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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10-06-25 11:2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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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굶주린 소년 앞에 차려진 진수성찬의 뜻
민족상잔의 비극 6.25 한국전쟁이 발발한지 60년이 지난 지금 생존의 기로를 넘나들던 증언들은 시대를 뛰어넘어 애잔한 감동을 준다. 이와 관련, <프런티어타임스>는 독자들의 관심을 감안해 인터넷 논객으로 맹활약 하고 있는 필명 '수양산'님의 당시 체험담을 전하고자 한다. - <편집자 주>

내 식구 아무에게도 털어놓지 않은 60년전 내 실상을 여기 진솔하게 밝힌다. 그동안 6.25에 관한 많은 사람들의 증언 실화를 들으면서도 뼈에 사무친 내 이야기는 차마 발설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너무나 생생한 기억, 잊어버리고 싶은 이야기의 몇 분의 일이라도 토해버리면 무거운 추억의 짐을 벗을 수 있지 않을까 고민하다 60년 만에 대충만이라도 털어버리기로 작심하고 간추려 여기에 올린다.


▲ 38선 만세교를 거꾸로 건너며
그때는 문교부장관 안호상 박사의 단군 한얼사상에 따라 당시 6년제였던 전국 중학교(지금의 중 고등학교)들에 학도호국단(學徒護國團)이 결성돼 있었다. 그리고 현직 교사 중에 차출해서 군사훈련을 받고 중위 대위로 임관해서 본교에 배속된 교련교관 선생도 2-3명씩 있었다. 학생들은 배속장교라 불리는 이들 교련교관에 의해 군사교련도 받았다. 방학 때면 학교를 지키기 위해 학생들 10 명씩으로 조직된 야경단이 매일밤 나와서 교내 순찰경비를 섰다.

그러던 중에 6.25를 만났다. 1950년 6월 25일 일요일 새벽의 일이다. 나는 1948년 단신 월남해 가족과 헤어져서 홀로 자취생활을 하고 있었다. 낮에는 당시 정동에 자리 잡은 배재중학교(培材中學校)에 급사로 일하고 공부하며 밤에는 지금의 롯데호텔 자리에 있던 반도호텔 옆의 해동영수학관(海東英數學館)에 가서 다시 영수공부를 하고 학교로 돌아와 숙직실서 기거했다.

내가 지녔던 생활용구는 책과 가방 그리고 꼭 바가지모양의 크고 작은 백 원짜리 양은냄비 두 개와 미군담요 하나가 전부였다. 나는 그것마저 모두 버리고 전쟁의 와중에 휩쓸려 갔다. 모든 직장이 그랬듯이 학교도 문을 닫았으니 이제 호구와 기거문제가 발등의 불이었다.

포성은 점점 가까이 들리고 적기(敵機 : 야크)의 공습이 잦아지더니 거리는 북쪽서 밀려오는 남부여대(男負女戴) 피난민대열로 아우성이고 그 뒤를 이어 4일만에 서울 하늘은 붉은 인공기가 날리는 적도가 되고 말았다. 이제 어떻게 할 것인가?

증오와 공포의 대상 놈들을 피해 고향을 떠나온 여기에 그 원수들이 또 쫓아 왔으니 이제 갈 데가 어디란 말이냐? 아직 소년티를 못 벗은 나는 고민했다. 몇 년 뒤 대학진학의 꿈을 키우면서 배우며 일해 근근이 모았던 돈 4만원이 남대문금융조합(지금의 농협)에 예금되어 있었다. 내 기억으로 그때 전차 삯이 5원했다.

그러나 모든 기관이 철봉(鐵封)되었으니 그게 무슨 소용 있으랴. 믿고 찾아온 땅이 이지경이 된 바에 무슨 희망을 갖고 앞날을 기다려 보랴? 단견에 절망 끝에 울부짖으며 소용없이 된 거금 4만원의 예금통장을 찢어버리고 말았다. 그러던 중 월남해 동가숙서가식(東家宿 西家食) 하시던 재당숙께서 나를 찾아오셨다. "중헌아, 이제 어쩌겠느냐?" 죽으나 사나 함께 있으면서 기회를 봐야 하지 않겠느냐 다. 나는 재당숙 뒤를 따랐다.
내 손에는 당시 최남선 선생이 펴낸 조선 시조집 한권과 일본 牧野(마끼노)교수의 영어구문법 한 권이 들려 있을 뿐이었다. 따라간 곳은 지금 경운동 수운회관이 있는 천도교중앙총부였다. 거기에는 월남하기 전에 북한에서 반공투쟁을 하던 많은 서북청년들이 일시 몸을 의탁하는 곳이기도 했다.

