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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08-09-27 10:5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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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덕 팔각산(해발 628미터)

운다
하늘이 그렇다.
산의 운치를 절정까지 아름답게 하는 구름이 많기 때문이다(雲多)

운다
지상이 그렇다.
비갠 후의 기운을 받은 새들이 즐겁게 울기 때문이다.

운다
인간이 그렇다.
그리움이 떠오르고 즐거움이 떠오르기 때문이다.
그리움과 즐거움의 움은 운다의 명사일 것이다.

예술은 인생은 위로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 가치가 고귀한 것이다.
산행은 사람을 위로 향하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 의미가 너그러운 것이다.
위로가서 더 겸허할 수 있는 것이 산이기 때문이다.

세상에 왜소함은 없을 것이다.
스스로 낮추어
스스로 내세우지 않아 그런 것이다.
팔간산 초입의 바위는 전령사이다.
산으로 가는 길을 안내하고 있다.
옥계계곡의 바위들이 그렇게 자신을 낮추고 있다.

한없이 맑다.
물은 습성처럼의 산의 자태를 담고 있다.
맑아서 가능한 것이다.
누가 계곡이 왜소하다 할 것인가,
세월이 너무 흘러 계곡이 그렇게 깊어져 있는 것이다.
누가 바위들이 왜소하다 할 것이다.
세월의 풍상을 고스란히 다 담느라 그렇게 마모되어 있는 것이다.

차가움이다.
차가움 저편에 살가움이 있는 것을,
사무침이다.
사무침 저편에 서러움이 있는 것을,
바다바람의 차가움을 맞이하고 있는 팔간산이다.
뭍으로 향하는 사무침으로 솟은 팔각산이다.

철계단으로 오른다.
철들지 않았던 어린 시간이 회상된다.
그저 들판으로 나돌던 어린 시간이 떠오른다.
회상하는 것이 힘이 된다면,
오늘 이렇게 건장하게 산오르는 힘은 바로 어린 시간에서 잉태한 것이리라.
그래서 회상은 세상조차도 움직인다.

제1봉에서 바람이 멎는다.
간주곡이 있어 노래가 완성된다.
제1봉에 서서 마치 간주곡처럼 서 있는 가운데의 산을 본다.
난간처럼 까까지른 형상이다.
그 길로 달려가면 지름길이 될터이다.
난간에서도 더 푸르른 소나무를 본다.

겸손하다.
소나무가 아름다운 이유이다.
소나무는 아무리 커도 그저 '소'나무이기 때문이다.
팔간산의 소나무가 그렇게 푸르다.
아마도 산넘어 온 바다바람을 견디느라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다.

경치가 숨어있다.
더 깊이 숨어 술래를 놀리는 숨바꼭질처럼
깊이 감추어둔 경치가 모습을 드러내지도 않고 있는데,
아름다운 탄성으로 숨을 내쉰다.
굽이돌아 운치가 있다.
구름은 저 만치 물러가고 없건만,
구름의 기운이 산능선에 남아 운치가 넘실거린다.
벼들이 더불어 익어가고 있는 산아래의 들판이 넘실되고 있다.

찾아 나서는 술래처럼
제2봉에서 드디어 주왕산을 찾는다.
주왕산 정상인 가메봉이 눈앞이다.
능선이 실선처럼 그렇게 가리키고 있다.
바위가 말은 한다면,
제일성이 무얼까하는 생각을 한다.
어린아이를 칭찬하는 어른처럼 '아암'이라고 할 것이다.
통바위가 말을 한다면,
'통함(통아암)'이라 할 것이다.
제2봉에 접어 들어서 팔각산과 소통을 하고 있다.

여유이다.
가파른 바위길을 오르면서,
가파른 난간의 길을 내려가면서,
밧줄을 부여잡고 산과 친밀한 소통을 하고 있다.
밧줄이 산과 인간을 매개하고 있다.
여유는 나눔이 되고,
여유는 중심이 된다.
산의 중심인 제4봉에서 지나친 제3봉을 헤아린다.
여유의 심사로 나아가야할 제5봉을 본다.

설악을 연상한다.
제5봉에서 제6봉으로 나아가는 능선에서 설악의 닮음을 본다.
바위의 난간에 난 길이다.
난간에서 힘차게 비상하는 까마귀를 본다.
마땅히 먹을 식량을 발견한 것도 아닐텐데,
창공에서 시연하는 축하비행처럼 까마귀가 날아내린다.
마치 설악에서 솓아내리는 오색차란한 낙엽같다.

바람이 멈춘 곳에 세상이 평화롭듯
사무침으로 달린 바위가 멈춘 곳에 산의 비경이 완성된다.
제7봉이 그러하다.
홀연히 일어나는 광풍도 맞았으리라.
칠흑같은 먹구름도 머물렀으리라.
살을 에는 겨울의 세찬 바람도 맞았으리라.
그래서 제7봉은 소용없는 것은 다 마모되고,
소용되는 것만이 남은 바위로 우뚝 솟아 있는 것이다.
바위속에 뿌리깊은 소나무를 비켜서야 제7봉에 이른다.
그래서 팔각산은 소나무의 산인가 보다.

정상에 선다.
기록상으로는 632,8미터인데,
표지석에는 628미터라 쓰여있다.
아마도 바다의 해발이 그만큼 더 높아진 것인가 보다.
아마도 산의 세월이 그렇게 더 낮아진 것인가 보다.
바다는 높아져서 산을 낮추고
산은 낮아져 자신을 낮추는데,
사람은 무엇으로 자신을 낮추는 것일까.
진심일 것이다.
정상에 굴참나무가 울창하다.
굴참나무가 연신 잎사귀를 흔들고 있다.
그것이 맞는 말이라고 증명하고 있다.

사치인가 보다.
하산이 그렇게 아쉬운 것이다.
마음이 호사스러운가 보다.
미련이 남아 있는 것을 보니 말이다.
하산의 길목에서 위를 올려다 본다.
병풍처럼 두른 바위가 소나무의 호위를 받아 도열하고 있다.
하산의 길목에서 아래를 내려다 본다.
산초입의 풍경이 크레파스로 채색을 마친 정물같다.

원점에 선다.
산은 다시 숨어있다.
팔각산의 원래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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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극원 취재기자 정극원 취재기자의 다른 기사 보기
  • 대구대학교 법과대학 학장
    대구대학교 법대 졸업
    독일 콘스탄츠대학교 법대 법학박사
    한국헌법학회 총무이사(전)
    한국비교공법학회 총무이사(전)
    한국공법학회 기획이사
    한국토지공법학회 기획이사
    유럽헌법학회 부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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