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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10-09-23 05:4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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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정은 구 한말까지 5백년간을 일평생 천대만 받으며 살았다. 우선 머리에 상투를 못하게 했고 또한 머리카락을 다듬지(이발) 못하게 할 뿐만 아니라, 봉두 난발을(머리카락을 쑥대 밭처럼 엉크러짐)해야 한다. 또한 갓이나 망건을 못쓰게 했으며 도포도 못입게 했다.

특히 백정은 호적에도 못 올리며 나라의 인구조사에도 제외시켜서 사실상 거지보다 못한 최하층의 사람들이었다. 특히 슬픈 일은 백정은 죽어도 상여를 사용못하며 시신은 지게에 지고 산으로 가서 묻었다.

또한 자녀들이 결혼할 때는 가마를 탈수가 없기 때문에 아버지가 신부를 업고 시집을 가야했다. 특히 백정은 아무리 돈이 있어도 집을 건축할 때 기와를 얹지 못하게 했다.

길거리에서 양반이 지나가면 백정은 즉시 땅바닥에 엎드려 고개를 숙여야 한다. 당시 양반들은 나라에서 각종 좋은 혜택을 받으며, 과거 시험도 보며 병역은 물론, 세금과 부역을 면제 받았다.

그러나 간혹 양반이라도 죄를 지으면 가벼운 회초리 몇대만 맞고 큰 몽둥이로 때리는 매는 자기집 머슴이 대신 육모 몽둥이로 맞아준다. 또한 백정이 정부 관리로부터 몽둥이로 맞아 죽는다 해도 그것을 하소연 할 수가 없는 그야말로 인권이란 말 자체가 없었다.

이러한 인간 이하의 멸시 천대를 받으며 500년간을 살아온 백정들이 구 한말 교회 출석 1년만에 장로 선거에서 양반을 누르고 장로가 되었다.그가 바로 백정 장로 박성춘이다. 백정 박성춘이 장로가 되기까지 그 파란만장의 생애를 보면 바로 하나님의 위대한 섭리와 역사가 있었다는 것은 직감할 수 있다.

박성춘은 1862년 서울 관자골 지금의 종로구 관훈동에서 백정의 아들로 태어나 한번 백정은 죽을 때까지 백정이기 때문에 백정의 딸과 결혼 백정 아들을 낳았다. 박성춘은 소를 도살해 주고 수고비를 받아서 살아가는 어려운 가정이었다.

박성춘의 가정이 풍지박살이 난 것은 허가 받지 않는 소를 몰래 잡아 주었다는 이유로 군관과 포졸들이 박성춘을 체포할 때, 그의 부인이 결사적으로 막으려다 그들이 휘두르는 육모 방망이에 맞아 죽었다.

그리고 며칠후 둘째 아들까지 병으로 사망하자, 박성춘은 큰아들 봉출이 만은 천추의 한이 되었던 백정으로서 멸시천대를 면하게 하기 위해서 공부를 시키기로 했다.

그래서 아들을 데리고 당시 교회 안에서 아이들을 무료로 가르친다는 소문을 듣고 지금의 서울 을지로에 있던 곤당골교회 예수교 학당을 찾았다. 박성춘은 학교에 대해 조건을 달았다. 즉, 내아들 봉출이를 무료로 공부시켜 주는 것은 대단히 고맙지만, 아들을 주일 예배에는 보내지 않겠다고 했다.

이렇게 해서 아들 봉출이는 대대로 내려온 이 백정 집안에서 처음으로 학생이 되었고, 학교에서는 봉출이의 이름을 서양(瑞陽) 즉 상스러운 태양이란 뜻에서 박서양이라고 새로 지어 주었다.

박서양은 열심히 공부하여 모범학생이 되었고 선생님들은 서양이가 비록 백정의 아들이지만 성품이 바르고 오직 공부에만 열중하는 것을 보고 서양이를 친자식처럼 보살폈다. 이때가 1894년 동학운동이 일어나고 청일전쟁이 터져 구 한말 조선반도는 열강들의 전쟁의 먹구름이 덮고 있었다.

한편 1892년 미국 북장로교의 파송으로 사무엘 포먼 무어 선교사가 인천 제물포항에 도착 본격적인 선교 활동에 들어갔다. 그가 처음 노방전도를 한 곳은 지금 서울시청앞 롯데호텔 부근인 곤당골이었다.

이 지역에서 매일같이 열심히 전도지를 나누어주면서 16명의 결신자를 모우고 곤당골 교회라는 간판을 걸고 첫 예배를 드린 날자가 1893년 3월 19일이었다. 이곳 곤당골 지역에도 백정들이 많이 살고 있어서 무어 선교사는 특별히 백정들에게 더 많은 전도 활동을 했다.

