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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10-12-19 11:55: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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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의 실체적 진실이 속속 밝혀지고 있는 가운데 공적 관심사와 관련한 명예훼손의 적용 범위를 놓고 법리공방이 치열하다.

17일 수원지방법원 안양지원 형사합의부(재판장 이현종) 301호 법정에선 5·18 부상자회 신경진 씨의 고소에 따라 지만원 씨에 대한 '5·18 명예훼손 사건' 결심공판이 있었다.

이 사건은 지 씨가 자신의 홈페이지인 시스템 클럽에 올린 글이 5·18 부상자와 유족의 명예를 훼손했다는 5·18 부상자회의 고소에 의해 재판이 시작됐다.

지 씨가 게시한 글은 다음과 같다.

"10·26, 12·12, 5·18, 김대중 내란음모, 1995-97년에 걸친 역사바로세우기 재판 등의 기록을 열람한 뒤 이 모든 기록들을 보면서 필자는 5·18은 김대중 등이 일으킨 내란사건이라는 1980년 판결에 동의하며, 북한의 특수군이 파견돼 조직적인 작전지휘를 했을 것이라는 심증을 다시 한번 갖게 됐다"

"탈북자들의 증언에 의하면 '경상도 군인들만 추려서 전라도 사람들 씨를 말리려 왔다', '임신부의 배를 군화발로 짓이겨 태아가 빠져나왔다', '군인이 대검으로 여대생의 유방을 도려내고 껍질을 벗겼다'는 이런 자극적인 유언비어는 북한대남사업부 전문가들이 내려와 만들어 뿌린 것으로 추측된다. 일반시민이나 학생들이라면 기상천외한 유언비어를 만들지 못했다고 본다"

이날 재판에 피고인측(지만원 씨) 증인으로 나온 5·18 당시 제1차로 투입됐던 제7공수특전여단 35대대 김일옥 前 대대장은 "35대대 예하 3개 지역대장 중 2명이 전라도가 고향이었다"고 진술했다.

김 前 대대장은 "증인은 5·18 때 '경상도 군인들만 추려와 전라도 사람들 씨를 말리려 왔다'는 유언비어가 있었는데 실제 경상도 군인들만 추려와 전라도 사람들 씨를 말리려 시위를 진압했는가"라고 지 씨의 변호를 맡은 서석구 변호사(영남법무법인)가 신문하자 "유언비어가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밝히려 나왔다"며 이같이 말했다.

서 변호사는 또 5·18 때 제1차, 제2차, 제3차로 투입된 공수특전 여단의 여단장과 대대장의 고향을 확인했다. "여단장, 대대장이 서울, 전주, 광주, 대구, 경북 출신으로 지역 편중이 되지 않았고 부대원들도 전국에서 골고루 편성돼 유언비어는 사실과 다르죠"라고 묻자 김 前 대대장은 "네"라고 답했다.

5·18 당시 투입된 공수특전 여단의 지휘관 명단은 다음과 같다.

제1차 제7공수특전여단

여단장 신우식 경북
대대장 권승만 전주(전주고 졸업)
대대장 김일옥 경북

제2차 11공수특전여단

여단장 최 웅 서울
대대장 안부웅 서울

제3차 제3공수특전여단

여단장 최세창 대구
대대장 김완배 광주(광주제일고 졸업)
대대장 임수원 경북

서 변호사는 그러면서 "5·18 때 전두환 계엄사 합동수사 본부장이 '광주시민 70%를 죽여도 좋다', '전라도놈들 모조리 죽여라'는 명령을 했다는 유언비어가 나돌았는데 전 본부장이 살인명령을 내렸다는 것이 사실인가"라고 신문하자 김 前 대대장은 "그런 명령 들은 적 없다. 사실이 아니다"고 말했다.

증인 신문 뒤 검찰은 지 씨에게 '징역 1년'을 구형했다.

최종 변론에 나선 서 변호사는 "지 박사의 변론을 흔쾌히 수락한 것은 5·18 피해자들과 국군과 정부, 미국의 명예를 모두 보호 하는 것이 대한민국의 미래를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는 변호인의 평소 소신 때문이었다"며 변론을 시작했다.

서변호사는 "5·18은 비판이 금지된 절대적 성역이 아니다"라고 강조한 뒤 "국민 누구나 1980년 판결(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에 동의하든 5·18 민주화운동에 동의하든 책이나 글로 의견을 표시하는 것은 언론의 자유에 속한다"며 "검찰이 피고인을 명예훼손으로 기소한 것은 5·18 특별법은 영구불변의 진리에 속한다는 가정에서 모든 비판을 금지하는 비민주적인 독재적인 발상"이라고 했다.

서 변호사는 이어1964년 미국 뉴욕타임스 대 설리반 사건에 대한 미 연방대법원판례를 소개했다.

