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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08-08-12 13:44: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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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백산 국망봉(해발 1420.8 미터)

오래 기다려야 가는 산이 있다.
마음의 변덕이 아니라 상황의 변덕때문이다.
큰 산은 언제나 변덕을 부린다.
자신이 아우르는 넓은 영역에서 일어나는 세세한 일들조차도 다 평정하여야 하기 때문이다.

오늘 그 인간의 변덕 때문에 미루어 놓았던,
산의 변덕을 부리는 소백산을 향한다.
초암사를 기점으로 국망봉에 이르는 지름길을 택한다.
초암사에서 좌측에 만나는 계곡이 퇴계 이황선생이 명명한 죽계9곡이다.
담아야 하는 아름다움의 극치를 고스란히 담고 있는 계곡이다.

어제 쏟아 붓고서 훌 떠난 소낙비에 불어난 물이 웅장하다.
그 흐르는 위용으로 계곡이 소란하다.
명경지수가 바로 여기이다.
여름더위의 시원함을 선사하려고 밤새 정수를 마친 듯하다.
탁한 색깔이라곤 없는 맑은 물들이 콸콸 흘러내린다.

시간은 바위도 뚫는다.
시간에 가미된 흐르는 물은 바위웅덩이도 넓힌다.
웅덩이에 가득 맑은 물이 흐름을 이어가면서 고여있다.
이름하여 선녀탕이다.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가 있었다.
나무꾼과의 전설같은 만남을 기대하면서 시야가 확 트인 곳에 옷을 고이 벗어 놓고 목욕을 하고 있었다.
어디선가 나타난 나뭇꾼이 선녀가 벗어 놓은 옷을 본체만체 지나쳤다.
몹시 화가 난 선녀가 나뭇꾼에게 말을 하였단다.
"왜, 옷을 안 집어 가세요?"
나뭇꾼이 대답하였다.
"나는 그 나뭇꾼이 아니고 금도끼 은도끼 나뭇꾼이거든요."

산에는 음미가 있다.]
그래서 웃음도 미소이다.
한바탕 크게 박장대소를 하고 나니 국망봉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가볍다.
웃는 얼굴 가벼움이 결코 걸음 가벼움은 아니지만 이 순간 그저 가벼운 것이다.
굴참나무며, 박달나무가 하늘은 가리고 있다.
나무의 틈새로 부채 빗살을 그리면 지상으로 내리 달려온 햇살이 외롭다.

가파른 능선 하나만 더 오르면 국망봉까지 1.1키로 지점인 봉두암이다.
만년세월에도 변형을 하지 않는 위세로 서 있는 바위이다.
걸음 하나를 옮기기가 무섭게 장대비가 막무가내로 쏟아 붓는다.
아직은 젊은가.
아랑곳하지 않고 더 서둘러 정상으로 오른다.
가만두지 않겠다는 듯이 더 굵은 비가 얼굴이며 온몸을 때린다.
하늘을 가린 나무를 우산삼아 피하여 보지만 30분 이상을 그렇게 장대비가 내린다.
나중에 알게 되겠지만, 산 초입에는 비 한 방울 안 내렸단다.

산이며 바위며 나무가 세면을 마치고 웃고 있다.
변심하지 않고 버틴 우리들도 비에 흠뿍 젖은 몰골을 하고서 웃는다.
소백산이 비로소 자신을 찾은 탐방객을 영접하려는 듯 창공 맑음을 선사하고 있다.
봉두암앞 넓은 평면의 바위 터에 서서 물 한 모금 크게 삼킨다.
봉황의 머리형상을 하고 있는 바위라 그렇게 이름 부른다.

바위의 거대함 위로 세월의 하얀 채색을 본다.
구름처럼 하얀 얼굴을 하고서 몸을 파르르 떨면서 추위를 느낀다.
봉두암에서 국망봉으로 이르는 1.1키로의 길이 제일 험난한 오름길이다.
세상에 오름이 험난하지 않는 것이 어디에 있겠는가.
그 중에서도 산에서의 험난한 오름만이 제일 평화롭다.
산은 그 오름에 다 이르러도 그 누구에게도 상처를 주지 않는 것이다.

여우자적을 잠시 접어둔다.
멀리 오래도록 지치지 않는 보폭으로 다시 오른다.
금세 장대비에 젖은 옷이 다 말라버린다.
비가 땀에 용해되어 버린 것인지, 땀이 주룩 흐르는 산오름이 바로 등산의 묘미이다.
그 호흡에 산의 기운들을 저절로 다 나안에 체류시킬 수가 있으니 말이다.

확 트인 능선의 개활지에서 맨 먼저 하늘을 올려 본다.
눈을 좌측으로 돌려 안개에 잠긴 비로봉(해발 1439.5미터)의 묵묵한 위용에 탄성한다.
지척에 올려다 보이는 국망봉에 이어지는 나무계단에 묻어있는 사연의 빛바랜 채색을 본다.
문득 바위틈에 나즈막한 햇 노란 구절초의 꽃피움을 보게 된다.
그 언젠가 들은 소백산에서 처음 만나 손잡은 여인이 구절초를 꺾어 오겠다면서 사라졌던 사연을 들려주던 어느 산인의 이야기가 갑자기 미소와 함께 떠올려지고 있기 때문이다.

소백산에는 해석은 없고 전설은 있다.
그 장엄한 산을 치졸한 인간이 감히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장대비를 쏟으면 맞고 안개가 뒤덮히면 집중하여 길을 찾으면 될 테고,철이 되어 철쭉이 온 능선을 다 붉게 물들이면 감탄하면 된다.

국망봉에는 전설이 있다.
산자락에 살던 심성착한 대장장이에게 퇴계선생이 그 행실의 착함에 대하여 칭찬을 하였다.
그 대장장이는 퇴계선생이 죽은 후에 국망봉에 올라 3년 상을 치루었단다.

아쉬워라!
비로봉을 앞에 두고서 다시 쏟아 붓는 장대비다.
산을 온통 뒤덮고 있는 농무에 연유하여 서둘러 하산을 한다.
소백산이 부르기도 전에 다시 올 것이라는 다짐의 예약을 한다.
그 때에는 비로봉이 먼저 환한 대답을 할 것이다.

산에서는 경험만이 알게 한다.
그 길이 멀고 가깝고의 문제가 아니다.
그 산의 장엄함에 의하여 몸이 느끼는 곤함의 농도가 다르다.
소백산이 몸에 주는 곤함을 벌써 듬뿍 느낀다.
명산의 기운에 몸의 기운을 다 바치고 내려오는 하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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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극원 취재기자 정극원 취재기자의 다른 기사 보기
  • 대구대학교 법과대학 학장
    대구대학교 법대 졸업
    독일 콘스탄츠대학교 법대 법학박사
    한국헌법학회 총무이사(전)
    한국비교공법학회 총무이사(전)
    한국공법학회 기획이사
    한국토지공법학회 기획이사
    유럽헌법학회 부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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