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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08-09-12 15:3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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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야산(해발 930,7미터)

가을은 낙엽에서 시작한다.
산은 바위에서 마무리된다.
사람은 외경심이 본성이다.

낙엽이 아름답다.
그 첫째는 쌓여가기 때문이다.
그 둘째는 내년을 열기 때문이다.
낙엽은 낱개가 되어 지상으로 낙하하지만,
낙엽은 쌓여서 산하를 뒤덮는 것이다.
나무들은 낙엽을 자양분삼아 내년에 새싹을 피운다.
낙엽은 오늘 자신을 바쳐 내일을 여는 것이다.

한 생명이 떠오른다.
대야산 산행의 시도는 여러번이었다.
몇 번이고 오르려고 한 산이었다.
몇 해전이었다.
산을 오르려는 뭉클거림이었다.
그 마음을 주체하지 못하고서,
한 여름의 뙤약볕을 아랑 곳하지 않고서,
대야산의 초입에 접어들었다.

작열하는 햇살이 인연이었을까.
그 넉살좋은 바위에 잠시 휴식을 취한다.
계곡이 맑아서 그 깊이를 알지 못한다.
물의 소용돌이를 바라다 본다.
물살을 타고 내려오는 어린이를 본다.
동력의 작용을 못 알아챈 아이이다.
계곡물의 소용돌이가 그 아이를 삼켜버린 것이다.
마치 불가항력처럼 다시 물 위로 떠오르지 않고 있었다.
나는 본능적으로 물에 첨벙 뛰어 든다.
꺼져 가는 그 아이의 생명을 구한 것이다.
대야산의 인연이다.

옷이 젖었다.
핸드폰을 망쳤다.
달려온 보호자가 연신 고맙다한다.
연락처를 주면서 연락을 하라 한다.
더 이상 연락을 하지 않았다.
나 한테의 감사가 아니라
나중에 이 사회에 감사하는 사람이 되기를 바라면서,

용추계곡입구에 선다.
오른편으로 난 샛길로 접어든다.
용추계곡이 신작대로라면,
오른 편의 길은 약초꾼의 흔적이 전부인 샛길이다.
그 길 위에 쌓인 낙엽이다.
한 사람에게 터 주는 좁은 산길이다.
잘 익은 꿀밤이 싱그럽다.
아침의 이슬이 영롱하다.
막 잎새를 떠나기 직전의 뭉친 이슬이다.
이슬은 잎새를 떠나는 순간에 제일 영롱한 것이다.
그렇게 생명을 물뿜으면서 마감하는 것이다.

새들이 난다.
인적은 도통 만나지 못한다.
"천산에 새들은 나는데 인적은 멸하고 없다"없다는 두보의 시가 떠오른다.
어디 떠오른 것이 시뿐이랴.
상념이 되고,
망상이 되고,
아집이 된다.
산길 접어들면 그 모두가 허망한 것이 된다.
마음에 산 하나만 담으면 되기 때문이다.
새들의 날개짓에 놀란 다람쥐를 본다.
도토리가 넉넉하다.

산의 비책이다.
산은 그 자체가 완비된 것이다.
산은 자신만으로도 모든 것을 다 갖추고 있다.
침입으로부터 방어가 가능하다.
배고픔에 소용되는 양식을 제공한다.
대야산에 산의 비책을 본다.
산 자체가 숨어있어 방어가 되며,
싹피우고 열매맺는 모든 것으로 생명이 풍성하다.
대야산이 팔을 벌려 애워싼 산세가 그렇다.
동쪽으로 길게 팔을 벌리고 있다.
모든 자식을 다 품어주는 세상에서 제일 큰 어머니 품같다.

바위에서 절제를 본다.
바위가 아름다운 이유는 절제이다.
세월이 그렇게 만든 것이다.
억겁의 세월을 견디는 지혜이다.
바위에는 군더데기가 없다.
깎이고 헤져서 다 버리고서 더 버릴 것이 없는 바위이다.
대야산의 바위에서 절제를 본다.
그 바위 위에 앉아 한숨 들이킨다.
산의 공기가 다를리 없지만,
바위위에서 호흡은 그 정갈함에서 다르다.

촛대바위에 이른다.
그 모양새 때문에 작명된 것은 아니리라.
우뚝솟아 산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촛대바위가 자신을 밝혀 산을 좌우로 거느리고 서있다.
오른 쪽으로 곰넘이봉이다.
왼 쪽으로 대야산의 정상이다.
촛대바위에서 발을 헛디디면 그 끝자락을 알 수 없다.
급전직하 낭떠러지를 본다.
내려가서 올라야 하는 정상이다.

수직상승의 바위이다.
정상이 목전이다.
가파름이 험난하다.
호락하지 않을 기세의 바위를 만나다.
올려다 그 끝지점을 볼 수도 없다.
혼자 온 것의 선택에 고마워한다.
나바론의 요새를 오르는 듯 아찔하다.
동행으로는 오를 수 없는 산세이다.
내려보는 것은 더 아찔하다.
절제의 바위앞에 절망으로 아연한다.
산에서 혼신의 힘을 쏟는다.
겨우 절벽을 넘어 선다.
그래도 산이 좋은 것이다.

정상에 턱선다.
햇살이 쏟아진다.
박수를 보내는 찬사같다.
솔바람이 분다.
일렁이는 들판의 결실같다.
가을 푸름이 청아하다.
천의무봉같은 조망이 끝없다.
사방으로 눈을 튀우는 시선 둘 곳을 찾지 못한다.
사방이 다 공평하게 절경인 것이다.
바위가 그렇다.
소나무가 그렇다.
굴참나무의 군집이 그렇다.
자연이 압도하는 풍경이다.
사람이 압도당하는 운치이다.

밀재방향으로 내려온다.
부채바위의 영험함을 떠올린다.
바위가 함선같다.
고물과 이물로 나누어 모양새를 만들고 있다.
행여 사공이 많아서 산으로 온 배인가 보다.
그 함선같은 바위에서 죄정한다.
무엇을 더 볼 것이며,
무엇을 더 채울 것인가.
바위의 절제처럼 말을 절제한다.
언어를 잃어 묵언이다.
생각이 부끄러워 묵상이다.

갈림길의 피아골을 지나친다.
한밤의 달빛을 비추는 월영대에 이른다.
계곡과 달이 하나가 되듯이,
몰아일체가 된다.
용추계곡 위에서 장엄하게 연출되는 풍경의 향연이다.

산정에 바위가 절제로 자기표현을 하고 있다면,
용추계곡의 바위는 비단같이 부드러운 속살로자기표현을 하고 있다.
용의 휘날림을 표현한 바위이다.
용추계곡은 환상이다.
용추계곡에서 마음을 씻는다.
이른바 최치원이 바위에 남긴 세심대가 있어 더욱 그러하다.
계곡이 너무 고와 차마 마음조차도 씻기 부끄런운 것이다.
용추계곡을 바라보는 마음에 외경심이 일고 있다.
외경심으로 끝맺는 산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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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극원 취재기자 정극원 취재기자의 다른 기사 보기
  • 대구대학교 법과대학 학장
    대구대학교 법대 졸업
    독일 콘스탄츠대학교 법대 법학박사
    한국헌법학회 총무이사(전)
    한국비교공법학회 총무이사(전)
    한국공법학회 기획이사
    한국토지공법학회 기획이사
    유럽헌법학회 부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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