그런데 지금 적 치하(敵治下)가 된 마당에 이들이 무사할리 없어 뿔뿔이 흩어졌고 교회 원로 몇 분만이 남아서 교당을 지키는 형편이었다. 조부께서는 1947년 고향서 보위부에 체포되어 해주(海州)형무소에서 2년 반 옥살이를 하고 나와 50년 6월 24일 재구금(再拘禁)되어 학살 당하셨고, 부친은 당시 체포령을 피해 야반도주 단신월남해서 재취(再娶)하여 서울 한 귀퉁이에서 단칸살이를 하고 게셨다.

이 난세에 재당숙의 간곡한 권유로 나는 부친이랑 함께 지낼 수밖에 없이 된 것이다. 움막같은 골방 하나를 빌려 거기서 호구책(糊口策)으로 리어카 하나를 장만해 왕십리와 낙원시장을 왔다 갔다하며 야채장사를 했다. 몇 푼 남으면 호박에다 밀기울을 섞어 멀건 죽을 쑤어 끼니를 때우고 때론 청계천변에 나가 목판에 꽈배기(요즘의 도너츠)를 받아다가 어깨에 메고 다니며 꽈배기 사라고 외치기도 했다. 천변(川邊)을 종일 외치고 헤매봐야 열개 스무 개 팔기가 힘들었다. 백 원에 열세 개를 도매로 사서 다 팔면 세 개 값이 남는 장사였다.

시원찮으면 8월 염천에 리쿠사쿠(룩색)을 지고 한남동까지 걸어가서 한강 나루를 건너 과천 쪽에 가 참외도 받아다가 종로거리에서 푸대쪽을 깔고 좌판을 벌리기도 했다. 다행히 손님이 앉아 깎아먹고 가면 껍질을 모아 과육이 좀 붙은 놈을 골라 씻어서 남몰래 돌아앉아 허기를 달래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나 개인에게도 전쟁의 신은 그 가혹한 손을 뻗쳐왔다. 어린 얼굴에다 체격도 크지 않으니 아직 소년으로만 취급받는 줄 알았더니 그게 아니었다. 8월 29일 화요일, 날이 맑은 아침 일찍 아버지 심부름으로 서대문 근처를 가다가 화신 뒷 쪽 대로변의 견지동인민위원회(지금도 종각--안국동방향 큰 길에서 인사동 들어가는 길모퉁이에 2층 벽돌집이 건재 한다) 모퉁이를 돌아 나오는데 뒤에서 나를 부르는 소리 있어 돌아보았더니 가슴에 빨간 리본을 단 웬 낯선 청년이 나더러 오라는 게 아닌가.

왜 그러느냐면서 나 지금 급한 아버지 심부름 가는 길이라고 했더니 막무가내로 오라면서 뛰어와 나를 끌고 그 인민위원회로 들어갔다. 일부러 어리광을 부리며 아버지가 기다리실 텐데 그러면 집에라도 갔다 오겠다니까 좀 있으면 동무가 할 일을 우리가 다 도와줄 테니 걱정 말라며 강압적으로 앉아 있으라는 것이다.

1층 사무실에는 나 말고 청년 78명이 침통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내 뒤로도 두 명의 청년이 더 붙들려 왔다. 이 때 나는 짐작했다. 의용군 강제모병이란 것을...... 보도연맹과 민청 빨갱이들이 가가호호 골목골목을 뒤져 바지 입은 사람은 모조리 끌어가는 판국이었다.

모두 열 명이었다. 왼쪽 팔에 빨간 완장을 찬 책임자로 보이는 사람이 우리들 앞에 나서더니 일장 훈시를 한다. "용용한 영웅적 인민군은 지금 낙동강 전선에서 부산을 코앞에 보며 수일이면 남반부 전역이 해방을 맞게 되는 영광의 날이 곧 닥치는데 그때 동무들도 공화국을 위해 뭣을 했노라고 할 말이 있어야한다"며 나누어 준 의용군 지원서에 서명해 제출하라고 고압적으로 요구했다.

