내주고 그들의 봉급을 담보로 잡혔다.고졸 출신 광부 500명을 모집하는데 4만6천명이 몰렸다.

그들 중에는 정규대학을 나온 학사 출신도 수두룩했다.

면접볼 때 손이 고와서 떨어질까봐 까만 연탄에 손을 비비며 거친 손을 만들어 면접에 합격했다.

서독 항공기가 그들을 태우기 위해 온 김포공항에는 간호사와 광부들의 가족, 친척들이 흘리는 눈물이 그칠줄 몰랐다.

낯선 땅 서독에 도착한 간호사들은 시골병원에 뿔뿔이 흩어졌다.

말도 통하지 않는 여자 간호사들에게 처음 맡겨진 일은 병들어 죽은 사람의 시신을 닦는 일이었다.

어린 간호사들은 울면서 거즈에 알코올을 뭍혀 딱딱하게 굳어버린 시체를 이리저리 굴리며 닦았다.

하루종일 닦고 또 닦았다.남자 광부들은 지하 1000미터 이상의 깊은 땅 속에서 그 뜨거운 지열을 받으며 열심히 일했다.

하루 8시간 일하는 서독 사람들에 비해 열 몇 시간을 더 그 깊은 지하에서 일을 했다.

서독방송, 신문들은 대단한 민족이라며 가난한 한국에서 온 여자 간호사와 남자 광부들에게 찬사를 보냈다.

“세상에 어쩌면 저렇게 억척스럽게 일할 수 있을까?” 해서 붙여진 별명이 ‘코리안 엔젤’이라고 불리었다.

몇 년 뒤 서독 뤼브케 대통령의 초대로 박대통령이 서독을 방문하게 되었다.

그때 우리에게 대통령 전용기는 상상할 수도 없어 미국의 노스웨스트 항공사와 전세기 계약을 체결했지만 쿠테타군에게 비행기를 빌려줄 수 없다는 미국 정부의 압력 때문에 그 계약은 일방적으로 취소되었다.

그러나 서독 정부는 친절하게도 국빈용 항공기를 우리나라에 보내주었다.

어렵게 서독에 도착한 박대통령 일행을 거리의 시민들이 플랜카드를 들고 뜨겁게 환영해 주었다.

코리안 간호사 만세! 코리안 광부 만세! 코리안 엔젤 만세! 영어를 할 줄 모르는 박대통령은 창 밖을 보며 감격에 겨워 땡큐! 땡큐!만을 반복해서 외쳤다.

서독에 도착한 박대통령 일행은 뤼브케대통령과 함께 광부드을 위로, 격려하기 위해 탄광에 갔다.

고국의 대통령이 온다는 사실에 그들은 500여명이 들어갈 수 있는 강당에 모여들었다.

박대통령이 수행원들과 함께 강당에 들어갔을 때 작업복 입은 광부들의 얼굴은 시커멓게 그을러 있었다.

대통령의 연설이 있기에 앞서 우리나라 애국가가 흘러 나왔을 때 이들은 목이 메어 애국가를 제대로 부를 수조차 없었다.

대통령이 연설을 했다.

단지 나라가 가난하다는 이유로 이역만리 타국에 와서 땅속 1000미터도 더 되는 곳에서 얼굴이 시커멓게 그을러 가며 힘든 일을 하고 있는 제 나라 광부들을 보니 목이 메어 말이 잘 나오지 않았다.

“우리 열심히 일합시다. 후손들을 위해서 열심히 일합시다.열심히 합시다.” 눈물에 잠긴 목소리로 박대통령은 계속 일하자는 이 말을 반복했다.

가난한 나라 사람이기 때문에 이역만리 타국 땅 수천미터 지하에 내려가 힘들어 고생하는 남자 광부들과 굳어버린 이방인의 시체를 닦으며 힘든 병원일 하고 있는 어린 여자 간호사들.

