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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09-09-02 00:1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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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수호 칼럼기자
**전 주월 한국군 사령관 채명신의 전쟁과 신앙**

채명신은 1945년 8.15 광복과 더불어 20세의 나이로 평남 진남포 근교에 있던 덕해국민학교의 교사가 되었다. 덕해는 고향은 아니지만 어머니가 덕해교회에 권사로 활동하던 지역이다.

채명신은 덕해교회 청년부 교사를 하면서도 항일운동으로 투옥된 아버지 채은국씨가 집에 비치해둔 철학, 사상, 동서양의 교양 서적 등 수많은 책들을 열심히 읽었다. 한편 광복과 더불어 석방된 아버지는 일제의 모진 고문의 후유증으로 석방 3개월만에 세상을 떠났다.

채명신이 교사가 된지 얼마후 진남포 근교에는 공산당의 당과 군 간부를 양성하는 평양학원이 개설되었는데 원장은 김책이었다.김책은 당시 소련 극동군 사령부 88 여단소속 소령으로 1945년 김일성 대위와 함께 평양에 들어왔다.김책은 평양학원 개설을 앞두고 먼저 교사들을 초청했는데 이때 채명신 교사도 초청되었다.

이날 김책 소령은 “이제부터 우리나라는 빛나는 사회주의 국가건설로 총매진 할 것입니다.”라고 외치면서 교사들에게 질문 순서도 진행시켰다.이때 채명신 교사가 마르크스의 자본론과 변증법적 유물론을 들먹이며 앞으로 이 나라는 어떤 사회주의 건설을 할 것인지를 조목조목 질문했다.

김책은 놀란 표정으로 “아니 동무가 어떻게 마르크스 시즘에 그렇게 해박하오”…… 채명신은 아버지가 골방에서 남몰래 탐독했던 자본론과 변증법적 유물론을 자신도 열심히 읽었던 내력을 설명하자 김책은 “부친은 영웅이시오 부친의 애국적 행동을 기억하겠소”하면서 채명신을 주의 깊게 바라보면서 특히 180cm 훤칠한 체격을 보고 크게 호감을 가졌다.

“채동무! 내년(1946년 2월) 평양학원 정식 개원식 때 채동지를 꼭 초청하겠소”하면서 채명신의 손을 굳게 잡았다.그로부터 1년후 1946년 2월 18일 평양학원 개원식날 채명신은 김책의 안내로 중앙 단상 세 번째 줄에 앉았다.맨 앞줄에는 치즈샤코프 소련군 주둔 사령관과 김책, 김두봉, 김일성, 이용범, 강양욱 등 북한 권력의 핵심 인사들이 앉았다.

치즈샤코프 사령관은 이날 기념사에서 “내년 기념식 때는 탱크부대와 포병부대, 전투기가 분열에 참가할 것입니다.”……
채명신은 이날 이 평양학원은 앞으로 북한 정권의 핵심적 당간부와 군대 장교들을 양성한다는 소문이 틀림 없음을 확인했다.

한편 이날 채명신이 크게 의심한 것이 처음보는 김일성 모습이었다.학생때 역사공부를 통해 만주벌판을 누비며 항일투쟁의 신비의 장군이었던 김일성 장군이 오늘 이곳에서는 30대의 새파란 청년이었다.

-김일성의 평양행 제의를 거절한 채명신

기념식이 끝나자 축하연회가 열렸는데 김책 원장이 “김일성 동지 이 젊은 청년이 내가 그동안 누차 말했던 채명신 동지요.자 악수들 하시오.”……
김일성이 만면에 웃음을 띠고 채명신의 손을 덥석 잡으며 “반갑소 채동무! 말씀 많이 들었소, 사회주의 공부를 많이 했다지요.우리는 채 동무같은 인재가 필요하오 오늘 나와 함께 평양으로 가지 않겠소!”……

악수한 손을 다시 한번 크게 흔들었다.이때 김책은 “김일성 동지를 따라 평양으로 가서 신생조국 건설에 힘을 보태시오.”하면서 김일성의 제의를 수락할 것을 촉구했다.그러자 김일성은 “어캐 날 안따라 가겠다는 건가?”…… 채명신이 답변을 못하고 주춤거리자 김일성은 고개를 갸웃둥 하면서 안타까운 표정으로 식장을 떠났다.