나는 그래도 다시 한 번 어리광을 피우면서 집에 갔다 와서 의용군에 지원하겠다고 버텼더니 이 자 하는 말이 "학생동무 반동이구만. 왜 자꾸 도망치려는 거야? 뒷일은 우리가 다 알아서 처리해 줄 테니 그대로 따르라"며 호통을 친다. 겁먹은 나는 하는 수없이 주저앉았다. 그리고 끌려간 곳이 지금은 현대건설 본사가 들어섰지만 당시에는 2층 붉은 벽돌 건물의 휘문중학교였다.

끌려는 갔지만 이게 웬 떡이냐? 점심을 먹으라며 주는 식탁이 그렇게도 풍성할 줄이야 짐작이나 했으랴. 하얀 쌀밥에다 미역국을 곁들여 북어조림과 콩자반 그리고 김치, 이만하면 진수성찬이 아닌가. 역시 전시에는 군대가 대접받는 거야. 그것도 점령지를 통치하는 승승장구 해방군인바에야......

하루 두 끼 밀기울죽 한 사발 먹기 힘들어 누렇게 부황 뜬 내 앞에 차려졌던 그 식탁이 60년이 지난 지금도 내게는 생일 성찬처럼 어른거린다. 나중은 어찌되든 하여간에 배 터지도록 먹고 수용될 교실을 배정받아 들어가니 서울 전역에서 붙들려온 예비 의용군들이 교실마다 빼곡히 가득 차있었다. 당시 내 추측으로는 1개 연대 규모가 아니었겠나 싶다.

그 인원이 거기 휘문중학교에 2주 이상 수용된 채 밤낮으로 공산주의 교화교육을 받거나 김일성의 소위 항일 무용담을 듣거나 소련의 볼셰비키 영화를 감상하고 인민군가를 배우며 세뇌기초단계를 밟고 있었다. 미군 공습이 오면 재빨리 건물 밖으로 뛰어나와 운동장 가의 담 밑에 숨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낮 공습 때 예의 운동장가의 담밑에 숨었는데 담 밖 민가집의 조그마한 창문이 열리더니 웬 아주머니가 속삭이듯이 하는 말 "인천에 유엔군이 상륙했다"는 것 아닌가. 부산 해방이 며칠 안 남았다던 전선이 그새 북상할리도 없는데 웬 포성이 은은히 울리기 시작한다. 아주머니의 그 말을 들은 청년 몇 명은 그 순간 담을 넘어 도망치는 걸보고도 나는 아직 어려 그럴 용기가 나지 않았다.

▲ 포위망 탈출작전이 운명의 갈림길이 되고
수용소내서는 훈련도 없이 거의 매일 미군 공습을 피하고 교실에서 인민군가나 부르며 지내기를 3주여... 9월 24일 일요일 밤 포성을 지근에서 들으며 수용원 전원을 운동장에 집합시키더니 사복을 벗겨 도토리 물들인 군복 비슷한 것으로 갈아입히고 야간 행군이 시작되었다.

3주만에 보는 거리 밤풍경은 불빛 한 점 없이 길목마다 시가전 대비 참호와 모래가마니로 쌓아올린 토치카로 메워져 있었다. 행선지도 모른 채 끌려간 곳은 혜화동의 보성중학교였다. 무슨 일인지 거기에 수용을 하지 않고 되돌아 나와 다시 야간행군이 계속되었다.

거의 1개연대규모가 사행하며 닿은 곳이 안암동의 고려대학교였다. 거기서는 남동쪽 아마 태릉 쪽으로 짐작되는 곳으로부터 격렬한 총격 소리까지 들려왔다. 거기에 수용된 지 이틀이 지나는 9월 26일 즉 그해 8월 추석날이었다. 새벽에 기상하여 아침밥 먹으러 식당에 갔다가 별안간 귀를 찢는 고함소리에 모두들 밖으로 나와 다시 대열을 지어 안암동 뒷산으로 줄달음쳤다. 먹지 못하고 도망쳐 나온 흰쌀밥과 쇠고기국이 그대로 다 식어버렸을 것이다.

그만큼 다급한 전황이었던 것 같다. 다음다음 날 9월 28일 서울은 수복되고 인민군 패잔병들은 숟가락을 든 채 북으로, 북으로 도망치기에 바빴다. 진짜 고행길이 열리는 순간, 우리는 안암동 뒷산을 넘어 미아리 다리께로 내려와 도로를 따라 패주행진을 계속했다. 행군도중 길가에 나뒹구는 인민군 T34탱크를 대여섯 대 목격했다. 추석날 아침밥도 거른 채 쫓겨 간곳이 도봉산 밑 의정부 호원동에 자리 잡은 인민군 위수사령부(衛戍司令部)였다.

