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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09-08-03 22:3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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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을 가둔다.
생활의 모든 것이 옹졸하여 진다.
생각을 연다.
생활의 모든 것이 관대하여 진다.

바람이 부드럽다.
바람은 들판에 불고,
꽃은 산에서 핀다.
바람결에도 개화하는 꽃이다.
미처 기상하지 못하고서,
잠에 취하여 있었던 꽃이다.
바람을 만나서 피어나는 것이다.
긍정의 변화인 것이다.

창공이 푸른 비취같다.
푸름은 하강에 친하다.
저 홀로 높아져 잉태한 푸름이다.
한 켠에 품은 더불어 있고 싶은 소망이다.
그리하여 내려와서 머무는 것이다.
푸름의 내보이는 하강의 아량인 것이다.
창공이 잠시도 가만히 머물지 못하는 바람을 잡는다.
산에서 바람이 멈추는 이유이다.

목탁소리이다.
물의 고요를 깨트리는 돌팔매같다.
통바위에 얹혀 있는 석천암이다.
그 풍경이 가히 경이롭다.
그 크기를 가늠할 수 없는 통바위이다.
너무나 거대하여 헤아려 내지 못한다.
석천암의 통바위에 바람이 멎었다.
창공에 맞닿은 통바위이다.
통바위를 타고서 하늘이 석천암에 머문다.
하늘의 뜻을 살피려는 석천암이다.

통바위부처이다.
그런 형상의 불암산(佛岩山)이다.
고개를 흔들어 긍정을 묻는다.
가파름을 오르고 싶은 것이다.
바위가 그저 묵묵하다.
등정을 허락하는 긍정으로 여긴다.
그것은 곧 아전인수인 것을,
마땅히 손잡을 곳도 없는 등반이다.
질린 듯이 손을 파르르 떤다.
약 50미터의 통바위를 그렇게 오른다.
매순간순간이 아찔한 오름이었다.
손을 놓치면 추락인 것이다.
호락호락하지 않는 부처바위다.
통째로 산을 만든 통바위에 마음이 숙연하다.
부처앞에 서는 마음이 그러한 것이다.

불암산 정상에 선다.
거대한 통바위이다.
하강을 마친 창공을 대면한다.
푸른 창공이 전할 말이 있는가 보다.
정상에 서는 것이란 빠져드는 것이다.
영욕도 허장성세가 다 소용없는 것이다.
정상의 창공속에 깊이 빠져든다.
빠져들어도 창공이 전하는 말의 의미를 듣지 못한다.
세사에 일희일비하는 속좁은 마음을 비우라는 것인가 보다.
한낮을 강타하는 무더위이면 어떠하랴.
아스라한 풍경을 선사하는 주능선이 저기면 어떠하랴.
불암산의 정상에 있다는 것이면 족한 것이다.

여정이 남았다.
주능선의 굽이에 수락산이 있다.
옛적에는 호랑이가 이용했을 것이다.
호랑이의 전용길이었을 것이다.
뭇짐승들이 알아서 처신했을 것이다.
창공보다도 더 우거진 푸른 숲이다.
접어들어 나아갈 길을 잃기 십상이다.
인간의 모습이 원래 그리도 미약한 것이다.
사는 것의 의미가 또한 그러한 것임을,
처음에 잘 접어들면 인생여정은 늘 푸른 것이다.

직녀바위가 멋깔스럽다.
수락산 정상으로 가는 통관절차이다.
베틀은 온데간데 없고,
단애같은 난간을 타고 오른다.
직녀바위의 암벽이 가파르다.
눈을 감고서 직녀의 숨결을 찾는다.
사랑은 항상 머물러 있는데,
사람은 떠나가는 것인가 보다.
언젠가 바람을 타고서 견우가 찾아올 것이다.
떠나갔으니 돌아오는 것은 섭리인 것이다.
그 때에는 직녀바위가 흥에 겨워 춤출 것이다.
서울이 다시 용솟음으로 꿈틀될 것이다.
서울이 직녀의 비단으로 휘장을 두를 것이다.

무소의 뿔이 연상된다.
수락산정상이 그렇게 솟았다.
세월의 풍상에도 견딘 것이다.
그렇게 견딘 까닭은,
아마도 서울의 용솟음을 증명하고 싶은 것이다.
산정을 때리는 세찬 바람이다.
제 갈 곳을 찾아온 바람이다.
수락산 정상에서는 바람조차도 그렇게 긍정하고 있다.
정상에 서서 생각을 활짝 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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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극원 취재기자 정극원 취재기자의 다른 기사 보기
  • 대구대학교 법과대학 학장
    대구대학교 법대 졸업
    독일 콘스탄츠대학교 법대 법학박사
    한국헌법학회 총무이사(전)
    한국비교공법학회 총무이사(전)
    한국공법학회 기획이사
    한국토지공법학회 기획이사
    유럽헌법학회 부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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