채명신이 이때 김일성의 제의에 망설인 결정적 이유는 평소 잘 알고 지내던 소련군 정치장교로부터 공산주의는 허구라는 사실을 자주 들어왔기 때문이었다.만일 이때 채명신이 김일성을 따라 갔다면 채명신의 인생은 180도로 변했을 것이라고 그날 그 상황을 회상했다.만일 그날 김일성을 따라 갔다면 채명신은 인민군 고급 장교를 거쳐 6.25 남침때는 아마 별을 달고 남한공격의 선봉에 섰을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 김책은 후일 김일성의 무자비한 숙청 계획에 따라 교통사고를 가장해서 죽었으며 뒤이어 평양의 기독교 세력도 제거하기 시작했다.당시 평양은 기독교 문화가 서울보다 먼저 개화되어 조만식이 그 중심에 있었다.그러나 1946년 조만식이 평양 고려호텔에 연금되면서 본격적인 기독교 탄압과 교회 폐쇄가 시작되었다.

교회 폐쇄의 목적은 당시 기독교는 북한 사회에서 가장 조직화된 세력이고 또한 교육열이 높은 계층이기에 특히 자유주의 신봉의 싹을 미리 짤라 버리겠다는 것이다.

한편 미국 선교사가 최초 평양에 왔을 때 채명신의 외조부 박진준은 이때 기독교인이 되어 1890년대말 평남 중화군 신흥면 대기암리 고향에 교회를 세워 장로가 되었다.

이때 채명신의 어머니는 다섯 살이었는데 채명신은 모태신앙으로 유년시절부터 철저한 기독교 가정에서 성장했다.한편 1947년 1월말 채명신의 어머니가 권사로 시무하던 덕해교회에 용강군당원들이 찾아와 교회를 접수한다면서 내일부터 교회문을 닫으라고 욱박질렀다.

이때 채명신은 교회 폐쇄를 절대 반대했다.그러자 당원들은 “당신들의 하나님이 뭐요 하나님을 직접 보았소! 천당 천당 하는데 천당 갔다와 봤소!…… 그러자 채명신은 “눈에 안보인다고 없다고 할 수 없습니다.내 질문 하나 하겠는데 지금 공기가 당신들 눈에 보이오, 안보이오! 안보이지요, 안보인다고 공기가 없다고 할 수 있습니까!”

그러자 당원들은 “동무는 말이 많소! 말이 많으면 반동이요, 반동은 인민의 적이요.
인민의 적은 이 땅에서 살 수 없소 반동이 어떤 대가를 받는지 똑똑히 보여 주겠소!”하고 떠났다.그 상황을 지켜본 덕해교회 교인들은 채명신에게 지금 한시 바삐 이곳을 떠나라고 했다.

그러나 채명신은 교회 청년부 교사로서 특히 청소년 선교를 중단할 수 없다고 하면서 계속 교회를 지키겠다고 했다.그러나 채명신의 어머니는 “애야 내 옆에 자식이라고는 너 하나 뿐인데 난들 너를 내품에서 떠나 보내고 싶겠느냐 너를 살리는 길은 이곳을 떠나는 길밖에 없다.”……

- 자유를 찾아 월남하는 채명신의 뒤에는?

채명신은 자신을 살려야겠다는 교인들과 어머니의 모습이 너무나 애절해서 다시 온다는 기약도 없이 한밤중에 어머니의 배웅을 받으며 남쪽으로 향했다.기차편으로 원산을 거쳐 철원까지 와서 철원에서는 야밤에 전곡으로 향했다.날이 밝아지자 돈을 주면 남쪽안내를 해 주겠다는 청년을 따라 갔지만 그 곳은 바로 연천 보안서였다.

그 청년은 보안서 프락치였다.인민재판 형식으로 보안서 뒷마당에 구덩이를 파고 즉결처분을 받을지 또는 시베리아 유형으로 보낼지 두갈래 길에 처했다.결심공판 전날 채명신은 하나님께 간절한 기도를 드렸다.
“그날의 나의 기도는 내가 지금까지 살아온 생애중 심장에서 피를 토하는 듯한 간절한 기도였습니다.”