그리고 고국에서 배곯고 있는 가난한 내 나라 국민들이 생각나서 더 이상 참지 못해 대통령은 눈물을 흘렸다.대통령이란 귀한 신분도 잊은 채……

소리 내어 눈물 흘리자 함께 자리하고 있는 광부와 간호사 모두 울면서 영부인 육영수여사 앞으로 몰려나갔다.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 하며……

육 여사이 옷을 잡고 울었고, 그 분의 옷이 찢어질 정도로 잡고 늘어졌다. 육 여사도 함께 울면서 내 자식같이 한명 한명 껴안아 주며 “조금만 참으세요”라고 위로하고 있었다.

광부들은 뤼브케대통령 앞에 큰 절을 하며 울면서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한국을 도와주세요. 우리 대통령님을 도와주세요. 우리 모두 열심히 일하겠습니다. 무슨 일이든 하겠습니다.”를 수없이 반복했다.

뤼브케 대통령도 울고 있었다. 연설이 끝나고 강당에서 나오자 미처 그곳에 들어가지 못한 여러 광부들이 떠나는 박대통령과 육영수 여사를 붙잡고 “우릴 두고 어디가세요? 고향에 가고 싶어요.

부모님이 보고 싶어요.”하며 떠나는 박대통령과 육 여사를 놓아 줄 줄을 몰랐다.

호텔로 돌아가는 차에 올라 탄 박대통령은 계속 눈물을 흘렸다.옆에 앉은 뤼브케대통령은 손수건을 직접 주며 “우리가 도와주겠습니다.

서독 국민들이 도와주겠습니다.”라고 힘주어 말했다.

서독 국회에서 연설하는 자리에서 박대통령은 “돈 좀 빌려주세요.

한국에 돈 좀 빌려주세요. 여러분들의 나라처럼 한국은 공산주의와 싸우고 있습니다.

한국이 공산주의자들과 대결하여 이기려면 분명 경제를 일으켜야 합니다.그 돈은 꼭 갚겠습니다.

저는 거짓말할 줄 모릅니다.공산주의자들을 이길 수 있도록 돈 좀 빌려주세요.”를 반복해서 말했다.

오늘의 대한민국 경제 성장에는 6,70대가 흘린 피와 눈물과 땀이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한국은 자원도 돈도 없는 세계에서 가장 못사는 나라였다.

유엔에 가입된 나라 수는 120여개국, 당시 필리핀 국민소득 170불, 태국 220불 등…이 때, 한국은 76불이었다.

우리 밑에는 달랑 인도만 있었다.

세계 120개 나라 중에서 인도 다음으로 못사는 나라가 바로 우리 한국이었다.

1964년 국민소득 100달러! 이 100달러를 위해 단군할아버지부터 무려 4600년이라는 긴 세월이 걸렸다.

이후 그대들이 말하는 이른바 우리 보수 수구세력들은 머리카락을 잘라 가발을 만들어 외국에 내다 팔았다.

동네마다 엿장수를 동원하여 머리카락 파세요! 하며 길게 땋아 늘인 아낙네들의 머리카락을 모았다.

시골에 노인들은 서울 간 아들놈 학비 보태주려고 또 먹고 살 쌀을 사기 위해 머리카락을 잘랐다.그래서 한국의 가발산업이 발전하게 되었던 것이다.

또한 싸구려 플라스틱으로 예쁜 꽃을 만들어 외국에 팔았다.

전국에 쥐잡기 운동을 벌였다. 일명 코리안 밍크를 만들어 외국에 팔았다.돈 되는 것은 무엇이던지 다 만들어 외국에 팔았다.

이렇게 저렇게 해서 1965년 수출 1억달러를 달성했다. 세계가 놀랐다. “저 거지들이 1억달러를 수출해?”하며 ‘한강의 기적’이라고 전 세계가 경이적인 눈빛으로 우리를 바라봤다.

‘조국근대화’의 점화는 서독에 파견된 간호사들과 광부들이었다. 여기에 월남전 파병은 우리 경제 회생의 기폭제가 되었다.

그들이 흘린 피와 땀 때문에 경부고속도로가 건설되었고 이를 바탕으로 우리 한반도에 동맥이 힘차게 흐르기 시작했다.