한편 1894년 당시 전국에서 콜레라가 번지기 시작 하루 3백명씩 죽어갔다. 안타깝게도 박서양의 아버지 박성춘도 이 무서운 전염병에 걸려 곧 죽게 된다는 소문이 학교에 퍼지자, 외국인 선교사 두 사람이 박서양을 앞세우고 박성춘을 찾아갔다.

두 사람의 선교사는 곤당골 교회의 무어 목사와 고종황제의 주치의였던 에비슨 박사였다. 이 분들의 치료로 박성춘은 기적적으로 생명을 건졌다.

특히 박성춘이 기절초풍할 정도로 놀란 것은 어떻게 감히 고종황제의 주치의가 짐승보다 못한 취급을 받는 백정의 초라한 집까지 친히 찾아와서 진료를 해준다는 것은 꿈도 꿀 수없는 것이었다.

박성춘은 며칠후 아들 서양이가 다니는 예수교 학당을 찾아가서 이제부터 아들을 주일 예배에 참석시켜 달라고 했으며, 아울러 자신도 예수교 학당에서 공부를 하겠다고 했다.

이렇게 해서 박성춘은 글을 배워 성경을 탐독하면서 신실한 기독교인으로 그의 인생관은 하루가 다르게 변모되어 갔다. 그가 출석하던 곤당골 교회는 양반들과 정부관리 그리고 백정들도 많이 참석하여 교회는 날로 부흥했다.

양반 성도들이 “백정들과 함께 예배를 드릴 수 없다” 양반들과 정부 관리들은 백정들과 한자리에서 같이 예배를 드릴 수 없다면서, 무어 목사에게 중대한 제의를 했다. 즉 양반들은 예배당의 제일 앞에 특별석을 마련해서 백정들과 분리해서 앉게 해 달라고 했다.

그러나 무어 목사는 한마디로 거절했다. “하나님 안에서는 양반과 천민의 구별이 없고 모두가 평등합니다”라고 선언했다. 특히 백정은 포졸, 광대, 고리장, 무당, 기생, 갓바치 등 천민 중에서도 가장 천한 최 하류의 신분이다.

한편 박성춘은 1895년초에 무어 목사에게 세례를 받는다. 그때 그의 나이 33세로서 교회봉사와 전도에 열성을 다하자 무어 목사는 박성춘이 앞으로 교회의 큰 일꾼이 될 것으로 확신했다.

그러나 앞서 특별석을 만들어 달라던 양반들은 개나 소, 돼지 등 동물을 전문으로 때려 잡는 백정 박성춘을 절대 교회에 못 나오겠끔 무어 목사에게 또한번 압력을 넣기도 했다. 그러나 무어 목사는 일언지하로 거절했다.

결국 양반들은 백정들과는 함께 예배를 볼 수 없다면서 새로운 교회를 개척해서 나갔다. 그 교회가 지금의 광교동 근처 문숫골 교회다. 교회가 분리되자 제일 크게 상심한 것은 백정 박성춘이었다.

박성춘은 자기와 같은 백정교인들 때문에 무어 목사의 처지가 난감해지자 그는 전도에 용기를 내어 매일같이 노방전도에 나갔다. 박성춘의 친절한 전도에 백정들이 하나둘씩 곤 당골 교회로 몰려오면서 교회는 활기를 찾고 크게 부흥했다.

곤당골 교회는 결국 성도들 수용에 한계점에 달했고 반면 분리해 나간 순수 양반교회인 홍문수골 교회는 점점 쇠퇴하면서 양반들이 다시 곤당골 교회로 되돌아오는 처지가 되었다.

-한국 최초의 외과의사가 된 박서양

한편 박성춘의 아들 박서양은 예수교 학당을 졸업한 후 왕립병원인 제중원에서 에비슨 박사의 도움으로 의학공부에 전념하면서, 장차 외과 의사가 되겠다는 목표를 정했다. 이 목표 달성은 바로 백정의 아들이 아닌 완전 자유와 평등의 인간으로 즉 백정과 천민의 굴레를 벗어나는 것과 직결된다고 생각했다.

한편 에비슨은 미국의 대 사업가 세브란스의 거액 기부금으로 남대문 봉숭아골에 한국 최초의 병원을 준공하여 병원 이름을 세브란스 병원이라고 지었다. 한편 에비슨이 의학교육을 시작한지 10년만인 1908년 6월 3일 7명의 첫 졸업생이 배출됐다.

