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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09-01-22 21:4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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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구대학교 정극원교수
월악산(영봉-해발 1097미터)


몰아(沒我).
봄의 길목에 월악에 접어든다.
자신은 온데간데 없고,
산만이 우뚝 서있다.
자신의 모습은 그 형체가 없어지고,
산의 자태만이 그 형색이 위용차다.

맑은 호수를 비추는 물에 달빛이 빠져들듯,
자신이 성큼 내딛는 월악에 홀연히 빠져든다.
힘든 것을 참으면서 몰아치는 걸음이다.
언덕으로 몰아가는 호흡이다.
자광사의 솔향기가 이미 예고하고 있다.
곧 정신을 잃고 말 것이라고,
산이 허풍을 떨 리가 만무하다.


영봉에 올라 혼절하고 만다.
다시 깨어나지 못하여도 행복일 것이다.
영봉에 앉아 정신을 빼았겨 버린 것이다.
영봉에서 풍치를 다 추적하기도 전에 산기운에 정신이 감전되고 만다.


본다.
산의 본래가 있다.
망각하여야만 보이는 산의 본성이다.
비워야만 다시 채워지는 것이다.
떠나야만 다시 회귀하는 출항이다.
던져야만 다시 돌아오는 부메랑이다.


월악산 깊숙이 접어들고서,
망각한다.
비운다.
떠나본다.
던진다.
그리하여 산의 본래에 다가간다.


산의 본래에 접근한다.
그러나 산의 본래를 형언해내지 못한다.
그저 하염없이 바라다보기만 한다.
그저 하염없이 상념하여 보기만 한다.
마땅히 시선을 정한 곳이 있는 것이 아니다.
마땅히 떠올려야 하는 대상이 있는 것도 아니다.
산의 진공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는 것이다.
세상의 것은 본체조차도 한없이 왜소하여 진다.
산의 것들은 소품조차도 한없이 광대하여 진다.


경계.
피어나는 푸름이다.
선봉에 서서 충성을 다하려는 장수처럼,
새싹들이 그렇게 앞을 다투어 피어나고 있다.
눈 한번 깜았다 다시 뜨면,
천지는 찰나에 벌써 연녹색이 된다.
파란 새순의 위력이 천지를 개벽하고 있다.


허걱허걱 삼거리에 당도한다.
파발을 든 병사처럼 화급하다.
촌각이 아까운 것이다.
늦게 출발한 바람처럼 서둔 것이다.
단숨에 오르고 싶은 정상인 것이다.
그리도 서둘러 산하를 보고 싶은 것이다.


절묘한 이분법이다.
영봉에서 이분법으로 산을 대비한다.
삼거리가 그 선명한 경계가 되었다.
그 아래에는 푸름의 봄이 분주하다.
그 위로는 아직 깊은 동면에 빠져있다.


봄의 웅성거림도 소용없다,
봄의 피어남도 아랑곳 하지 않는다.
나무들은 아직 한겨울 속에 있다.
동면하고 있는 나무에는 아직 겨울의 풍경이 고스란하다.
영봉을 훌쳐가는 바람이 엄동설한 같다.


선계.
범접할 수 없는 영봉이다.
그 옛적에는 그랬다.
접근의 길이 없었다.
도달할 통로가 없었다.
지극한 효심이라면 가능하였을 것이다.
영봉의 바위틈에 자라는 약초만이 병든 노모를 구할 수 있었을 것이다.
효심이 가득한 자식만이 오를 수 있었을 것이다.
그 옛적에는 그랬을 것이다.


휘이 소리만 낼뿐 바람도 머물지 못한다.
차마 그곳에는 신선만이 노닐 것이다.
차마 그곳에는 신선만이 터 잡을 곳이다.
선계로 진입하는 길이 있다면,
그곳은 아마도 여기 영봉일 것이다.
그래서 효심은 신선과 통하는 것이다.
산이 효심에 감응을 한 것이다.


