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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10-06-25 23:2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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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득환 칼럼기자
지금으로부터 60년 전 오늘(25일) 새벽 4시 적의 포성조차 한 순 간만은 애써 울음을 속으로 삼켰을 것이다. 하지만 그 순간은 아주 잠깐으로 끝나고, 온 산하는 이내 온통 아비규환의 장으로 변했다. 공산화 곧 적화통일의 야욕을 실현하기 위해 평화를 가장해 분노를 축적해 온 북한 공산 집단의 무차별적 공격이 예고조차 없이 이 날 시작된 것이다.

당시 휴전선 일대에 포진한 적군의 동정이나 기타 당시 시국이 전개되던 상황을 고려하면, 전쟁의 날은 이미 충분히 예고된 것이었다. 그러나 남한 정부는 그 점을 애써 부정하고 있었다. 정치군사적 여러 사정이 있었겠지만 국가와 국민의 평화를 수호하기 위해 반드시 해야 할 필요한 많은 일들보다 정쟁에 오히려 더 몰두했던 것이 당시 정부였다.

당시 정부는 충분히 예견된 전쟁에 대해 사전에 충분히 대응할 수 있는 정치 군사적 대비태세조차 강구하지 않은 셈이다. 이 처럼 준비하지 않은 정부의 허술함을 새삼 다시 말해 뭣하랴.

준비하지 않은 자와 준비 한 자의 공방은 여하한 이유로도 일방적일 수밖에 없다. 전쟁발발과 동시에 허술하기 그지없던 휴전선은 단숨에 무너졌고, 그 곳에서 국가와 국민의 평화를 수호하려던 병사 대부분이 사지가 지그재그로 찢긴 채 한 순간 그 자리에 흩뿌려졌다.

‘아얏’이라는 단 한 줄의 비명소리조차 내지 못한 채 산화했을 수많은 병사들, 그 날에 대한 상상은 두고두고 우리 모두를 허망하게 한다. 우리가 보고 들어 상상하는 6.25 동란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그리고 적은 3일 만에 수도 서울을 점령하고 남진을 계속해 급기야 보름이 채 되지 않아 낙동강 전선을 지었다.

수많은 젊은 학도병의 목숨을 앗아 간 낙동강 전선의 다부동 전투, 그 날 낙동강은 청년 학도병의 붉은 피를 머금어 역사가 되었다. 피의 역사를 쓴 낙동강 전선, 당시의 참혹했을 낙동강 천변 정경이 오늘을 사는 내 가슴마저 시린 아픔으로 물들인다.

전쟁과 평화 그리고 한반도

현재를 사는 우리들조차도 비록 형태와 진행방식이 다르더라도, 즉 어떤 형태가 되었던 우리 모두 전쟁을 피할 수 없다. 이처럼 전쟁은 인간 삶의 한 양태이다. 이로 인해 그것은 어쩌면 인간 집단이 행하는 가장 자연적인 현상으로 한걸음만 더 나아가 성찰하면. 인간집단의 그 같은 행위는 바로 진리로서 자연의 섭리에 따르는 지극히 당연한 행동이다.

이런 맥락에서 전쟁을 이해하면 우리는 평화에 대해서도 새로운 이해를 구할 수 있다. 즉 전쟁이 자연적이라면 평화는 인위적인 것인 셈이다. 결국 우리가 평화를 지키기 위해서 해야 할 일은 바로 인간의 양심에 기댄 행동들, 곧 도덕성, 동정심, 윤리, 사회질서 등에 순응하는 이타심을 적극 발휘해야 한다.

이 이타심이 없다면 인간은 그 어떤 방법으로도 전쟁을 피할 길이 없다. 하지만 인간은 수많은 역사적 경험을 통해 전쟁의 비극적 참상을 잘 아는 만큼 전쟁만은 그 어떤 이유만으로도 반드시 막아야 한다고 늘 아우성치지만 인간은 그것을 막을 충분한 행동을 하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그런 행동들을 가능하게 하는 충분한 이타심 또한 갖고 있질 않다.

당장 오늘 날 전쟁을 막기 위해 인류가 행하는 행동을 보라. 인류는 지금 전쟁을 막기 위해 역설적이게도 더 많은 무기를 생산하고, 더 큰 파괴력을 갖는 신 무기개발에 엄청난 돈을 쏟아 붇는다.

각종 신무기 생산에 투여되는 비용을 인류 삶의 질 향상에 쓴다면, 인류는 평화를 지켜내는 것은 물론이고, 더 나아가 많은 이들에게 더 나은 삶 곧 충분히 행복한 삶까지 열어 줄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류는 이를 실현 할 지혜를 막살한 채, 엉뚱한 길로 자꾸만 나아간다. 특히 한반도 내부는 엉뚱환 길, 곧 새로운 전쟁의 길로 나아가려는 압력을 나날이 증대시켜 가고 있다. 한반도가 이 같은 상황을 맞고 있는 데에는 세계의 대결과 마찬가지로 남북한 사이에 처진 현실의 벽 때문이다.

남북한 사이에 처진 현실의 벽

지금 당장 우리의 현실 곧 남북관계를 보라. 우리 모두 입으로는 평화를 말하며, 통일을 염원하지 않는가? 하지만 실제 우리의 행동은 어떤가? 서로 진의를 숨긴 채 남북한은 오히려 더욱더 강한 적대적 관계를 축적해가고 있다.

가까운 장래에 남북한이 평화통일을 이루려면 남북한 간에 우호적 관계를 확대하고, 현재의 정치군사적 대결을 걷어내는 노력을 남북한이 상호 경주해야 한다. 그러나 남북한의 실제행동은 오히려 이에 반한다. 남북한 모두 전력의 우위를 확보해야만 비로소 평화를 달성할 수 있다고 믿는 아이러니 속에 있는 셈이다.

북한이 핵무기를 결코 포기하지 않는 것도 이 때문이다.

6.25 전쟁 발발 60주년을 맞는 오늘 우리는 당시의 참상을 떠올리며, 다들 아파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의 행동은 평화를 지키려는 것에 집중하기 보다는 힘의 우위만이 평화를 지킬 수 있다는 신념에 사로잡힌 채 남과 북은 군사력 증강에 모두 온 힘을 쏟고 있다.

왜 우리는 이 같은 왜곡된 현실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일까? 그 근저에는 신뢰의 부족이라는 상호 불신풍조가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같은 불신풍조를 걷어 내지 못하는 한 남북한 간의 적대적 대결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천안함 사태 역시 이런 맥락에서 이해해야 하며 그것 또한 국지전으로서 전쟁의 한 형태로 발생된 것이다.

앞으로 이 같은 불신의 벽은 남북한이 아주 큰 희생적 결단이 없다면 결코 허물 수 없다고 생각된다. 25일(오늘) 60년 전 그 날의 참상을 상기하면서 까지도 남북한 당국자는 오히려 적대적 감정과 불신의 벽을 강화하는 데에 오히려 모든 국가적 역량을 집중하고 있다. 이러고도 남과북은 지금 이시간에도 평화를 말하고 통일을 부르짖고 있으니 이보다 더 아이러니한 일이 어디에 있을까 묻고 싶을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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