이 졸업생 중에 박서양은 후배 교육을 위해 교수로 재직했는데 그의 전공은 화학과 인체 해부학이었다. 당시 사람들이 병이나면 한의사를 찾는 길 이외는 다른 방도가 없었다. 특히 수술로서 중병을 고친다는 것은 상상도 못하는 시절이었다.

결국 수술하지 않으면 죽는다는 것을 훤히 알고 있는 양반층 환자들이 세브란스 병원의 박서양 의사에게 가서 수술만 받으면 살 수 있다는 사실이 서울 장안에 소문으로 크게 퍼졌다.

그래서 양반 환자들은 박서양 의사에게 진찰이라도 한번 받기 위해 줄을 섰고 그 앞에서 정중하게 인사를 해야 하는 바야흐로 양반이 백정출신 의사에게 고개를 숙이는 시대가 도래했다.

박서양이 한국 최초 외과 의사가 된지 2년만인 1910년 8월 29일 “한국 황제 폐하는 한국 전부(全部)에 관한 일체의 통치권을 완전하고도 영구히 일본국 황제 폐하에게 양여함”이란 대한 제국의 국권이 일본에게 빼앗기는 소위 국치일(國恥日)을 당하게 된다.

박서양은 국권을 강탈 당한 땅에서 의사 노릇을 계속할 수 없었다. 비분강개한 박서양의 가슴에 드디어 애국의 혼이 불타면서 독립운동을 하기 위해 고국을 떠난다.

1917년 15만여명의 우리 동포가 살고 있는 간도 연길현으로 가서 구세병원을 개업했는데, 한국인이 경영하는 병원으로는 처음이었다. 구세병원은 년간 1만명 이상의 우리 동포 환자를 진료하는데, 그중 약 3천명 이상을 무료 진료를 해주었다.

박서양은 병원 건축과 동시에 교회도 설립하여 동포들에게 기독교 신앙과 민족의 혼을 심어주기 위해 초등 교육기관으로 숭신학교를 설립 자신이 교장으로 봉사했다.

병원과 교회와 학교 바로 이곳은 앞으로 조국의 독립운동에 무한한 자산이 된다고 확신했다. 또한 조국에서 일어난 3.1운동에 맞추어 만주 지역에서는 대한국민회라는 독립운동 단체가 결성되었는데, 이때 박서양은 대한국민회 군사령부의 군의관으로 임명되었다.

한편 1931년 만주사변 이후 일본은 만주지역의 우리 독립운동을 막기 위해 1차적으로 민족의 혼을 양성한다는 이유를 내세워 숭신학교를 폐교시켰다. 학교가 폐교되자 박서양은 1936년 고국으로 돌아와 황해도 연안읍에서 의료활동을 하다가 1940년 지금의 고양군 수색으로 이사를 왔다.

이사온 그해 12월 15일 박서양은 그토록 갈망했던 조국의 독립을 보지 못하고 55세의 나이로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다. 아마 하늘 나라에서도 박서양이 꼭 필요한 인재(人材)였기 때문이었을까? 지난 2008년 우리 정부는 뒤늦게나마 박서양을 독립운동 유공자로 선정해 건국포장과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백정 박성춘과 승동교회의 부흥

백정들과는 절대 같이 예배를 드릴 수 없다고 나갔던 양반들이 곤당골 교회로 되돌아오자 곤당골 교회는 수용의 한계점에 도달했다. 그래서 무어 목사는 인사동에 새 교회를 건축하는데, 이 지역은 불교의 본산지라 할 수 있는 조계종을 비롯한 크고 작은 암자들이 많아서 동네 이름도 불교 마을로 불렀다.

그러나 무어 목사는 이와 같은 불교 마을에서 교회가 굳건하게 서기 위해서 즉 승리하기 위해서 이길 승(勝)과 마을 동(洞)자를 넣어 교회 이름을 승동교회로 정했다.

승동교회가 이곳으로 옮겨 갑자기 부흥할 때 크게 협력한 사람이 성서한국 번역가요 대 전도자인 서상륜이었다. 참고로 새문안교회 개척당시 설립자 14명중에 13명을 서상륜이 전도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한편 승동교회 부흥의 또 한사람의 일꾼이 백정 박성춘이다. 무어 목사로부터 신앙 훈련을 철저하게 받았던 박성춘이 노방 전도를 나가면 금방 수십명에서 수백명 사람들이 모여든다.

특히 양반층의 사람들이 “도대체 백정 놈이 무슨 말을 어떻게 잘 하길래”하면서 많은 양반들이 구경을 나온다. 박성춘의 전도 내용의 핵심은 “내가 교회를 나가지 않았다면 백정놈이 감히 이 자리에서 여러분들에게 전도 연설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 여러분도 예수 믿고 천당 가십시오. 지금 내 등 뒤에는 여러분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성령님께서 나를 인도해 주고 있습니다”.....청산유수 같은 연설이 끝나면 전도지를 나누어 준다.

