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한국전쟁 60주년 특집]내가 겪은 6.25(上)
- 굶주린 소년 앞에 차려진 진수성찬의 뜻은...
내 식구 아무에게도 털어놓지 않은 60년전 내 실상을 여기 진솔하게 밝힌다.
그동안 6.25에 관한 많은 사람들의 증언 실화를 들으면서도 뼈에 사무친 내 이야기는 차마 발설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너무나 생생한 기억, 잊어버리고 싶은 이야기의 몇 분의 일이라도 토해버리면 무거운 추억의 짐을 벗을 수 있지 않을까 고민하다 60년 만에 대충만이라도 털어버리기로 작심하고 상 하 두 번에 간추려 여기에 올린다.-----------
굶주린 소년 앞에 차려진 진수성찬의 뜻---
그때는 문교부장관 안호상 박사의 단군 한얼사상에 따라 당시 6년제였던 전국 중학교(지금의 중 고등학교)들에 學徒護國團이 결성돼 있었다.
그리고 현직 교사 중에 차출해서 군사훈련을 받고 중위 대위로 임관해서 본교에 배속된 교련교관 선생도 2-3명씩 있었다. 학생들은 배속장교라 불리는 이들 교련교관에 의해 군사교련도 받았다. 방학 때면 학교를 지키기 위해 학생들 10 명씩으로 조직된 야경단이 매일밤 나와서 교내 순찰경비를 섰다.
그러던 중에 6.25를 만났다. 1950년 6월 25일 일요일 새벽의 일이다. 나는 1948년 단신 월남해 가족과 헤어져서 홀로 자취생활을 하고 있었다. 낮에는 당시 정동에 자리잡은 培材中學校에 급사로 일하고 공부하며 밤에는 지금의 롯데호텔 자리에 있던 반도호텔 옆의 海東英數學館에 가서 다시 영수공부를 하고 학교로 돌아와 숙직실서 기거했다.
내가 지녔던 생활용구는 책과 가방 그리고 꼭 바가지모양의 크고 작은 백원짜리 양은냄비 두 개와 미군담요 하나가 전부였다. 나는 그것마저 모두 버리고 전쟁의 와중에 휩쓸려 갔다. 모든 직장이 그랬듯이 학교도 문을 닫았으니 이제 호구와 기거문제가 발등의 불이었다.
포성은 점점 가까이 들리고 敵機(야크)의 공습이 잦아지더니 거리는 북쪽서 밀려오는 男負女戴 피난민대열로 아우성이고 그 뒤를 이어 4일만에 서울 하늘은 붉은 인공기가 날리는 적도가 되고 말았다.
이제 어떻게 할 것인가? 증오와 공포의 대상 놈들을 피해 고향을 떠나온 여기에 그 원수들이 또 쫓아 왔으니 이제 갈 데가 어디란 말이냐? 아직 소년티를 못 벗은 나는 고민했다. 몇년 뒤의 대학진학의 꿈을 키우면서 배우며 일해 근근이 모았던 돈 4만원이 남대문금융조합(지금의 농협)에 예금되어 있었다. 내 기억으로 그때 전차 삯이 5원했다.
그러나 모든 기관이 鐵封되었으니 그게 무슨 소용 있으랴. 믿고 찾아온 땅이 이지경이 된 바에 무슨 희망을 갖고 앞날을 기다려 보랴? 단견에 절망 끝에 울부짖으며 소용 없이 된 거금 4만원의 예금통장을 찢어버리고 말았다. 그러던 중 월남해 東家宿 西家食 하시던 재당숙께서 나를 찾아오셨다. "중헌아, 이제 어쩌겠느냐?" 죽으나 사나 함께 있으면서 기회를 봐야 하지 않겠느냐다. 나는 재당숙 뒤를 따랐다.
내 손에는 당시 최남선 선생이 펴낸 조선 시조집 한권과 일본 牧野(마끼노)교수의 영어구문법 한권이 들려 있을 뿐이었다. 따라간 곳은 지금 경운동 수운회관이 있는 천도교중앙총부였다. 거기에는 월남하기 전에 북한에서 반공투쟁을 하던 많은 서북청년들이 일시 몸을 의탁하는 곳이기도 했다.
그런데 지금 敵治下가 된 마당에 이들이 무사할리 없어 뿔뿔이 흩어졌고 교회 원로 몇 분만이 남아서 교당을 지키는 형편이었다. 조부께서는 1947년 고향서 보위부에 체포되어 海州형무소에서 2년 반 옥살이를 하고 나와 50년 6월 24일 재拘禁되어 학살 당하셨고, 부친은 당시 체포령을 피해 야반도주 단신월남해서 再娶하여 서울 한 귀퉁이에서 단칸살이를 하고 게셨다.
이 난세에 재당숙의 간곡한 권유로 나는 부친이랑 함께 지낼 수밖에 없이 된 것이다. 움막같은 골방 하나를 빌려 거기서 糊口策으로 리어카 하나를 장만해 왕십리와 낙원시장을 왔다갔다하며 야채장사를 했다. 몇 푼 남으면 호박에다 밀기울을 섞어 멀건 죽을 쑤어 끼니를 때우고 때론 청계천변에 나가 목판에 꽈배기(요즘의 도너츠)를 받아다가 어깨에 메고 다니며 꽈배기 사라고 외치기도 했다. 川邊을 종일 외치고 헤매봐야 열개 스무개 팔기가 힘들었다. 백 원에 열 세 개를 도매로 사서 다 팔면 세개 값이 남는 장사였다.