그러나 기도의 응답은 없었다.한참후 갑자기 뜨거운 훈김이 채명신의 어깨를 덮어주면서 “그가 지금 너를 구하러간다”라는 암시가 눈앞을 스쳐갔다.순간 채명신의 눈에는 생전 처음겪는 뜨거운 눈물의 기도가 터져나왔다. 하나님의 역사는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즉 연천군 소련 주둔사령관 소코핑대좌(대령)가 연천보안서에 순시차 들였다가 감방 앞을 지나가고 있었다.채명신은 감방 창문을 통해 “다와라시! 야우치셀리” (동지! 나는 선생이다) 채명신은 러시아 말을 다 끌어모아 서울에 돈많은 삼촌을 만나 돈을 얻어 모스크바 유학을 갈려고 한다고 했다.

“쟁기가 무노가예스시 젱기다와이” (돈이 대단히 많다 돈을 가져오려고 간다) 소코핑 사령관은 만리타국 이곳 연천에서 러시아 말이 나오자 반갑게 생각되어 채명신을 보며 미소를 짓드니 “하라쇼”(좋다) 결국 연천보안서는 채명신을 재판없이 석방 평양행 기차를 타고 다시 고향으로 가게 했다.

그러나 채명신은 여관집 주인의 극비안내로 한밤중 연천을 탈출 포천으로 와서 드디어 미군 헌병의 안내로 서울에 도착했다.일가친척 하나 없는 그에게 유일하게 찾아간 곳은 지난날 아버지와 함께 민족운동을 했던 성균관대학교 경제학 이정규 교수였다.

채명신은 서울 거리에서 전개되는 좌익 남로당 청년들과 우익인 서북 청년 반공청년회가 매일 같이 맞붙어 테러가 진행되는 모습을 보고 놀랐다.지금 북한은 군사력 증강에 똘똘 뭉쳐 있는데 서울에서 전개되는 모습을 본 채명신은 서울에 가면 신학을 공부하여 목사가 되겠다고 결심했지만 지금은 목사보다 더 급한 것이 공산당으로부터 조국을 지키는 일이 급선무였다.그래서 채명신은 마침 육사 5기생 모집에 응시 합격되었다.1948년 4월 6일 육사 졸업과 동시 소위로 임관된 채명신의 기나긴 군대생활은 시작되었다.

-하나님은 채명신의 방패가 되었다

그의 첫 암실위기는 제주 4.3사건 때부터 시작하여 송악산 전투에서 적의 따발총을 왼쪽 가슴에 맞고 쓰러졌다.총알의 충격으로 쓰러지기는 했지만 아무런 통증이 없어 가슴을 만져보니 날아온 총알이 왼쪽 주머니에 달린 미제 야전복의 커다란 강철 단추의 한가운데를 맞아 단추는 크게 쭈그러졌고 총알은 땅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또한 경북 영덕지구 전투 때는 속 내의까지 피가 스며들어오는 것을 보고 놀랐다.즉 적이 쏜 총탄이 자신의 귓볼의 살점을 뚫고 지나가는 바람에 그 피가 옷을 적시고 있었는데 만일 총알이 불과 1cm만 안족으로 맞았으면 죽었을 것이다.채명신은 6.25 전쟁중 주로 유격대원으로 게릴라전을 수행했으며 중공군의 인해(人海) 전술로 후퇴중에 민가를 찾아 대민접촉중 방안에서 인민군에게 포위되고 말았다.

채명신은 이때 만일 여기서 체포되면 분명히 평양으로 끌려가 온갖 고문을 받을 것을 생각하니 차라리 깨끗하게 자결하기로 결심했다.그래서 그는 부하 2명에게 “너희들은 일단 투항해서 지내다가 기회를 봐서 도망가라 나는 이 곳에서 자결했다고 전해주게” 이 말이 끝나자 그는 자신의 권총을 오른쪽 귀에다 대고 방아쇠를 당겼다.