영봉 오르는 산굽이를 훠이 돌아간다.
바위가 부스스 해빙을 맞이하고 있다.
우두둑 광음을 내고 있다.
올려다보는 것조차도 아련하다.
마치 꿈결에 헤매는 듯 정신이 몽롱하다.
소나무의 새순이 크레파스보다도 더 푸르다.
솔잎이 기나긴 겨울을 깨고 나온 노란 햇병아리같다.
솔잎은 세상이 그리도 조심스러운 듯 바람을 맞고 있다.
연약함이 성성함으로 자랄 것이다.


바위너머로 휘영청 가지를 늘어뜨린 소나무에 눈을 맞춘다.
적송의 가지를 잡아 보고서 영봉에 등극한다.
채워져 있는 것을 버리고서 몰아에 이른다.
인간의 몸체가 한갓 미물에 불과하다.
인간의 심사가 부질없는 것이 된다.
인간의 집착이 떨어지는 낙석 같다.
선계로 가는 길의 통과의례가 있다면 그럴 것이다.
영봉이 선계로 가는 길로 인간을 매개하고 있다.


혼절,
시간이 하염없다.
하산을 잊은지 오래다.
넋을 놓아 버린지가 까마득하다.
영봉에서 시간이 그렇게 흘렀다.
내려오면서 올려다보는 영봉이다.
먼발치에서 영봉을 올려다보면서 다섯 번은 혼절한다.


그 첫째는 영봉이 하나로 된 거대한 통바위이기 때문이다.
그 둘째는 헬기장안부에서 올려다보는 천지창조같은 장엄함이다.
그 셋째는 덕주사방향으로 접어들면서 바라보는 바다조차도 끌어올리는 기막힌 대칭이다.
그 넷째는 연꽃처럼 펼친 창대한 영봉의 손아귀에 담긴 자신을 느끼는 것이다.
그 다섯째는 차마 걸음을 뗄 수 없는 통한의 작별의 아쉬움이 너무나 크기 때문이다.


비운.
신라는 월악에서 마감되었다.
천년사직은 월악의 통바위에서 산화된 것이다.
흙의 비탈길의 거칠다.
월악의 바위길이 부드럽다.
참으로 기이한 현상인 것이다.
흙은 거칠고 바위는 부드러운 월악이다.
더 흘러내릴 것이 없는 통바위가 비단결 같다.
만년을 흘러내린 바위의 숨결이 둥글다.
사는 것이 그 정도는 부드러워야 한다는 시위같다.


덕주공주의 염원은 어디에 가고,
마의태자의 기상은 어디에 가고,
바위에 새긴 마애불만이 선혈처럼 선명하다.
신라의 비운은 온데간데 없다.
아랑곳하지 않는 오후의 햇살은 평온하다.


나무다리가 덕주사에서 마애불로 가는 통로를 연다.
그 나무다리위로 노목이 가지를 내리고 있다.
부딪히지 않게 고개를 숙여야만 한다.
나무다리에 걸친 가지가 그렇게 의미하고 있다.
그렇게 숙이는 것이 인생이어야 함을,


월악에는 나누어줄 무언가 가득하다.
눈을 뜨고 가면 풍경이 있다.
귀를 열고 가면 소리가 있다.
입을 열고 가면 침묵이 있다.
가슴을 열고 가면 탄복이 있다.


월악에서는,
그리하여 눈을 감지 못할 것이다.
그리하여 귀를 닫지 못할 것이다.
그리하여 입을 다물지 못할 것이다.
그래하여 마침내 열병처럼 가슴앓이를 할 것이다.
월악산이 품을 벌려 그 모두를 품는다.
오무린 그 품을 다시 펼치는 날에 세상은 다시 제 정신을 차릴 것이다.
월악이 보여주고픈 산의 본래는 바로 그것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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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구대학교 법과대학 학장
    대구대학교 법대 졸업
    독일 콘스탄츠대학교 법대 법학박사
    한국헌법학회 총무이사(전)
    한국비교공법학회 총무이사(전)
    한국공법학회 기획이사
    한국토지공법학회 기획이사
    유럽헌법학회 부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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