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이코프스키 콩쿠르'는 왜 권위가 있는가?
- 관행은 없고 양식과 상식만이 존재하기 때문...
'차이코프스키 콩쿠르'는 왜 권위가 있는가?
세계에는 권위있는 콩쿠르가 수십개나 있지만 옛 공산국가였던 소련에서 시작한 '차이코프스키 콩쿠르'가 이중 가장 권위가 있다.
우리나라에도 이 차이코프스키 콩쿠르에 입상한 사람이 있고 그때마다 국내언론에 대대적으로 보도되었을 만큼 그 권위는 대단하다.
이 콩쿠르에 입상하기만 하면 평생 대학교수로 살아가는 건 기본이고 그 이상의 富와 명예가 보장되는, 음악도에겐 꿈의 전당에 들어가는 초대장이기도 할 만큼 그 권위는 대단하다.
비록 소련이라는 나라는 해체되어 없어졌지만 이 콩쿠르만은 아직도 세계 최고의 권위있는 콩쿠르로 군림하고 있고 지금도 그 최고의 권위를 부정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문화의 나라 프랑스에도, 세계최강의 나라 미국에도 이렇게 권위있는 음악 콩쿠르는 없다. 그렇다면 차이코프스키 콩쿠르는 왜 그렇게 권위가 있을까?
1957년 소련은 최초의 인공위성 '스푸트니크 1호'를 발사해서 세계를 깜짝 놀라게 했었다. 그때의 충격이 얼마나 컸었던지 당시 국민학교 4학년이었던 내가 아직도 그때의 거리모습을 기억할 정도다.
거리에는 인공위성 발사 성공을 알리는 '호외'가 뿌려지고 신문은 며칠이고 인공위성 이야기로 채웠을 만큼 그 충격은 컸었다. 동시에 어린 마음에도 세계 최강의 나라는 미국이 아니고 소련이구나 하는 생각을 품게 되었을 정도로 소련에 대한 인식을 달리하게 되었었다.
미국은 당시 인공위성에 대한 아무런 계획조차 없었던 시절이었으니 미국인들이 받았던 충격은 우리보다 훨씬 컸으리라는 건 말할 필요도 없다.
그 이듬해 1958년, 소련은 다시 '차이코프스키 콩쿠르'를 개최한다고 전 세계에 공고를 했었다.
참가자에게는 항공료를 포함한 교통비와 모스코바에 체제하는 동안의 숙박비까지 제공한다는 내용이었다.
물론 상금도 그 당시로는 파격적이었고......이런 파격적인 음악제를 개최하는 그 저의야 사회주의 체제의 우월성을 널리 알릴려는 의도라는 것이야 누구나 다 짐작하는 것이지만 그것 말고도 토종 문화가 없는 미국을 겨냥해서 미국보다 문화적으로도 소련이 훨씬 우월하다는 걸 알 릴 계산도 있었던 것이다.
미국의 문화인들이라야 거의 대부분이 유럽에서 건너온 외래종이니 토종 음악인이 없고 세계수준의 토종 음악도가 미국에 있을 리가 없다는 계산도 했으리라고 본다.
처음 개최된 차이코스스키 콩쿠르에서 최우수상을 수상할 사람이 이름없는 23살의 미국 청년이 되리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겠나? 그랬다. 봉투를 열고 최우수상 이름을 발표하자 세계는 인공위성 스푸트니크 1호 발사에 못지 않은 충격을 받았다.
美國 하고도 촌놈들이 산다는 텍사스에서 온 무명의 '반 클라이번'이라는 23살 애송이가 神들린 피아노 연주로 소련 심사위원들의 입을 다물지 못하게 하고 전원일치의 최우수상 판정을 받으리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말이다.
이 뉴스에 온 미국이 뒤집어졌었다.
소련으로 떠날 때는 무명의 백수였으나 며칠 뒤 돌아올 때는 전 미국의 영웅이 되어 거국적인 환영을 받았고 유럽에서도 이 사실를 대대적으로 보도했었다.
미국에서 태어난 이름도 들어본 적이 없는 무명의 청년이 모스코바에서 개최된 '차이코스스키 콩쿠르'에서 심사위원 전원일치 최우수 연주자로 선정되었다는 사실은 미국에 대해 문화적 우월감을 품고 있던 유럽인들에게도 엄청난 충격이었던 것이다.
국민들의 환호성과 꽃다발속에서 카퍼레이드를 벌이며 일약 미국 최고의 수퍼스타로 떠올랐다. 그의 연주회마다 인산인해를 이루었으며 '차이코프스키 피아노 협주곡 1번'을 취입한 음반 한 장으로 그는 떼돈을 벌어 부자가 되었고 녹음 하는 것 마다 판매기록을 세워 엄청난 재산을 모았다.
'문화불모지 미국'라는 오명을 단 한 방에 날려버렸던 통쾌무비였던 것이다. 27살 되던 1962년에 반 클라이번은 그 돈으로 그의 이름을 내건 '반 클라이번 국제콩쿠르'재단을 설립해 세계의 음악도들에게 많은 상금과 장학금을 주었을 만큼 그 나이에 그는 벌써 준 재벌이 되어 있었다.
뿐만 아니라 최초의 수상자 자격으로 몇년전 푸틴 대통령으로부터 훈장도 받았다. 여기에서 한번 생각해 보자.
소련의 체제선전을 위해 개최한 '차이코프스키 콩쿠르에서 미국인이 수상자가 되었을 때 그 심사위원들과 소련정부가 얼마나 당황했겠는가를...
미국인들의 기를 죽이기 위해 고안했던 프로젝트에 미국인이 스타가 되는 일이 생기다니....
우째 이런 일이....당시 심사위원장은 너무나 유명한 작곡가 쇼스타코비치였고 나머지는 소련의 최고 피아니스트들이었다. 그들이라고 왜 눈치가 없었겠는가?
그럼에도 그들은 만장일치로 무명의 미국인에게 최고연주자 상을 주었고 소련정부도 속쓰리지만 간섭하지 않고 그대로 지켜봤던 것이다.
오래전 우리나라 첼로이스트가 이 콩쿠르에서 준우승하고 했던 말이 "한국이 미국과 친하기 때문에 최고상은 주지 않고 준우승상을 주었다.'고 했던 것을 기억하는데 이건 근거도 없는 불평이다.
차이코프스키 콩쿠르가 세계최고의 권위를 인정받는 콩쿠르가 된 배경엔 이렇게 권력의 눈치를 보지 않고 예술인의 자세에서 양심과 지성으로 심사위원의 임무를 다했던 양식있는 지성인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권위는 인위적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소통과 공정한 사회를 주문하고 국민적 화합과 쇄신을 백날 외친다고 세상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권력에 눈치보고,아첨하고, 알아서 기는 사람들이 국가의 주요자리에 앉아 그 자리를 보전하기 위해 양심과 상식에 어긋나는 일을 태연히 하고서도 관행이었다고 변명한다면 그런 자리,그런 정부는 차라리 없는 것만도 못할지도 모른다.
유명환 장관의 딸의 특채를 위해 알아서 기는 관리들의 행태를 보고 있자니 문득 그 옛날 차이코프스키 콩쿠르와 반 클라이번의 모스코바 연주가 생각나 기억나는대로 읊어보았다.
<프런티어타임스 이태준 전 편집국장 frontier@frontiertime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