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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08-06-23 13:4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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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한나라당 전 대표는 ‘계보정치’ 즉 ‘파벌정치’를 하지 않는 정치지도자로 널리 알려져 있다. 하지만 “파벌은 무조건 나쁜 것이 아니라, 이를 잘 다루고 잘 이용하기만 하면 없는 것 보다 있는 것이 낫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당파싸움으로 점철된 지난 역사의 경험 때문에 우리에겐 파벌(波閥)에 대한 부정적 견해가 깊숙이 자리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이는 우리가 파벌을 어떻게 다루느냐에 따라서 약이 될 수도 있고 독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일본을 보자. 일본은 파벌을 너무나도 잘 이용하는 나라다. 우리는 ‘대동단결’이니 ‘일치단결’이니 하면서 파벌을 애써 외면하려 들지만, 일본인들은 이를 인정하고 오히려 이를 양성화 하여 이해관계의 조정에 이용하고 있다. 일본말 중에 네마와시(根回)라는 말이 있다.

이는 ‘뿌리돌리기’라는 뜻이다. ‘나무를 뽑을 때는 미리 뿌리를 돌려 파놓으면 잘 뽑아진다.’고 해서 생긴 말이다. 예를 들어, 어떤 단체가 단풍구경을 가기로 하여 ‘언제 어디로 가느냐?’를 정해야 하는데, 사람에 따라 속한 지역에 따라 각자의 생각이 다를 것이다. 강원도 사람들은 지리산에 가자고 할 것이고, 전라도 사람들은 설악산에 가자고 할 것이다.

그런데, 만일 이 단체에 지역에 따른 파벌이 있다면, 파벌의 리더끼리 의논해 ‘이번은 지리산으로 가고, 다음해엔 설악산으로 가자’고 사전에 의견조정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일본정치에서 자민당은 40년 이상 정권을 잡아왔다. 수상이 어느 의원을 당 또는 내각에 임명할 때는 사전에 그 의원이 소속된 파벌 보스의 동의를 구하는 것이 관례다.

한국정치와 같이 권력을 잡은 측에서 혼자서 모든 것을 독식하지 않는다. 파벌의 보스는 자파 의원들에게 경제적, 정신적 도움을 주면서 항상 결속을 다져 놓으며 (정치자금도 주고, 선거유세도 지원하면서..)문제가 발생하면 일단 파벌의 보스끼리 의논해, 합의되면 보스는 자파 의원들을 설득해 합의에 따르게 한다.

자연히 한국과 같은 정치싸움이나 헤쳐모여가 없다. 파벌이 양성화를 넘어 기능적으로 움직이는 것이다. 일본식 파벌정치에서 ‘다음 선거에서 누가 수상이 되느냐?’를 정할 때도 파벌의 보스끼리 정하면 그대로 되는 것이 다반사다. 보통은 다수파의 보스가 수상이 되지만, 간혹 보스끼리 합의가 되면 소수파의 보스가 수상이 되는 경우도 있다.

‘나까소네’ 전 수상이 그 대표적 예라고 할 수 있다. ‘나까소네’는 비록 소수파의 보스였지만 당시 자위대에 관한 법개정을 앞두고 방위청장을 지낸 바 있는 그가 적임자라는 것에 합의가 이루어져 무난히 수상이 된 경우다. 일본의 파벌정치는 꼭 히 法으로 정해 놓진 않았지만 하나의 정치수완으로써 그렇게 해왔으며 그것이 지속되면서 不文律처럼 돼 버린 것이다.

그렇다면 한국도 일본처럼 파벌정치를 도입할 순 없는 겐가? 일단, 한국도 일본처럼 파벌정치를 도입하기 위해선, 일단 정치가들이 ‘約束은 곧 法이다.’고 할 수 있을 정도의 상호신뢰 위에 타협이 어떤 것인지를 먼저 알아야 한다. 일례로, YS는 3당 합당으로 권좌에 올랐다.