그 내용은 아래와 같다.

미국 흑인 인권운동가 Martin Luther King Jr 목사가 1960.2.29. 위증(perjury) 혐의로 체포됐다.

3주후인 1960.3.19. 뉴욕타임스는 마르틴 루터 킹 목사를 지지하는 내용의 사설을 게제하면서 그들의 치솟는 소리에 귀를 기울여라, 그들의 소리는 들려져야 하기 때문이다(heed ther rising voices, for they will be heard)라고 주장했다.

이 신문 광고에는 킹 목사와 인종차별에 저항하는 사람들에 대한 모금을 호소하는 내용도 포함돼 있었다.

이에 엘러버마 주지사, 전직 몽고메리 시장, 몽고메리시 경찰업무 책임자 Sullivan 등은 뉴욕타임스와 4명의 흑인목사 광고주를 피고로 명예훼손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제기했다.

엘러버마주 법원은 불과 사흘간의 심리 끝에 피고인들의 책임을 인정하고 50만 달러의 손해배상을 명했고 이는 주대법원에서도 그대로 인용됐다.

하지만 피고들이 연방대법원에 상고해 주법원의 판결이 파기돼 원고들의 청구가 기각됐다.

피고들의 청구를 기각한 다수의견을 대표한 Brennan 대법관의 판결요지는 '수정헌법 제1조와 제14조의 추지에 비춰볼 때 공무원의 공적행위에 관한 표현행위에 대해 명예훼손으로 인한 손해배상을 인정하려면 그 표현행위가 "현실적 악의(actual malice)에 의해 즉 그 표현이 허위임을 알았거나 또는 무분별하게 무시하고서(knowledge or reckless disregard for their falsely)이루어졌다는 것을 확신하는 명확한(convincing) 증거에 의해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Brennan 대법관은 "공적인 관심사에 관한 토론은 규제되지 않아야 하고, 활기에 넘쳐야 하고, 널리 알려져야 하며 그러한 토론에는 정부나 공무원에 대한 강력하고 격렬하며 때로는 불쾌할 정도로 날카로운 공격이 포함돼도 좋은 것"(debate on public issuse should be uninhibited, and wide-open, and it may well include vehement, caustic, and sometimes unpleasntly sharp attacks on government and public officials)이라고 했다.

그는 더 나아가 "자유로운 토론에는 때로는 잘못된 표현도 불가피하고, 표현의 자유를 보장하기 위해 '숨 쉴 공간'(breathing space)이 필요한 이상 잘못된 표현도 보호돼야 한다"며 "공적토론에 대한 생동감과 다양성을 저해하는 주대법원의 판결은 수정헌법 제1조와 제14조의 정신에 반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서 변호사는 미국 연방대법원의 판례를 본 사건에 적용하면 5·18에 대한 논쟁은 공적 관심사라고 언급한 뒤 "5·18 에 대해 비판한 것을 명예훼손으로 기소한 검찰은 공적 관심사인 5·18에 대한 자유로운 토론을 보장하는 표현의 자유를 엄금하고 '숨 쉴 공간'을 밀폐해 버리는 헌법위반을 저질렀다"고 강조했다.

또 "검찰이 5·18 특별법을 비판이 엄금된 성역으로 만들어 '숨 쉴 공간'마저 밀폐해 표현의 자유와 비판의 자유를 엄격히 금지하는 것은 5·18 광주사태 때 북한군의 대남공작 군사교란작전이 있었는지 여부에 대한 자유로운 토론을 금지하는 결과"라며 "이는 북한의 대남공작을 비호하는 끔찍한 사태를 가져올 수도 있다"고 우려했다.

덧붙여 "공적 관심사에 대한 비판을 엄금해 '숨 쉴 공간'을 주지 아니한 검찰의 기소는 헌법이 보장한 표현의 자유에 위반"이라고 말했다.

그는 또한 "대통령 직속기관인 진실과 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 이영조 위원장은 '5·18은 민중반란'이라고 했고 4·3은 '공산주의자가 주도한 모반, 폭동'이라고 규정한 논문을 국제학술위원회에 발표했다"며 "피고인이 게시한 글과 대통령 직속기관인 진실과 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의 사관은 같다고 할 수 있다"고 했다.

서 변호사는 "5·18의 가해자는 광주시민과 한국 군·경과 한국정부와 미국 사이를 이간질시켜 대한민국을 전복하려했던 북한독재정권"이라고 전제한 뒤 "광주시민과 한국군, 한국정부, 미국은 모두 피해자"라며 "정의와 진실을 밝히는 법정이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며 변론을 마쳤다.

이와 관련, 미국 헤리티지 재단의 5·18 보고서는 다음과 같다.

