쥐를 그리는 사람의 모습에 웃을 사람도 있다는 것
- 타인의 인격과 명예에 손상을 주는것은 표현의 자유도 예술도 아니다...
쥐 그림 소송에 맞물려 한 여배우가 티셔츠에 쥐 그림 운동을 전개하고 있다고 한다. 이런 사건들이 발생하면 공식처럼 등장하는 대응법은 표현의 자유 운운이다. 그 다음에는 영화인, 예술인 등이 등장하여 힘을 보태준다. 그리고 표현의 자유를 찬미한다.
사람의 심리란 이상해서 사람을 희화화 시켜 비아냥거리거나 돌을 던지는 집단에 속해있길 원하는 경향이 있다. 그것은 인간의 약한 속성을 자극하기 때문이다. 비단 누군가의 일만은 아니다.
젊기에 표현의 자유를 만끽하고 싶다면 우회하지 않는 당당함 그리고 그것에 가치를 두어 표할 수 있는 극적 사실감의 미학 같은 것이 더 멋질 것인데 그러지 못하고 기껏해야 동물을 상징하는 그림으로 조소를 표현하는 것을 운동과 큰 용기로 착각하는 사람들이 있어 우려를 금할 수 없다.
제대로 된 비판을 하라는 이야기가 아니라 비판을 하려면 얼마든지 다른 방법이 있다는 이야기다. 그리고 그 방법의 선택이 잘못됐다면 사람들은 그것을 만용이라 부른다.
정책상의 그 어떤 잘잘못을 따지기 전에 그 권위는 국민들이 표로 만든 것이다.그 권위를 스스로가 부정한다면 쥐 그림을 그리고 있는 바로 그 사람의 모습을 보며 웃을 사람도 있을 것이다.
말하지 않아도 쥐가 무엇을 상징하는지 그것이 어떤 의미를 담고 있는지 통용되어지는 의미로 사람들은 이미 안다.
누구나 쥐를 그릴 수 있으나 그것이 특정인에 대한 멸시와 조롱을 연상케 한다면 그것은 자유가 아닌 이성이 취한자의 객기인 것이다.
누구나 글을 쓸 수 있는 시대...자유가 무엇인지 모르며 단지 누리는 것만이 자유라 생각하는 국민의 자유, 킬 것 내의 이성적인 자유 안에서 결코 자유로워 질 수 없는, 가벼움에 멍들어가는 국민의 자유를 보다 가치 있게 사고하게 할 지성의 목소리는 공인들이 희화화되는 재미라는 몰려들기 속에 제 역할을 못하고 있다.
또한 자유 아닌 자유를 걸러낼 만한 젊은이들의 주관과 사상이 없다는 것은 그 어떠한 훌륭한 정책이 있다 해도 한계 상황에 놓이게 할 것이다. 이러한 일들의 유일한 대안은 소셜네트워크의 소프트웨어의 새로운 판짜기일 수밖에 없다.
누구든 무엇이든 쓸 수 있는 자유방임형의 소프트웨어가 아니라 자유에 대한 책임을 묻게 하는 소프트웨어의 사용자 구성이 필요한 것이다. 그러한 것을 만들기 위해 선행되어야 할 것은 자유에 대한 의미 규정인데 그것으로 단어싸움만 할 시간은 없다.
자유에 대한 의미 규정만 사회적인 합의를 이룬다면 그것으로 새로운 판을 짜는 것은 개발자들의 몫이다. 비판은 있을 수 있다. 그리고 방법의 문제로서 자유를 인정받을 수도 있다.
그러나 타인의 인격과 명예에 심리적 위해를 가하는 것은 표현의 자유도 예술도 아니라는 자유에 대한 모두의 인식과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