백정들은 글을 모르니까 전도지를 소중하게 가지고 있지만 양반들은 전도지를 받는 즉시 땅바닥에 던지고 신발로 비벼 버린다. 박성춘은 이 때가 제일 마음이 아프다. 이때 그는 큰 소리로 외친다.

“지금 양반 여러분은 성령님을 모독하고 있습니다. 두고 보십시오. 앞으로 하나님은 틀림없이 전도지를 땅바닥에 버린 사람들에게 벌을 내리실 것입니다.”

박성춘의 전도 연설은 서울 장안에 널리 알려져 독립협회가 주관하는 시민대회 연사로 등장한다. 즉 1898년 10월 29일 서울 종로에서 제2차 관민공동회 개막 연설을 했는데, 그 날의 연설 초반부만 소개한다.

“나는 대한의 가장 천한 사람이고, 무지 몽매한 자입니다. 그러나 충군애국(忠君愛國)의 뜻은 대강 알고 있습니다. 나라를 이롭게 하고 국민을 편하게 하는 길은 관민(官民)이 합심한 이후에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저 천막에 비유하자면 한 개의 장대로 받치면 역부족이나 많은 장대를 합하면 그 힘이 심히 견고합니다.
원컨데 관과 민이 합심하여 우리 대 황제의 성덕에 보답하고 국운을 만세에 누리게 합시다”.....

-장로 선출에 양반과 백정이 대결했다.

1911년 승동교회는 상회의 허락으로 장로 1인을 선출하는데, 세례 받은지 1년이 지나고 만 30세 이상이면 누구나 장로될 자격이 있습니다 라는 공고문을 교회 벽에 부쳤다. 백정 박성춘은 주위의 권고로 후보에 나가 양반 후보와 대결했다.

선거 결과는 “박성춘이 공동 의회에서 회원의 3분 2 이상을 득표하여 승동교회 초대 장로가 되었습니다”라고 무어 목사가 크게 외치자, 백정 교인들은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나 큰 함성을 지르며 춤을 추었다.

이날의 기적은 한국 기독교 역사에 또 하나의 새로운 이정표를 세웠다. 한편 양반들은 박성춘 백정이 장로가 되자, 백정 밑에서 신앙 생활을 절대 할 수 없다면서 안국동에 안동교회를 개척해 나갔다.

한편 박성춘이 장로가 되면서 경총노회 재정위원회 임원직을 맡으면서 그의 활동 범위가 계속 확장돼 갔다. 특히 전국에 백정 교회를 계속 세워 나가면서 당시 내각 총서 유길준에게 장문의 탄원서를 보냈다. 그 내용은『백정 차별 금지법』을 만들어 백정들도 갓과 망건을 쓰게 해달라고 했다.

유길준은 당시 해외 국비 유학생 1호로서 미국 보스톤대학을 졸업했는데, 후일 그가 세상을 떠나던 날 아들과 조카에게 꼭 신약성서를 읽어라는 유언을 했다. 특히 유길준은 개화 사상가로서 박성춘의 탄원서의 주장은 당연한 것으로 즉시 허락해 주었다.

박성춘은 백정들이 500년간 써보지 못했던 망건과 갓을 제일 먼저 썼던 백정으로 그가 처음 갓을 썼던 날이 얼마나 행복하고 기뻤던지 그 날밤 잠을 잘때도 갓을 쓰고 잤다는 일화가 있다.

다음 주일날 아침 박성춘 장로가 도복차림에 갓을 쓰고 당당하게 교회로 들어오는 모습을 보고 많은 성도들이 웃고 우는 희비가 연출되었다. 박성춘 장로 장립 2년후 이 교회에는 흥선대원군의 조카이며 왕손이었던 이재형이 장로가 된다.

백정 장로와 왕손 장로가 서로가 손을 잡고 교회를 위해 간절히 기도하는 모습을 상상만 해도 가슴이 설레인다. 일자 무식이었던 천민 백정이 아들의 손목을 잡고 교회로 향했던 그 날의 그 발걸음이 이들 부자(父子)의 운명을 바꾸어 놓았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역사였다.

-찬송가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가 작곡된 얘기

우리나라에서 작곡된 찬송가 중에 외국에서 가장 많이 알려진 찬송가를 든다면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를 들 수 있다. 이 찬송은 현재 독일어, 영어, 라틴어, 중국어, 이탈리아어, 일본어로 번역되어 이들 나라에서 애창되고 있다고 한다. 특히 외국 사람들의 경우 명곡은 원어로 불러야만 가치가 있다고 해서 한국말 그대로를 부르는 사람이 많다고 한다.