포성이 일단 잠잠해졌지만 부상병이 수도 없이 후송되는 꼴을 보고 실제 전쟁의 참상을 목도했다. 천막에 수용된 서울의 의용군은 거기서 비로소 내 키만큼이나 기다란 소제 아시보총을 지급받고 총기 다루는 교육을 며칠 받다가 다시 후퇴를 거듭, 포천을 거쳐 철원 평강으로의 도주행각이 계속 되었다.

나는 그 후퇴현장에서 미군기의 정확한 정찰정보력을 실감했다. 주로 야음도주지만 다급할 때는 백주에도 그 긴 대열을 노출시킨 채 산길 들길을 가리지 않고 북향도주를 재촉했다. 이때 반드시 미군 정찰기가 상공에 나타나 몇 바퀴 선회하고 살아지면 몇 분후 어김없이 쌕쌔기라는 제트기 두세 대가 소리 없이 나타나 패잔군을 도륙해댔다.

우리를 죽이려고 제트기 두 세대가 번갈아 소리 없이 저공비행하며 기관포탄과 로켓탄을 쏘아대고는 하늘로 치솟아 오르는 모습은 역설적이게도 내게는 희망이오 천사의 날개로 비쳤다. 아마 이 내 심리를 누가 알았다면 나는 몇 번이고 총살을 당했으리라.

공습으로 죽어나간 대열 속의 의요군은 날이 갈수록 늘어갔다. 그때 짐작컨데 여러 차례 공습으로 2-3백명은 죽지 않았나 싶다. 시체는 그대로 버리고 걷지 못하는 부상자는 중대장이 아예 안락사해 버리고 성한 놈들만 끌고 간다. 이것이 인민군의 패주모습이었다.

후퇴 중에도 여기저기서 길가에 세운 채 모두가 보는 가운데 총살당하는 의용군들도 많았다. 병약하거나 명령 위반이거나 아니면 사상불순이거나 도주시도자이거나 이런 자들은 불문곡직하고 배속된 현역 인민군 중대장이 즉석에서 총살해버리는 것이다. 내 경험에 비춰 전쟁에서 패주행각만큼 비참상도 없을 것이라 생각한다.

나는 포천을 지나 지포리로 향하던 야간 도주시 5분 휴식 중 깜박 잠이 들어 출발신호에만 신경 썼던 나머지 베고 잠들었던 아시보총을 그대로 놓고 대열을 따라 한참을 가다가 남들의 총을 보고 아뿔싸 했다. 내 바로 앞에 가던 분대장에게 사정을 보고하고 역주행해서 짐작되는 지점을 한참 더듬어 만져지는 것을 들어 올리니 바로 내 총이었다. 분실했으면 영락 없는 총살 감이었다.

의용군에 끌려와서 나는 이렇게 첫 번째 죽을 고비를 넘겼다. 북으로, 북으로 향하던 10월 어느 날밤 우리는 마침내 원한의 38선을 넘었다. 만세교리라 했다. 와중에도 그날 밤 고향 이남을 등지는 월경기념이라며 동료어른들은 주머니를 털어 돼지나 닭을 잡고 막걸리나 주자며 법석을 떨었지만 그럴 형편이 아니었다. 내 분대장은 30대 초반의 안경을 낀 키가 자그마한 남노당원으로 서대문형무소 출소자였다.

무슨 일인지 내가 가장 어리기도 했지만 말을 고분고분 잘 들어줘서 이었는지 나를 친동생같이 대해 주었다. 38선 만세교를 건너며 그때 느낀 감상이야말로 나로서는 형언할 수없이 착잡했다. 내가 지옥의 사선을 넘어 대한민국으로 삶의 희망을 품고 찾아온 것이 엊그제 같은데 세상이 변해 그 길을 되레 역행하고 있는 이 비극을 어떻게 극복해야할지 도무지 내게는 대안이 안 섰다.

고향 잃고, 가족 잃고, 친구 잃고, 나라마저 잃은 이 소년이 어디 메 간다는 것이냐. 탈출 해나온 지옥으로 다시 끄려가는 신세가 한 없이 서러웠다. 이제 조금 더 가면 철원이란다. 그런데 전세는 어떻게 되었는지 알 길이 없고 갈수록 깊은 산 산만 나타났다. 서울을 등진지 벌써 두 주가 지나고 있었다.