그는 최소한 당내에 3개의 파벌이 존재함을 인정하고, 각 파의 보스들과 다양한 타협을 통해 당과 국정을 이끌어 가야 했었다. 하지만 불행히도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고, 결국 10년 좌파정권 단초의 원인제공자가 되고 말았다. 신의와 의리의 문제는 참으로 중요한 부분이다.

한마디로 한국정치문화에는 ‘신의’와 ‘의리’가 없기 때문에 ‘헤쳐모여~’가 다반사로 이뤄진다. 이것이 한국정치의 고질적 병폐다. “헤쳐모여~가 많다. 이것이 우리의 정치문화다.”라고만 한다면, 문제해결을 위해 “헤쳐모여~하지 말자”는 말밖엔 안 될 것이다. 그러나 “정치문화에 신의와 의리가 없기 때문에 헤쳐모여~가 빈번하다.”고 한다면, “어떻게 하면 신의와 의리를 회복할 수 있을까?”를 생각해 보게 되어 문제해결이 한발 앞으로 나갈 수 있을 것이다.

‘헤쳐모여~’ 그 자체가 정치문화가 아니라 ‘헤쳐모여~’를 하게 된 문화적 바탕이 곧 정치문화인 것이다. 20세기 초 영국의 정치학자 ‘그라함 월라스’는 국회의원이 되고 나서 “실제로 정치를 해 보니 국회를 연구하는 것보다 국회의원을 연구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는 ‘국회의원이 어떤 문화적 환경에서 어떻게 성장 했느냐’라는 것이 ‘국회법 보다 더 중요하다’는 뜻이다.

한국정치문화의 수준, 5천만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맡길 대통령조차 어떤 환경에서 자라나 어떤 교육을 받고 성장했는지도 모르고, 일시적 단편적 현상에 편승해 그저 말 잘하고 인기 좀 있다고 막도장 찍듯 찍어버려 주는 것이 오늘날 한국정치의 서글픈 현주소다.

오래 전, 어떤 정치학 박사가 국내에서도 알아주는 권위 있는 월간지에 쓴 글 중에 ‘윤리도덕과 같은 政治外的인 德目을 추구하는 정치적 낭만주의’라는 말이 있어서 얼마나 웃었는지 모른다. 정치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한심한 정치학자, 이들이 한국정치의 터줏대감 행세를 하며 정치지망생들을 견인해 왔으니 오늘날 한국정치문화가 이 모양인 것은 당연한 것이다.

고대 그리스 시대 학자들은 ‘정치는 윤리적 最高善을 실현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것은 ‘사회를 윤리 도덕적으로 합당하게 다스리는 것이 정치’라는 뜻이다. 본래 정치학은 윤리학, 철학, 신학 등과 더부살이를 해오다가 중세 말이 되어서야 비로소 독자적 학문이 된 것이다.

그런데 ‘도덕’을 ‘정치외적인 덕목’이라니? 개탄할 일이 아닐 수 없다. 정치를 도덕과 관계없이 권모술수로만 바라보는 바보 같은 정치학자들이 낳은 바보 같은 정치인들이 판치는 삐뚤어진 정치판, ‘싫으면 헤어져야지, 싫어도 같이 산다는 건 비인간적이고 비합리적이다.’고 해도 말이 되고 ‘싫어도 서로 이해하고 노력해서 같이 살아야지, 싫다고 곧장 헤어지는 것은 이성적 행동이 아니다.’고 해도 말이 되는 정치판이다.

한국정치문화, 한국정치판이 이래서는 안 된다. ‘인간의 참된 행복은 나 혼자 잘 먹고 잘 사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더불어 살며 봉사와 희생으로 보람을 느끼는데 있다’는 곳, 그곳이 ‘정치적 낭만주의’의 본향이다. 본향으로 돌아가고픈 인간의 귀소본능(歸巢本能), 우리의 본향 보금자리에는 ‘이성이다’ ‘합리다’하면서 결코 날뛰거나 따지려들지 않는다. 마누라의 신경질도 받아주고 자식들의 재롱도 받아주며 오직 가정이란 큰 힘에 안기고 싶은 낭만 만이 존재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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