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벨문학상에 대한 한국인들의 야무진 꿈
- 노벨문학상, 창의력 있는 감성 세계 추구. 고리타분하지 않아
솔직히 내가 볼 때에는 한국인이 노벨문학상을 타는 것은 노벨물리학상을 타는 것보다 더 어렵다는 판단이다. 한국의 인문학의 현 주소를 보면 너무나 자명한 것이다. 그동안 고은 시인이 물심양면으로 노력해서 자신의 저술을 번역하는 사업을 해서 노벨상에 근접했던 모양이다. 무려 8년이나 계속 후보로 올랐으니 기대해 볼만도 했을 것이다.
사실 노벨상중에 문학상과 평화상은 해마다 수상자에게 논란이 많았던 상 중에 하나긴 해도 한국인들이 만만하게 볼 만한 상 또한 아니다. 노벨문학상에서 정치적인 색채를 가진 경우가 종종 있어왔다. 보르스파스테르나크와 솔제니친 같은 소련인들을 수상한 이면에는 소련사회를 고발하는 내용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그 밖에 여러번 예상밖의 수상자를 내기도 했지만 그래도 나름 다 탈만한 사람들이 수상했다.
내가 고은시인의 실력을 의심하는 것은 아니지만 노벨문학상이 가지는 창작부분에서의 사회적 영향력은 도무지 찾아 보기 힘들다. 문학사조에 영향력을 줄만한 것도 없다. 그렇다고 새로운 장르를 개발한 것도 없다. 철학과 사상의 성숙도는 노벨상에서 그다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창의력이 그다지 돋보이질 않는다는 것이다.
한 때 우리나라 문인 중에 노벨상에 내세울 만한 사람들의 작품을 번역한 적이 있다. 그 때 엉뚱하게도 박경리의 '토지'와 황석영의 '장길산'과 조정래의 '태백산맥'같은 장편대하소설들이였다. 그러나 대외적으로 지명도가 없는 사람들의 작품을 번역만 한다고 노벨상을 수상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더욱이 이 소설을 읽은 서구의 비평가들의 반응으로 "아직도 한국에서는 이런류의 문학을 하느냐?"는 의문을 던지게 만들었다. 한마디로 구닥다리라는 것이다.
일본이 처음 1968년도에 가와바타 야스나리가 '설국'으로 노벨문학상을 탓을 때 한국 사람들은 의외라는 반응이였다. 그 소설내용으로 보면 정말 별볼일이 없다. 그렇다고 사상이 있는 것도 아니고 또한 줄거리가 대단한 것도 아니다. 그 때 이후로 한국은 노벨상을 자신들도 충분히 탈 수 있으리라는 착각을 가진 듯하다. 그러나 이 내용의 졸렬함에도 불구하고 왜 노벨문학상을 내준 것일까?
바로 이것이 우리가 모르는 노벨문학상의 기준이다. 야스나리의 '설국'은 그 서정적 표현에서 시에 가까운 소설이였다. 그것은 서구인들의 눈에는 거의 신기에 가까운 묘사였다. 소설이 아니라 한편의 풍경화를 보는 듯한 서정적 표현이 감탄을 자아내게 한 것이다. 그러나 한국같이 스토리 위주의 소설에 익숙한 나라에서는 그 진미를 알아낼 수가 없었던 것이다.
한국인들이 착각하는것이 있다. 노벨문학상을 충분히 가질 만한 문장가들이 많은데 언어의 장벽때문에 그 진가를 몰라 준다고 하는 착각이다. 내가 보기에는 창작세계에서 가장 중요하게 보는 감성적 창의력이 결여되어 있다.
그저 장편소설이나 질질 늘어지게 쓰고 퇴조한 사상을 내 놓와봐야 별로 다가오지 못한다. 더욱이 노벨상의 수상자의 작품을 보면 그 소설속의 내용이 어느 장소 어느 시기에 읽어봐도 모든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박경리의 '토지'나 황석영의 '장길산'이나 조정래의 '태백산맥'은 한국의 역사를 모르면 도무지 이해가 가질 않는 내용들이다.
물론 '톨스토이'도 노벨상을 수상하지 못했다. 그렇다고 한국이 정말 톨스토이 같이 위대한 문인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못탄 것 처럼 요란스럽게 말하면 안된다. 한국인들이 창작에는 엄연한 한계가 보인다. 더욱이 독자들 마저 문학을 접하는 방식이 자신의 감성을 자극되고 동감할 줄 아는 능력이 부재하고 어떠한 '교훈'이 이 책에 있는지부터 살펴 스토리 위주와 교육 차원에서 문학을 접하니 이성보다 감성적인 문학의 세계를 잘 이해 못하는 듯하다.
한국의 문학은 너무 고루하고 딱딱하고 교훈적이다. 그리고 지나치게 스토리 위주다. 노벨문학상은 창의력 있는 감성의 세계이지 반드시 고리타분한 교육적 세계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다.
<프런티어타임스 이방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