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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09-11-22 09:25: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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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전히 기억에 의존해 쓰는 글이므로 착오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아침 버스를 타고 오는 길에 버스기사가 틀어놓은 손석희의 시사진행프로를 무심히 듣고 있는데 손석희 아나운서가 갑자기 "방금 들어온 소식입니다. '쥬제페 디 스테파노'가 방금 사망했다는 뉴스가 들어왔군요"라면서 스테파노의 화려한 경력을 설명해 주는데 순간 나는 그 양반이 아직도 살아있었나? 하는 생각이 제일 먼저 떠올랐다.

1921년생이니까 88세로 생을 마감했는데 사실 나는 몇 년 동안 스테파노의 소식을 들어본 바가 없어 오래전에 이미 죽은 줄로만 알고 있었다.

아프리카 케냐 여행 중에 강도에게 피습당해 식물인간이 되어있다 끝내 사망했다는데 강도의 습격을 당하지만 않았더라면 아직도 살아 활동할 수 있었다는 말 아닌가?

지금의 50대 후반에서 60대 연령층의 대학졸업자 중에서 스테파노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정도로 우리나라에서 유명했던 이태리의 테너가수였는데 특히 이제는 전설의 인물이 된 60년대의 '마리아 칼라스'와 콤비를 이루어 오페라 무대의 황금기를 이끌었던 명가수였다

라이벌이었던 '마리오 델모나코 & 레나타 테발디' 콤비와 오페라계의 쌍두마차를 이끌었던 인물인데 시대마다 명가수는 항상 있는 법이고 지금 이 순간에도 발군의 실력을 자랑하는 오페라가수는 여럿 있는데 왜 40년전에 전성기를 누렸던 스테파노만 우리나라에서 이렇게 유명할까 의아하겠지만 여기엔 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6.25동란이 남긴 폐허와 굶주림, 절망, 자조가 사회를 뒤덮고 있었던 50년대가 끝나고 60년대에 들어서자마자 우리사회는 정치적 격변기에 접어드는데 1960년의 4.19 이후부터 전혀 새로운 음악인 미국의 '팝' 음악과 유럽의 '칸소네', '상 송' 같은 생소한 음악이 유행하기 시작하면서 문화적으로도 신시대를 열어가기 시작했다.

닐 세데카의 '오, 케롤', 폴 앙카의 '다이아나'가 학생사회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게 되자 이때부터 미국의 팝 음악이 대중화되기 시작했고 미8군 무대에서 노래하던 한국가수들도 하나 둘 일반에게 선보이며 일반무대에서도 인기를 끌기 시작했다. 하지만 시장이 없어 미국으로 가서 활동하던 '패티 킴'과 '윤복희'도 다시 돌아와 고국의 무대에 서게 됐고 학생신분으로 미군들을 상대로 아르바이트 하던 조영남이 '딜라일라'를 불러 선풍적인 인기를 끌게 되자 음대를 때려치우고 본격적인 대중가수의 길로 접어서게 된 것도 다 이때 60년대 후반의 일이었다.

또한 오페라를 한번도 들어본 적도 없고 성악가의 노래마저 들어본 적도 없던 일반인들이 오페라가수의 목소리를 처음 들어보게 된 것도 1961년경에 들어온 쥬제페 디 스테파노가 부른 이태리 민요 '오 솔레미오'와 '돌아오라 소렌토로'를 듣고서였는데 이때부터 이태리어로 이태리가곡을 부르는 것이 중고생들 사이에서 대유행이었다. 지금의 60대 연령층 중에서 팝이나 이태리가곡, 프랑스의 상송을 원어로 즐겨 부르는 사람이 꽤 있는 것도 바로 이때의 선풍이 남긴 후유증(?)으로 보면 된다.

당시는 워낙 가난해서 레코드판을 살 여유가 있는 사람도 적었고 더구나 오디오를 갖춘 가정이라고는 대도시의 부유층에서나 구경할 수 있었는데 그래도 용케도 잘도 부르고 흉내를 내곤 했었다.

저 멀리 이태리출신의 스테파노가 당시 우리나라에서 얼마나 인기가 있었는지 스테파노의 서울공연 때는 마치 국빈이 방한하는 것만큼이나 매스컴에서 대대적으로 보도했었고 서울 소공동 어느 양복점에는 영광스럽게도 스테파노가 이 양복점에서 양복을 맞춰 입었다고 이 양복점 주인과 악수하는 대형사진을 10년 넘도록 걸어놓은 것도 본 기억이 있는데 (조선호텔입구였음) 하여튼 열광적인 환영을 받았다.

아마도 스테파노 자신도 이름도 들어본 적이 없는 극동의 가난한 나라에서 이렇게 열광적인 환영을 받으리라고는 상상조차 못 했을 것이다. 이런 점은 영국의 클리프 리차드가 이대강당에서 첫 공연을 하던 날 수많은 여대생들이 울고 불고 까무라치던 모습을 보고 클리프 리차드 자신이 더 놀랐던 점이나 미국의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서울을 방문하자 서울인구만큼의 환영객이 거리를 메워 미국 대통령일행이 탄 차량이 남대문에서 더 나아가지 못하고 인파에 파묻혀 오도 가도 못하고 갇혀버리는 대형돌발사고가 생겨 미국 경호원들이 식은 땀을 흘렸던 것 등은 다 지금의 젊은이들이 이해하기에는 너무도 다른 시대의 촌스런 이야기가 되어버렸다. 당시 아이젠하워 대통령을 보려고 시민들이 남대문으로 몰려올라가는 바람에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남대문의 일부가 무너져 내리기도 했다.

좁은 빨대로 세상을 내다보며 유식하게 문화논평하기를 즐기는 덜 떨어진 먹물들 중에는 이런 당시의 현상을 문화사대주의라고 비웃지만 내가 보기엔 문화사대주의가 아니라 수백 년 내려온 유교적 전통과 폐쇄적 인습을 숙명적으로 받아들이고 살아야하는 자신들의 운명에 저항하는 몸부림이었고 탈출을 노리지만 탈출구가 보이지 않는 쥐떼처럼 그렇게 절망감에서 자포자기적으로 문화적 모방이나 즐기며 현실을 외면하고 싶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생각해 본다.

아침 8시 뉴스에 실려나온 60년대의 名테너가수이자 한때 가난한 극동의 작은 나라의 젊은이들 사이에서 우상이었던 '스테파노'의 죽음소식에 잠시 지난날을 회고하며 머리에 떠오르는 대로 읊어보았다. - 2008년 3월 4일

<프런티어타임스 이태준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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