시원찮으면 8월 염천에 리쿠사쿠(룩색)을 지고 한남동까지 걸어가서 한강 나루를 건너 과천쪽에 가 참외도 받아다가 종로거리에서 푸대쪽을 깔고 좌판을 벌리기도 했다. 다행히 손님이 앉아 깎아먹고 가면 껍질을 모아 과육이 좀 붙은 놈을 골라 씻어서 남몰래 돌아앉아 허기를 달래곤 했다.
그러던 어느날 나 개인에게도 전쟁의 신은 그 가혹한 손을 뻗쳐왔다. 어린 얼굴에다 체격도 크지 않으니 아직 소년으로만 취급받는 줄 알았더니 그게 아니었다. 8월 29일 화요일, 날이 맑은 아침 일찍 아버지 심부름으로 서대문 근처를 가다가 화신 뒷쪽 대로변의 견지동인민위원회(지금도 종각--안국동방향 큰 길에서 인사동 들어가는 길 모퉁이에 2층 벽돌집이 건재한다) 모퉁이를 돌아 나오는데 뒤에서 나를 부르는 소리 있어 돌아보았더니 가슴에 빨간 리본을 단 웬 낯선 청년이 나더러 오라는게 아닌가.
왜 그러느냐면서 나 지금 급한 아버지 심부름가는 길이라고 했더니 막무가내로 오라면서 뛰어와 나를 끌고 그 인민위원회로 들어갔다. 일부러 어리광을 부리며 아버지가 기다리실텐데 그러면 집에라도 갔다오겠다니까 좀 있으면 동무가 할 일을 우리가 다 도와줄테니 걱정말라며 강압적으로 앉아 있으라는 것이다.
1층 사무실에는 나 말고 청년 78명이 침통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내 뒤로도 두 명의 청년이 더 붙들려 왔다. 이 때 나는 짐작했다. 의용군 강제모병이란 것을...... 보도연맹과 민청 빨갱이들이 가가호호 골목골목을 뒤져 바지 입은 사람은 모조리 끌어가는 판국이었다.
모두 열 명이었다. 왼쪽 팔에 빨간 완장을 찬 책임자로 보이는 사람이 우리들 앞에 나서더니 일장 훈시를 한다. "용용한 영웅적 인민군은 지금 낙동강 전선에서 부산을 코앞에 보며 수 일이면 남반부 전역이 해방을 맞게되는 영광의 날이 곧 닥치는데 그때 동무들도 공화국을 위해 뭣을 했노라고 할 말이 있어야한다"며 나누어 준 의용군 지원서에 서명해 제출하라고 고압적으로 요구했다.
나는 그래도 다시한번 어리광을 피우면서 집에 갔다와서 의용군에 지원하겠다고 버텼더니 이자 하는 말이 "학생동무 반동이구만. 왜 자꾸 도망치려는거야? 뒷일은 우리가 다 알아서 처리해 줄테니 그대로 따르라"며 호통을 친다. 겁먹은 나는 하는 수없이 주저앉았다. 그리고 끌려간 곳이 지금은 현대건설 본사가 들어섰지만 당시에는 2층 붉은벽돌 건물의 휘문중학교였다.
끌려는 갔지만 이게 웬 떡이냐? 점심을 먹으라며 주는 식탁이 그렇게도 풍성할 줄이야 짐작이나 했으랴. 하얀 쌀밥에다 미역국을 곁들여 북어조림과 콩자반 그리고 김치, 이만하면 진수성찬이 아닌가. 역시 전시에는 군대가 대접받는거야. 그것도 점령지를 통치하는 승승장구 해방군인바에야......
하루 두끼 밀기울죽 한사발 먹기 힘들어 누렇게 부황 뜬 내 앞에 차려졌던 그 식탁이 60년이 지난 지금도 내게는 생일성찬처럼 어른거린다. 나중은 어찌되든 하여간에 배 터지도록 먹고 수용될 교실을 배정받아 들어가니 서울 전역에서 붙들려온 예비 의용군들이 교실마다 빼곡히 가득차 있었다. 당시 내 추측으로는 1개연대 규모가 아니었겠나 싶다.
그 인원이 거기 휘문중학교에 2주 이상 수용된채 밤낮으로 공산주의 교화교육을 받거나 김일성의 소위 항일 무용담을 듣거나 소련의 볼쉐비키 영화를 감상하고 인민군가를 배우며 세뇌기초단계를 밟고 있었다. 미군 공습이 오면 재빨리 건물 밖으로 뛰어나와 운동장 가의 담밑에 숨곤했다.
그러던 어느 날 낮 공습 때 예의 운동장가의 담밑에 숨었는데 담 밖 민가집의 조그마한 창문이 열리더니 웬 아주머니가 속삭이듯이 하는 말 "인천에 유엔군이 상륙했다"는 것 아닌가. 부산 해방이 며칠 안 남았다던 전선이 그새 북상할리도 없는데 웬 포성이 은은히 울리기 시작한다. 아주머니의 그 말을 들은 청년 몇 명은 그 순간 담을 넘어 도망치는 걸보고도 나는 아직 어려 그럴 용기가 나지 않았다. (계속)
<프런티어타임스 수양산 네티즌 칼럼위원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