장사진을 친 대병력의 패잔병이 움직이는 주변 농가는 가는 곳마다 거의 쑥대밭이 되었다. 농가에 들어가 말린 옥수수를 훑어 주머니에 쑤셔 넣고 걸으면서 씹는 게 유일한 식사였다. 고구마밭, 무밭도 남아나지 않았다. 이렇게 아마도 1주일은 지내는 듯싶었다.

그러다가 한 마을의 큰집에 들어서니 부엌에는 흰쌀밥과 쇠고기국이 한 솥 끓여져 식은 채로 남아 있었다. 아마도 퇴각하는 인민군이 포식을 하려다 다급히 도망친 듯싶었다. 어디쯤인지 짐작도 할 수없는 산속 깊숙이 길 없는 길을 더듬어 도주해가다가 저녁 무렵에 어느 산마루에 올랐다. 거기가 철원과 금화 중간지점쯤 되는 것 같았다.

저만치 멀리 수 십대의 트럭이 아직 어둡지 않은데 헤드라이트를 켜고 도로를 일로 북상하고 있었다. 흰 옷 입은 주민들이 나와 만세를 부르며 국군의 북진행렬을 환영하는 모습도 보였다. 내 짐작에 국군이 벌써 철원을 거쳐 금화 이북까지 진격해온 것으로 알았다.

의용군 지휘부에서도 그렇게 판단하고 대열은 이미 국군에 포위된 것으로 보고 포위망을 벗어나는 길을 모색하는 눈치였다. 분대장, 소대장까지 소집을 하더니 한참 만에 돌아와 출발을 재촉했다. 이미 날은 어두워졌다. 북쪽을 향해 산을 내려와 그 도로망을 가로질러 산으로 도망치는 작전 이었다.

산 밑에는 강이 흐르고 있었다. 가을철이라 물이 깊지는 않았지만 야음을 틈타 가슴까지 차는 물길을 헤쳐 포위망을 벗어나는데 성공했다. 아~ 이 포위망 탈출작전이 내게 운명의 갈림길이 될 줄이야.....

어떻든 나도 대열을 벗어나지 않으려고 악착같이 따라붙었지만 강을 건너 도로를 가로질러 마을 뒤 산속으로 들어가는 도중 길이 헷갈려 앞줄을 놓치고 말았다. 그건 내 탓이 아니라 바로 내 앞을 가던 안경잡이 분대장의 실수였다. 그는 밤눈이 어두웠다. 도망가는 마당에 앞의 대열은 뒤돌아볼 겨를이 없다.

밤길 앞이 안보이면 낙오될 수밖에 더 있겠나. 그것이 내게 기회를 줄 줄이야 꿈엔들 생각했으랴. 어떻든 후속대열의 맨 앞장에 섰던 분대장은 그나마 또 어디론가 이탈되고 결국 내가 맨 앞 선두를 서게 되었다. 뒤따르던 중대장의 인솔로 먼저 간 대열을 찾아 합류하고자 했으나 칠흑 속 종적을 찾을 길이 없어 산속을 더듬어 그대로 북행퇴각을 하고 있었다.

낙오된 지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짐작으로 밤 두 세 시경이었으리라. 대열의 낙오된 인원이 줄잡아 2-3백명쯤 되는 것으로 본다. 한 시간 행군 5분 휴식은 퇴각 패잔병에게도 어김없이 적용되었다. 가는 도중 진짜 인민군 패잔병 부대를 만났다. 연대병력쯤 되는가 싶었다.

연대장인 듯싶은 왕별 군관이 우리 낙오대열을 자기부대와 합류시키고 자기 지휘 하에 넣었다. 그 왕별이 우리 낙오병에게 연유를 따지는 것이었다. 이구동성으로 맨 앞장섰던 나를 가리키며 저 동무 때문이라고 성토했다. 왕별이 나를 끌어내더니 심문을 했다. 동무 때문에 낙오된데 대한 책임을 묻는다면서 내 신상에 대해 물었다.

고향은 서울이고 학생신분이며 공화국에 충성을 바치고자 의용군에 입대했다고 대답했다. 왕별은 "이 간나 새끼, 거짓말하는구만. 남반부 새끼 괴뢰군이 여기까지 온줄 알고 도망가려고 했지"하며 으름장을 놓았다. 그리고는 동무는 인민의 이름으로 벌을 받아야한다면서 너 같은 새끼 우리 공화국에 필요 없으니 저리 열 발자국 걸어가라는 것이었다. 말투가 거친 함경도 사나이였다.