우리가 올림픽을 개최하고 월드컵을 개최하고 세계가 우리 한국을 무시하지 못하도록 국력을 키울 수 있었던 것은 그대들이 수구 보수 세력으로 폄훼하는 그때 그 광부와 간호사들, 월남전 세대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대들이 명심할 것은 그때 이방인의 시신을 닦던 간호사와 수천 미터 지하 탄광에서 땀 흘리며 일한 우리의광부, 이국전선에서 피를 흘리는 우리 국군장병, 작열하는 사막의 중동 건설현장에서 일한 6,70대가 흘린 피와 땀과 눈물이 있었기에 그대들 젊은 세대들이 오늘의 풍요를 누릴 수 있다는 사실을 결코 잊어서는 안된다.

반전과 평화데모를 외치며 거리로 몰려나와 교통질서를 마비시키는 그대들이 과연 아버지와 할아버지 세대를 수구세력으로 폄훼할 자격이 있는가……

그때 땀 흘리며 일한 오늘의 6,70대들을 보수 수구세력으로 폄훼하기에 앞서 오늘의 현실을 직시하라.

국가경영을 세계와 미래라는 큰 틀 전체로 볼 줄 아는 혜안을 지녀야 하지 않겠는가?

보다 나은 내일의 삶을 위해 오늘의 고통을 즐겨 참고 견뎌 국민소득 4만불대의 고지 달성 때까지는 우리들 신, 구세대는 한 덩어리가 되어야 한다.

이제 갈라져 반목하고 갈등하기에는 갈 길이 너무 멀다.

이제 우리 모두 한 번쯤 자신을 돌아보며 같은 뿌리에 난 상생의 관계임을 확인하고 다시 한 번 뭉쳐보자. 우리 모두 선배를, 원로를, 지도자를 존경하고 따르며 우리 모두 후배들을 격려하고 베풀고 이해 해주면서 함께 가보자.우리 대한민국의 앞날에 더욱 밝은 빛이 비추어 지리니!』

이날 강연이 진행되는 동안 많은 생도들이 고개를 숙인채 소리없이 울고 있었다.

한편 이날의 강연 이후부터 생도들은 비로서 우리부모 세대의 피눈물의 역사를 확실히 알았다고 하면서 앞으로 후배 생도들에게도 계속 이 강연을 해달라고 요청했다.

한편 김충배 장로는 6남매중 장남으로서 이미 초등학교때 처음 교회를 다녔지만 본격적인 신앙생활은 육군 중령때 군 선배의 권유로 교회에 나가게 되었다고 한다.

김충배 장로는 육사교장에서 퇴역후 한국 국방연구원장을 역임했으며, 현재는(2009년) 서울 잠실에 있는 월드비젼교회(담임목사 오영택) 군복음화 후원회장을 맡아 간증집회로 바쁜 일과를 보내고 있다.

김충배 장로는 안보교육이나 간증 집회 때는 항상 먼저 찬송가 371장『삼천리 반도 금수강산』을 열창하면서 청중을 뜨거운 성령의 분위기로 인도한다고 했다.

글 김수호 (안드레 명상 발행인)

<안드레 명상 통신란>

◎ 안드레 명상은 군부대 교회 장병들의 애독이 계속 증가됨에 따라 군부대 교회에 우선적으로 배부됩니다.

여기에 호흥하여 경기도 일산의 김용운씨와 서울 잠실의 주님의교회 오종세, 고석창 성도님의 귀한 헌금이 이번 97호 인쇄에 큰 도움이 되었음을 감사드립니다.

안드레명상 선교 헌금안내
국민은행 268802-04-031127 (김수호)

- 안드레 명상은 KBS로고스와 월드뉴스에도 동시 게재됩니다.

* KBS로고스 :(www.kbslogos.com)

* 월드뉴스 : 이글은 www.worldnews.or.kr, 또는 www.월드뉴스.kr의 칼럼연재 내 김수호 코너에서 볼수 있습니다.

발행처 : 안드레명상 선교회

011-9871-0685 FAX. 02-514-0686
이메일주소 : songpo8304@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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