그런데 딱 하는 격발소리만 나고 불발이 되었다.다시 불발 탄환을 끄집어내고 다시 실탄을 장전 재차 권총을 귀에다대는 순간 옆의 부하가 억센 손으로 “죽지말라는데 왜 죽습니까” 그 순간 채명신의 머리를 스쳐가는 것이 있었다.

“지금 하나님께서 이 순간 내 부하의 입을 통해 죽지 말라고 하시는 구나”하고 정신을 차리는 순간 인민군이 문을 박차고 방으로 들어오면서 “손들었”하는 찰나 채명신이 먼저 그들을 제압 2명을 사살하고 부하들과 함께 전광석화처럼 문을 박차고 나오면서 밖에서 대기중인 또다른 2명을 사살하고 산으로 도망쳤다.

이때 인민군이 쏘아대는 따발총의 탄환이 채명신과 그 부하들을 향해 날아왔지만 한 사람도 다치지 않았다.이날밤 채명신은 기도하는 가운데 나의 생명은 하나님이 확실히 지켜주신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또한 이날밤 고향의 어머니와 덕해교회 성도들 생각이 나서 잠을 설쳤다.

낙엽을 이불삼아 누워서 나무가지 사이로 쏟아지는 별빛과 달빛을 보면서 우리 어머니는 이 아들을 남쪽으로 보내놓고 죽었는지 살았는지? 그 얼마나 많은 애간장을 태우고 있을까? 1년 365일 하루도 빠짐없이 시도 때도 없이 이 아들을 살려달라고 하나님께 그 얼마나 많은 눈물의 기도를 올리고 있을까? 그렇다! 바로 우리 어머니의 그 눈물의 기도를 하나님께서 응답해 주시는구나!!……

한편 서울은 이미 공산군에 점령당했고 국군은 수원과 오산으로 밀리면서 전투는 더욱더 치열해졌다.한편 채명신의 유격 대원들은 북한 지역에서 3개월을 작전하는 동안 대원들과도 연락이 두절되면서 각자 남쪽으로 탈출하고 있엇다.

채명신은 1951년 1월 중순 황해도 연백평야를 거쳐 강화도로 들어갔다.강화에서 어선을 타고 다시 충남 당진 석문이라는 해변에 상륙했다.채명신은 최경록 장군의 소개로 정일권 육참 총장에게 지금 중공군의 전투 규모와 그들의 전술 작전 등을 상세하게 보고했다.

한편 육군에서는 이미 실종으로 처리되었던 채명신이 살아서 돌아오자 그를 중령으로 진급시키고 이제는 비교적 안정된 보직을 주어 심신의 휴식을 취하게 했다.

-북한 유격대 사령관 길원팔 중장 체포

그러나 그것도 잠시뿐 1951년 1월말 채명신은 유격 결사 11연대를 이끌고 다시 적후방 깊숙히 침투해 들어갔다.그해 3월 중순의 어느날 특급 정보를 입수했다.
강원도 인제군 기린면 군량밭이란 마을에 인민군 거물이 묵고 있다는 정보였다.

바로 그 거물이 조선공산당 제2비서겸 북한군 현역 중장이며 대남 유격부대 총 사령관인 길원팔이었다. 길원팔은 6.25 이전부터 남한땅 동해안과 태백산맥에서 게릴라 전을 통해 온갖 만행을 자행했던 장본인이었다.

채명신은 우수한 대원 2백명을 선발해서 길원팔이 묵고 있는 마을을 포위했다.마을 주위에는 지방자위대 30명이 무장을 하고 길원팔을 지키고 있었다.인민군복을 입은 채명신은 이들 자위대장을 찾아 “길원팔 동지를 해치려는 불순 세력들이 이곳에 침투했다는 정보를 듣고 급히 내려온 특수부대다.

우선 동무들도 1차 조사할 것이 있으므로 잠시 협조해 주기 바란다” 채명신의 평안도 말씨에 그들은 의심없이 채명신의 명령에 따르는 순간 우리 유격대는 순식간에 그들을 제압 무장해제를 시키고 그 길로 그들의 생명도 끝났다.