충돌의 첫 단계는 경찰, 군당국, 데모자들 사이의 치열한 주먹싸움이었다.(This initial stage of the trouble was characterized by fierce hand-to-hand fighting between police and military authorities and demonstrators)

많은 시위자들은 돌과 파이프로 무장했고 지극히 적대적이고 공격적이었다. (Many demonstrators were armed with rocks and iron pipes and were extremely hostile and aggresive)

다수의 관찰자들은 경찰과 군대의 과도한 야만성을 규탄했다. 하지만 다른 관찰자들은 대부분 군부는 폭도들과 공개적인 대결을 피했다고 지적했다.(A number of observers charged the policeman and troops with excessive brutality, but other observers noted that "for the most part, the army avoided an open fight with the rioters)

서로 많은 부상자가 발생했지만 대결 이틀 동안에 두 명의 폭도들만 살해됐다.(There were many injuries on both sides, but only two rioters were killed during the first two days of confrontation)

폭동 첫날 경상도 군인들이 전라도 사람들을 죽이려왔다. 실제로 아무도 죽지 않았는데도 첫날 투쟁에서 40명이나 죽었다는 보도가 나갔다. 심지어 김대중이 처형됐다는 말도 퍼졌다. 사태를 악화시킨 루머는 광주에 군인들이 파견되기 전에 몇일동안 굶겨서 환각제를 먹였다는 것이었다. 이런 이야기들이 사실이라고 믿게 된 학생이 아닌 많은 시민들도 폭도들을 동정하도록 부추겼다.(On the first day of the riots, the rumor spread that soldiers of Kyungsang Province had come to kill the Cholla people. There were reports that as many as 40 peopie had been killed during the first day of strife in fact no one had been killed. Some residents were told that Kim Dae Jung had been executed. The most bizarre rumor was that, to make them more fierce, the troops had been starved for several daya and given drugs before coming to Kwangju. Some of these tales were believed by residents, prompting many nonstudents to sympathize with the rioters)

남한 전라도에서의 무고한 대학살 5월 사태는 한국정부의 계획된 음모에 의해 저질러진 것이 아니다. 미국이 개입한 것도 아니다.(The event of May 1980 were not a deliberate plot by ROK government to massacre innocent civilians in South Cholla Province. Nor was the U.S. involved in the incident)

폭동의 규모에 비해 사망자수가 현저히 적었다는 사실은 한국정부가 피해를 최소화할려고 했다는 것을 반영한다. 광주에서 일어난 사태를 계속해서 왜곡하는 사람들의 의도는 의문이다. 그들은 상처가 치유되기를 막고 한미간을 이간질하려고 작정한 것으로 보인다. 대조적으로 한국정부는 광주사태를 진정시키고 물리적인 그리고 정서적인 상처들을 치유하려고 노력했다.(The events of May 1980 were not a deliberate plot by the ROK government to massacre innocent civilians in South Cholla Province. Nor was the U.S. involved in the incident. Given the extent of the insurrection, the death toll was remarkably low - a fact that reflects the ROK government's effort to minimize casualties. Those who continue to distort what happened at Kangju should have their mofives questioned. They seem determined to prevent the wounds from healing and to drive a wedge between the U.S. and Korean people. The ROK government, by contrast, has been trying to put the Kwangju incident to rest and th heal the country's physical and emotional wounds)

지 씨는 최후진술에서 "5·18 때 광주에 북한특수군이 왔다는 사실은 당시 군도 몰랐고, 정보당국도 의심만 했지 증거를 잡지 못했다"며 "5·18 때 광주에 북한특수군이 왔다고 하면 이는 불법을 저지른 북한과 이를 잡지 못한 남한당국의 불명예는 될 수 있겠지만 광주시민들의 명예와는 무관하다"고 강조했다.

이어 "광주시민의 희생이 공수부대에 의해 발생했다고 하면 5·18의 명예가 보존되고, 북한특수군에 의해 발생했다고 하면 5·18의 명예가 훼손된다고 하는 주장을 이해하지 못한다"며 "이는 북한과 한편이 아니고서는 있을 수 없는 반사작용이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지 씨는 끝으로 진실탐구 노력은 국가적으로 장려해야 한다고 언급한 뒤 "5·18 때 광주에 북한특수군이 오지 않았다고 단정할만한 근거가 없다"면서 "공소장이 피고인의 표현을 범죄로 규정한 유일한 근거는 5·18 특별법인데 특별법이 학문적 연구행위를 금지하는 전가의 보도로 악용되선 안 된다"고 말했다.

한편, '5·18 명예훼손 사건'의 선고공판은 안양지원에서 내년 1월 19일 오후 2시에 열린다.

<프런티어타임스 이민기 기자 mkpeace21@frontiertim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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