나는 직감했다. "모진 목숨 여기서 끝이구나." 걸어 가다가 돌아서며 왕별에게 호소했다. "조선인민공화국과 김일성 장군께 충성을 바치고자 학생신분으로 의용군을 지원해서 왔습니다. 나는 결코 반동분자가 아닙니다. 죽어도 공화국 품에 안기겠습니다"고 생각치도 못했던 열변을 토했더니 꺼내 들었던 권총을 거두면서 "이리 와" 하지 않는가.

의용군 끌려와서 두 번째 목숨 건지는 순간이었다. 나는 이제 두 목숨 사는 아이가 되었다. 북상 패주행군은 계속되었다. 아마 새벽 다섯 시경일까? 5분 휴식 때 바로 뒤에 따라오던 내 단짝 서울 숭문중학생 이(이름은 잊었음)군과 속삭였다. "우리 결판내자. 여기 동솔포기에 엎드려 잠든 척 하다가 기회를 보자"고.... 그가 고개를 끄떡였다.

출발 소리와 함께 모두들 떠나고 난지 십 여분 있다가 고개를 들어보니 사위가 조용했다. 다행히 발각되지 않고 뒤에 쳐지게 된 것이다. 이제 행동은 우리의 자유였다. 그뿐인가? 이미 국군이 이 지역 일대에 진주했을 테니 마을을 찾아 산을 내려가 살길을 찾자고 했다. 둘이서 방향 없이 산을 내려가고 계곡을 건너고 또 산을 돌고 돌아 발길을 재촉해 닿은 고시 강원도 평강군 어느 마을이었다.

두 시간은 더 헤매 가을날 아침 찾은 산골 마을, 집이 대여섯 채 있었다. 그중 큰 집을 찾아가 대문을 두드렸다. 한 노파가 나와 문을 열고 "누구시냐"한다. 우리 인민군인데 이제 날이 밝아 비행기 공습 때문에 더 못가니 여기서 낮에 좀 쉬고 가겠다고 아예 못 박아 말을 하니까 그러라면서 어서 들어오란다.

두 녀석이 사랑방에 들어가 한숨을 돌리고는 또 욕심이 생겨 할머니를 불러서 이집 내력을 묻고 밥을 부탁했다. 조밥에 열무김치와 장아찌를 성찬으로 알고 실로 며칠만인지 모를 밥맛이 꿀보다 달았다. 밥 먹어본지가 열흘은 되었을 것이다. 거기다 고구마까지 쪄주는 데는 뭐라 고마움을 표해야할 길이 없었다. 저녁녘에 이 집 아들이 돌아왔다.

마을 민청단장이라며 자기소개를 했지만 국군이 일대에 진주했고 인민군은 모두 패주해서 이제 완전히 대한민국이 되었다며 서울 학생인 우리들을 동정을 했다. 배고플 때 먹으라며 고구마를 쪄주며 안전한 귀향길을 가르쳐주기도 했다.

둘은 다음날 일찍 노파와 청년에게 다시 만날 것을 약속하고 길을 더나 철원을 거쳐 대광리 전곡행 신작로 길을 따라 발길을 재촉했다. 그때 그 할머니와 그 청년은 어찌되었는지 갚지 못한 은혜가 내 짐이 되어 지금도 가끔 그들을 생각한다.

지나가는 국군 후생사업트럭을 손들어 세워 올라타고 한차 가득 실은 북어를 뜯어먹으며 검문소 직전 미아리까지 와서 내려 그 한 많은 미아리고개를 넘어 시내로 들어서니 천지가 폐허인 채 동족상잔의 뼈아픈 상처를 드러내고 있었다. 이렇게 해서 괴뢰로부터의 서울 귀환 탈출극은 막을 내렸다. 1950년 10월 17일 화요일이었다.

한 가지 부연할 말은 그나마 두 달간 고통 속에서도 무병으로 버텼고 집에 돌아와 옷을 벗으니 이가 과장해 한 되는 되었다. 이제 노을도 지고 한 밤중 어둠 속, 한 인생의 막장을 보면서 빈말이나마 소년시절 한때 목숨 부지코자 조선인민공화국과 김일성 장군에 충성을 바치겠다고 인민군 왕별한테 호소했던 과거를 참회함으로써 무거운 자책의 짐을 벗고 3막 1장 단막극의 막을 내립니다.

<프런티어타임스 수양산 네티즌 칼럼위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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