한편 국내에서도 세종문화회관이나 큰 공연장의 음악회를 보면 이 찬송이 꼭 프로그램 순서에 들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이 찬송은 잔잔한 시냇물이 흐르듯이 진행되다가 서서히 장엄하고 웅장함으로 변하다가 다시 우렁찬 곡으로 변화되는 것이 이 찬송의 특징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 찬송은 교인뿐만 아니라 음악을 하는 사람치고 누구나 다 배워두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한다. 그런데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란 이 불멸의 찬송가를 누가 작곡했으며, 특히 이 찬송가가 작곡된 그 배경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으로 본다.

이 찬송은 목원대학교 대학원 교수이며 작곡가였던 고(故) 나운영 장로가 6.25전쟁 때 부산 피난생활에서 작곡한 것이다. 필자도 이 찬송이 작곡된 내용을 ‘인간만세’ 방송을 제작할 때 비로소 알게 되었다.

1950년 피난지 부산에서 어느날 성경을 읽고 있던 나운영 장로는 시편 23편을 읽어가는 중 생각지도 않았던 악상이 갑자기 눈앞에 전개되었다고 한다.

그 순간의 모습은 마치 비가온 뒤 무지개가 선 것 같이 선명했다고 한다. 나운영 장로는 즉시 연필을 잡고 악보를 그려 나갔는데, 그 순간 순간의 연필 놀림은 마치 다급한 시외전화를 메모하는 것보다 더 빨랐다고 한다. 성경 시편 23편은 그 문장이 너무나 훌륭해서 우리나라 서예전 전시회에서 이 글의 출품이 빠지는 일이 없다고 한다.

그러나 그 긴 문장을 가사로 해서 악보로 만들어간 시간이 정확하게 꼭 3분이었다고 한다. 보통 악보에 멜로디만 기록해도 3분 이상이 걸린다고 했는데,그 당시 그 순간에 어떻게 해서 불과 3분만에 특히 반주까지 완성을 했는지?

나운영 장로는 그 3분동안에 일어났던 그 일을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뛴다고 한다. 나운영 장로는 평소 작곡을 하나 할 때 보통 30번 이상을 고쳐야만 마음에 들 듯 말 듯한다고 했다. 그런데 이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는 그야말로 1점 1획도 고치지 않고 하나님이 불러주는 영감 그대로를 단숨에 작곡을 했다고 한다.

그래서 나운영 장로는 평소 자주 듣던 ‘하나님의 영감’이란 말을 직접 체험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나 영감 앞에서 우리 인간은 먼지보다도 못한 나약한 존재일 뿐이라고 했다.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두 번째 지시

나운영 장로가 두번째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것은 그후 29년이 지난 1979년 8월 24일 제주도 어느 호텔에서 기도를 하던 중에 일어났다. “너는 지금부터 매월 일곱곡의 찬송가를 작곡해서 봉헌하라”는 내용이었다고 한다.

그날의 그 명령을 실천하기 위해 나운영 장로는 매월 일곱곡의 찬송을 작곡해서 91년 11월 세째주일에 드디어 1천곡을 작곡 봉헌했다고 한다.

나운영 장로는 이미 중앙고보 3학년때 지금도 중학교 3학년 교과서에도 있는 ‘아 가을인가요’를 작곡했고 18살 때 동아일보 신춘문예 작곡 부문상을 받았는데 이때 ‘가려나’를 작곡했다. 나운영 장로의 음악생애에 가장 비애를 느낀 것은 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서 손기정 선수가 마라톤에서 우승을 했을 때라고 한다.

그때 우리 민족은 이 기쁨의 감격을 표현해서 다같이 부를 노래가 없었다고 한다. 당시 그가 일본 동경제국 음악학교로 급히 유학을 떠난 것도 이러한 연유에서 기인된 것인지도 모른다.

평생을 찬송가 작곡으로 살아온 나운영 장로에 대해서 외국의 학자들이 ‘나운영 성가’라는 연구 논문을 집필해서 석사학위를 받은 분도 있고, 또한 국내 학자들도 ‘나운영 가곡 연구논문, 나운영 교향악 작품’등 각종 연구논문을 발표하기도 했다. 한사람의 작곡가가 음악을 통해서 인류 역사에 엄청난 업적을 남긴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글 : 김수호 (앙드레명상 발행인, 주님의교회 협동장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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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처 : 안 드 레 명 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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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 P : 011-9871-06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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