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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08-11-18 14:13: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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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봉산(충남 예산·홍성, 해발381미터)


쌓는다.
계곡에 접어 들면,
돌이 흔하니,
탑을 쌓는다.
쌓는 동안에는,
마음을 가눌 수가 있다.
가누는 마음이 정갈하다.

쌓는 것에 비례하여,
혼돈이 꼬리를 내린다.
그러하니,
하늘을 향하여서도,
들판을 걸으면서도,
산길을 오르면서도,
쌓고 또 쌓으려고 한다.

쌓다 보면,
그 무엇이라 하더라도,
비록 세상에 남기는 것은 못되고,
궁극에는 사라지는 것이라 하더라도,
그 과정은 남는 것이다.
산에서의 걸음이 그러하다.

수암산(260.1티터) 초입에 접어든다.
오른쪽으로 휘이 방향을 꺾는다.
보살입상을 참배한다.
미간을 타고 흐르는 천년세월이다.

응시한다.
수평에 시선을 둔다.
차분한 인간의 눈높이다.
용봉산이 저기에 아스라하다.
용봉산 저기로 갈 길이 멀다.
올려다 본다.
수직에 시선을 둔다.
수암산이 친근하다.
수암산의 바위가 부드럽다.

하늘에 맞닿은 바위이다.
견고한 통문같이 우뚝하다.
바위가 빗장을 열어준다.
마치 프리즘같다.
바위의 프리즘을 통과하는 시선이다.
안타까움이다.
한 눈에 다 보기에는,
수암산의 세월이 너무나 장구하다.
수암산의 바위가 너무나 수려하다.

내려앉는 것이 바위의 속성이다.
용봉산에서는 바위가 솟아 오른다.
그러하니 얼마나 기묘한 경관인가.
아득한 세월이 흘렀다.
영겁의 세월이었다.
바위가 그 세월의 주역이었다.
이제 지상에서 절경을 접고서,
하늘에 오르려는 채비같다.

바위의 형상이 제각각이다.
산능선의 돌고래바위도,
산경사면의 광개토대왕비바위도,
창공에 맞닿은 톱날바위도,
산중턱을 가로놓는 병풍바위도,
덩달아 악기봉이 요동한다.
바람결을 타고 연주를 시작한 것이다.
바위들은 지상의 그 선율을 따라,
천상에 오르려는 거대한 출발선에 섰다.
영겁의 세월을 기다린 이유가
아마도 악기봉이 울리는 선율이었나 보다.
그 장관의 순간을 목도한다.

쌓으려는 적선의 덕인가 보다.
청아한 공기가 지천이지만 숨이 막힌다.
걷기에 순탄한 길이지만 미동도 할 수가 없다.
움직이지 말라는 하늘의 뜻일 것이다.
전율하여 가슴이 터질지라도 지켜보라는 명령같다.

일렁인다.
미풍이 작동한다.
산의 푸름이 바다같다.
노적봉에 햇살이 작열한다.
노적봉이 거느린 앞마당 같은 평지에 선다.
푸름의 풍경이 상생한다.
산은 내리달려 들을 향하고,
들은 산으로 이어달려 편안하다.

노적봉에서 들을 바라다본다.
홍천의 풍경이 이국같다.
적요때문인가 보다.
인간의 군집은 드물고,
자연의 평정은 넓디 넓은 것이다.
몇 채 보이지 않는 인가에도,
그 집채를 다 뒤덮은 푸름이다.
인간의 흔적은 자자들고서,
펼쳐진 들판은 광활한 것이다.
그것이 인간과 자연의 원래적 상생인 것이다.

정상에 솟은 바위이다.
용봉산이다.
기대면 넘어질 듯 표지석이다.
알 수 없는 미궁에 빠진다.
용이 봉황을 만난 것인지,
봉황이 용을 만난 것인지,
그 형체를 보고서도 연역해내지 못한다.

서로를 향한 사모였을 것이다.
진실로 사모하였으니,
세월이 아깝지 않은 것이다.
진정으로 사모하였으니,
펼치는 품이 너무나 광대한 것이다.
애틋하게 사모하였으니,
바위들이 빚은 그 형상이 너무나 애절한 것이다.

용봉산의 바위가,
하늘로 향하여 채비하고 있는 까닭은,
사모하는 그 마음이 너무나 고결하기 때문인가 보다.
용봉산의 바위마다 맺힌 애절한 풍광에서,
인간이 취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음을 안다.
물욕에 좌우되는 인간이,
그 고결한 사모를 알 까닭이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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