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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09-09-22 12:2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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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처 : 환성산 봄 이미지 산악랜드
환성산(해발 811.2미터)-초례봉(해발 635.7미터)


하늘이 시련을 내리는 것은,
그 사람의 소용됨을 알기 위함이다.
그러나 인간은 아니 참고서 하늘 탓을 한다.
하늘이 푸른 창공을 내리는 것은,
어진 사람에게 선한 깨우침을 주기 위함이다.
그러나 인간은 아니 깨치고서 하늘 원망을 한다.


가을의 초입에 환성산에 접어든다.
아스라이 능선에 맞닿은 공제선이다.
하늘이 오래 지체시킨 푸른 창공을 내보이고 있다.
하늘이 내린 창공이 하늘과 산의 접점을 만들고 있다.
하늘이 내린 창공이 사람의 심금을 울리고 있다.
어진 사람은 그 올려다봄만으로도 선행을 동기할 것이다.


산의 경사면 한 부분을 채운 통바위가 환성산의 징표가 된다.
그 바위가 환성산의 이름으로 먼 들판까지도 호령한다.
먼 들판에서도 그 바위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말을 못하는 바위가 아닐 것이다.
바위는 다만 침묵을 하고 있을 뿐이다.
다만 가벼운 인간이 그 의미를 해독하지 못할 뿐이다.
환성산의 통바위가 말하려고 하는 것은 아마도 묵묵함일 것이다.
환성산의 통바위가 보여주려고 하는 것은 아마도 가볍지 않아야 함일 것이다.


산은 지난한 더위를 뒤로 하고서 가을에 접어들고 있다.
산이 가을에 접어들어 보내는 가장 맑은 기운을 감지한다.
속깊은 폐부조차도 쏴아 하고 트여지는 맑은 느낌이다.
오차를 줄이는 과학으로는 도무지 감지하지 못하는 기운이다.
휴식하기 좋은 양경사면의 대칭을 이룬 능선길의 바위에 앉는다.
묵묵하여야만 바위의 언어를 들을 수 있는데,
몸을 훌치고 가는 바람결의 시원함만으로도 고마움이다.


목전의 풀숲을 헤치고서 환성산의 정상(해발 811.2미터)에 선다.
정상은 더 오를 곳이 없어 궁극이 되는 것이다.
정상은 내려가는 것을 예견하는 종결이 되는 것이다.
환성산의 정상은 마침을 이끌어 내는 종착이 아니다.
환성산의 정상은 연결로 소임을 다하는 교차점이 된다.
환성산 정상에는 무소불위가 아니라 겸허의 기운이 넘쳐나는 것이다.


환성산의 샘물이야기 하나가 떠오른다.
80년대 초반은 무소불위의 권력이 전횡되던 세월이었다.
그들의 통제와 강압의 방식에는 거칠 것이 없었다.
의심되어 잡히는 자는 거침없이 삼청교육대로 끌고 간 것이다.
하양에도 어깨의 힘으로 지난 세월을 살았던 한 사람이 있었다.
절박하여 도망한 곳이 바로 환성산이었다.


산의 그 끝간데가 없는 포용력을 예나 지금이 변함없다.
환성산 정상 아래에 맑게 솟아나는 샘물을 발견하였다.
마을로 내려갈 수 없는 그의 생명선은 오직 샘물이었다.
긴 도피를 마치고서 마을에 내려갔을 때에 그의 얼굴은 귀공자처럼 보였다.
샘물의 효험이 인간의 나이조차도이 젊어지게 만든 것이다.
그는 다시는 어깨로 살지 않겠다는 다짐을 하고 개과천선하게 되었다.
샘물이 생명하도록 자양분만 준 것이 아니라 인간까지 만들어준 것이다.
큰 장사가 될 이윤에 눈먼 인간들이 그 샘물을 찾아 헤매였지만 허사였다.


낙타봉의 경치가 한 폭의 그림 같다.
높은 내공을 쌓은 도인만이 몽환에서 만날 풍경같다.
바위의 난간에 기대어 내민 솔가지가 크레파스채색보다 더 푸르다.
파란 솔잎이 세상에 단 하나뿐인 파란 낙타의 눈썹같다.
낙타봉의 돌에 걸터앉아서 그 막힘이 없는 사방을 둘러본다.
그 능선이 너무나 부드럽고 너무나 안온하여 서로 마주 보는듯 하다.
비교하는 것이 허용될 수 없는 산의 능선이이지만,
투정부리는 어린애의 호사처럼 말한다면 낙타봉의 절경에 엄지를 든다.


나무의 생명력에서 고결한 아름다움을 본다.
방비를 하지 않는 산에 몰아치는 폭우와 풍파는 세차다.
인력의 작용조차도 무색하게 하는 폭우가 쓸어간 토사이다.
산의 난간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나무가 처절하게 생존하고 있다.
자신이 뿌리를 내린 흙을 다 잃어버린 나무뿌리가 엉켜서 줄기가 되었다.
폭우와 풍파를 이기고 있는 나무의 생존에 넋을 잃고 쳐다본다.
산은 그런 나무에 의하여 원형을 지켜나가는 것인가 보다.


오래 감추어 둔 그리하여 더 감추어야 하는 산의 속살을 본다.
낙타봉을 지나서 초례봉에 당도할 즈음의 산능선에서 뒤돌아본다.
환성산의 기운이 타고 내리는 산능선의 소나무들을 본다.
먼 발치에서는 도무지 볼 수없는 깊은 경사면의 푸르름이다.
소나무의 촘촘함이 작열하는 여름뙤약볕에 영그는 포도송이 같다.
어깨를 나란히 하여 더 무성한 소나무가 지혜롭다.
환성산의 속살이 인간들에게 공조하고 조화하라는 지혜를 일갈하고 있다.


그 어디라 하더라도 산의 바위는 겸허하다.
초례봉(해발 635.7미터)이 전설을 않고서 고혹하다.
우뚝 솟아 스스로를 지키는 것조차도 힘겨운 봉우리이다.
거기에다 세세를 거듭하면서 더 윤색되어지는 태조왕건의 전설까지 품고 있다.
태조 왕건이 초례봉에 아래에서 혼례를 치룬 것이다.
그 맹세의 인걸들은 어디에 가고 봉우리 혼자 남은 것인가.
초례봉은 어느 산과는 달리 바위들이 떠 밭치고 있는 것이다.
바위가 초례봉 전체를 밑에서 위로 밭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 바위는 단 한 번도 자신의 이름을 내세운 적이 없다.
초례봉이 오직 바위에 의하여 지탱되는 것인데,
정작 바위는 단 한 번도 자신의 이름조차 호명되기를 원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니 세상에 이 보다 더한 겸허가 이디에 또 있을 것인가.





[덧붙이는 글]
환성산 봄 이미지 출처: 산악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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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구대학교 법과대학 학장
    대구대학교 법대 졸업
    독일 콘스탄츠대학교 법대 법학박사
    한국헌법학회 총무이사(전)
    한국비교공법학회 총무이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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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럽헌법학회 부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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