김한철 대위가 이끄는 정예 대원들은 세포위원장 집에 묵고 있던 길원팔과 그의 참모장 외팔이 강칠성 대좌까지 체포했다.길원팔은 김일성 직인이 찍힌 작전 훈령과 친필 사인이 있는 전선 사령관들에게 보내는 편지 그리고 전방의 작전 상황도 입수했다.

채명신은 생포된 길원팔을 앞에 두고 직접 심문했다.“몇살인가” “말 안하겠다” “고향은” “모른다” “학교는?” “일본의 쓰가모 고등상업학교를 나왔다” “결혼했는가” “듣기 싫다 도대체 네놈은 누구냐” “나는 대한민국 국군 유격대 사령관 채명신이다.인민군복으로 위장하고 여기에 침투했다.”

“그 썩어빠진 남조선 괴뢰도당이 여기까지 침투할 놈은 없다. 너 반란군인가! 바른대로 대라” 채명신이 본 길원팔은 확실히 거물이었다.채명신은 길원팔에게 마지막 한가지 제의를 했다.“당신이 만약 나와 함께 남쪽으로 가면 당신은 분명히 영웅대접을 받을 것이다.

나와 함께 가자” 길원팔은 “그 썩어빠진 땅에 내가 왜 가느냐”하면서 길원팔도 채명신에게 마지막 부탁을 했다.자신이 포로로 잡히는 오명보다 자결을 원한다고 하면서 자신을 사살해 달라고 했다.그러나 채명신은 자기 손으로 차마 당신을 죽일 수 없다고 하자, 길원팔은 그럼 이왕이면 내총으로 죽고 싶다.

김일성 동지께서 주신 권총이라고 하면서 채명신이 압수한 권총을 요구했다.
채명신은 더 거절할 필요없이 압수했던 권총에 실탄을 한발만 장전해서 건네주고 방을 나왔다.실탄이 장전된 권총을 그의 손에 건네주는 순간 그순간 기분이 어떻했느냐고 필자가 엉뚱한 것 같은 질문을 하자 노병은 잠시 60여년전 그때 그 순간을 회상하며 창문 밖으로 시선을 옮겼다.

“나는 총탄이 빗발치는 그 수많은 전투에서도 항상 하나님이 나의 방패가 되어 주신 것을 믿었습니다.
나는 그날 그 권총을 그의 손에 넘길 때도 별 두려움이 없었습니다.” 채명신은 양지바른 곳에 그의 무덤을 만들어 간단한 묘비도 세워주었다.

길원팔 지묘(吉元八 之墓)라고…… 무덤 앞에서 채명신은 부하들과 함께 부동자세로 경례를 했다.
비록 적장(敵將)이기는 했지만 그는 충분히 경례를 받을 만한 장군이었다고 했다.

-적장의 아들을 대학교수로 만들었다.

한편 필자는 이번 채명신 장군과의 대담에서 당시 길원팔이 자살 직전 유언으로 남긴 그때 14세된 소년의 이야기를 이번 안드레명상에서 꼭 게재 하겠다는 양해를 구했다.대신 그때 그 소년의 이름을 밝히지 않겠다는 약속을 했다.

참고로 채명신 장군의 나이는 벌써 83세다(2009년) 중요한 비화는 역사에 남을 수 있겠끔 밝혀두고 세상을 떠나야 한다는 필자의 견해에 채 장군도 동의하는 표정이었다.그러나 수년전 대담 때는 이 소년의 이야기를 끄집어 내자 채 장군은 다소 당황한 표정으로 “그 이야기는 김장로 혼자만 알고 있으면 되고 인쇄화 되는 것은 피합시다”라고 거절했던 것이다.

참고로 채명신 장군은 안드레명상의 독자가 된지 이미 10여년이 넘었다.그럼 지금부터 길원팔이 남긴 그날의 유언내용을 지면관계상 간단히 기술하고자 한다.길원팔은 전쟁중에 부모를 잃은 한 고아소년을 아들로 삼아 키우고 있었는데 이날 길원팔은 자살직전 채명신에게 유언을 남겼다.

