生의 노을을 바라보며...
- Old black Joe'
엄마손 잡고 국민학교 입학하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머리허연 노인네가 되다니.....
고교동기 H는 공부를 마치자마자 대전에 있는 국립대학에서 교수로 재직해 이제 정년을 앞두고 있다.
완전히 대전사람이 되어 서울은 이제 남의 동네가 되어버린 H에게 전화를 걸어 오랜만에 바둑 두러 서울로 오라고 했다.
격주로 모이는 고교동기 바둑동호회에 나오라고 한 것인데 대학졸업후 한번도 H를 본 적이 없어 사실 얼굴을 봐도 바로 알아볼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H는 바둑을 아주 잘 둔다는 소문을 들었는지라 기력이 어느 정도인지 알 겸 또 어떻게 변했나 해서 올라오라고 한 것이다.
지하철 2호선 교대역 근처 기원에 오라고 위치와 시간을 알려주었는데 그날따라 총무인 내가 불가피한 일로 좀 늦게 갔다.
교대역에서 내려 급히 기원이 있는 건물로 빠른 걸음으로 들어갈려는 순간 건물입구에 웬 노인네 하나가
서 있는게 보였다. 조금 낯이 익다해서 유심히 보니 바로 H였다.
"야, 오랜만이야, 너 그런데 왜 안으로 안 들어가고 밖에 서 있냐?"
둘이는 반가워 악수하며 이렇게 첫 대화를 나눴다.
"응, 기원안에 들어가 보니 한놈도 안 보이던데.....아무도 안 왔나 봐"
"그럴 리가 .... 시간이 지났는데 한명도 안 올 리가 있나. 가만 있어봐 내가 가보고 올께."
나는 재빨리 이층으로 뛰어올라가 기원안으로 들어가봤다.
가보니 동기놈들 열대여섯명이 짝을 지어 벌써 한판 대국에 열중하고 있는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다시 건물밖으로 나와 입구에서 서 있는 H에게 큰소리로 말했다.
"다들 와 있는데..... 벌써 시작했어, 빨리 들어와, 야."
그랬더니 H 하는 말이 "엥? 내가 들어가보니 영감들 밖에 없던데...........?"
그날 우리는 H의 "영감들 밖에 없던데"소리를 안주 삼아 한참 웃고 떠들어댔고 지금도 가끔씩 그날의 폭소장면을 재연하면서 즐거워 한다.
얼굴의 변화는 달팽이 걸음보다 더 느리지만 수십년 세월은 홍안의 소년을 이렇게 늙은 노인네로 만들어
서로 알아보기도 힘들게 만든다.
자신은 항상 변함없는 그대로라 생각하면서 어린 시절 학우들도 항상 옛날 그 모습으로 기억한다.
그날 H의 경우처럼 저렇게 늙은 사내들이 내 기억속에 있는 그 아이들이였구나 놀라며 새삼 長江같은 세월이 흘렀음을 실감하게 된다.
늙은 개구장이 K와 재치넘치는 소리로 항상 웃음을 선사하던 P는 이 세상을 떠난지도 오래되었고 J는 중풍으로 힘든 나날을 보내고 있다.
담배골초 S는 재작년 폐암수술을 받고서야 담배를 끊었다.
dolmen은 다리골절로 쇠를 박은 다리를 이끌고 힘든 걸음걸이를 하면서도 유쾌한 웃음을 잃지 않는다.
어제는 Y가 오랜만에 저녁 먹자고 해서 역삼동에 갔더니 정말 저녁만 먹고 헤어지잔다.
병원에 다니는 몸이라 술을 못한단다.
고주망태가 되어 비틀거리며 서교동 밤거리를 휘저으며 다니던 우리가 이렇게 되다니....
이제 술친구도 거의 없다. 다들 정말 밥만 먹고 여자들처럼 수다만 떨다가 헤어지는 경우가 많다.
그런 날은 집에 와 나혼자 모자란 알콜을 채우고 잔다.
6.25 동란이 끝난 뒤 첫 국민학교 입학생이었던 우리는 운좋게 밥굶지도 않고 학교도 다니고 그리고 좋은 세상 만나
비행기 타고 해외로 나가보기도 하고 아파트라는 곳에 살면서 자가용도 굴러보는 첫 세대가 되었기에 지난 날을 잘 모르는 젊은이들을 보면 괜히 걱정이 앞선다. 그래서 노인네가 되면 잔소리가 많아지는 것일까?
우리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나 되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살아있는 동안 걱정이 없었던 때는 없었을 것이고 눈을 감아야 마침내 그 걱정도 끝나겠지 중학교 일학년때 배웠던 '올드 블랙 조우'(Old black Joe)를 마음속으로 불러본다.
처음 이 노래를 배울 때 노래가사가 너무 슬퍼 눈물을 흘렸었는데 이제는 눈물도 안 나온다.
"Gone are the days, when my heart was young and gay.
Gone are my friends from the cotton-fields away
Gone from the earth to the better land I know
I hear those gentle vioces calling '.Old black Joe'
I am coming, I am coming
For my head is bending low
I hear those gentle vioces calling 'Old black Jo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