“저밖에 있는 내 아들을 남조선에 데리고 가서 훌륭하게 잘 키워주시오”…… 채명신은 길원팔의 유언을 실천하기 위해 당시 14세 소년을 데리고 와서 자신의 호적에 올리고 공부를 시켰다.그때 그 소년이 지금은 이름을 데면 누구나 알 수 있는 원로급 교수가 되었으며, 지금쯤(2009년) 그 교수의 나이도 이미 70세 전후가 될 것 같다.

끝으로 채명신 장군의 전쟁과 신앙 그리고 전쟁터에서 일어났던 각종 비화는 한편의 영화나 소설이 되고도 남을 것이다.그래서 안드레 명상은 다음호 99호에도 계속 채명신 장군의 이야기를 게재하기로 했다.

글 : 김수호 (안드레명상 발행인)

<안드레 명상 독자의 광장>

지난 97호를 읽고 많은 독자들이 독후감을 알려왔다.한국 언론인협회 이사 이후재 시인은 안드레명상 97호를 보면서 특히 박정희 대통령의 당시 서독방문 내용을 읽다가 소리없이 울었다고 한다.

주님의 교회 2부 성가대 김경숙 성도는 우리 아버님 세대가 가난했던 조국을 발전시키기 위해서 그토록 고생했다는 글을 읽고 눈물이 핑돌았다고 했다.

한편 전 KBS사장 서영훈씨와 수원대학교 전영우교수 그리고 이화장의 조혜자 권사등 각계 많은 인사들이 안드레명상의 독자로서 감사의 말을 전해왔다.

또한 아주대학교 성수일 교수는(주님의교회 성도) 지난 97호는 특히 청년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주었다고 했으며, 전 중앙대 임근원 교수는(주님의교회) 안드레명상을 항상 15명이 돌아가면서 본다고 했다.

그리고 전금수 목사는 오늘날 70,80대의 국민들은 6.25전쟁의 잿더미에서 나라와 가족들을 살리기 위해 불사조와 같이 털고 일어나 오늘의 대한민국을 건설했다면서 안드레명상이 오면 항상 15매를 복사해서 이웃에 나눠준다고 했다.

또한 이름을 밝히지 않는 여의도의 어느 아주머니는 옆집에 안드레명상을 한 번 읽어보라고 주었더니 이 글이 아파트를 돌고 돌아 20일만에 다시 돌려 받았을 때는 글씨가 잘 안보였다고 했다.

그리고 지진웅씨는 자신의 후배들에게 안드레명상을 꼭 보여주겠다며 30부를 요청했으며 광주 숭일고교 교목실장 오나종 목사는 학생들에게 이 안드레명상을 나눠 주기 위해 30부를 요청했다.

끝으로 김사철 장로는 꼭 한 장만 보내지 말고 다섯장을 보내주면 이웃이나 직장인들에게 전해주고 싶다고 했다.

<안드레 명상의 후원을 감사드립니다.>

인태오 장로 (상도 성결교회)

김인택 장로 (고양시 세웅교회)

어호선 (함종 魚氏 중앙종친회장)

서기춘 (주님의교회 성도님)

전금수 (향기로운 교회 목사)

※ 여러분의 후원으로 안드레명상은 아래 군부대 교회를 통해 장병들을 신앙의 길로 인도하고 있습니다.

육,해,공 3군사관학교 교회 통일대교회충무교회

제3사관학교 교회무열대교회 해병제1교회

육군부사관학교 교회 상무대교회 연무대교회

육군교육사 교회 육군본부교회

한국기독교 군선교회 해군교육사교회

공군교육사 교회 선봉대교회

안드레명상 선교헌금안내
국민은행 268802-04-031127

* 안드레 명상은 KBS로고스와 월드뉴스에도 동시 게재됩니다.
* KBS로고스 :(www.kbslogos.com)
* 월드뉴스 :(이글은 www.worldnews.or.kr, 또는 www.월드뉴스.kr의 칼럼연재 내 김수호 코너에서 볼수 있습니다)
발행처 : 안드레명상 선교회
서울시 강남구 청담동 17-4
011-9871-0685 FAX. 02-514-0686
이메일주소 : songpo8304@naver.com
인터넷 : www.andre.pe.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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