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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08-09-01 22:54: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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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극원 칼럼니스트
신불산(해발1209미터)-영축산(해발1075)

관념의 시간은 아름답다.
인간이 인공으로 만든 굴레를 추상하는 구심력이 작용하기 때문이다.
자연의 시간은 장엄하다.
태고의 세월로부터 달려 나온 까마득한 구체적 형체의 원심력이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가을햇살의 광채가 속속 배여 있는 장엄한 세월의 신불산의 원심력에 빨려든다.

길가에 시선이 머문다.
진한 배색의 코스모스 때문이다.고요에 잠긴 시골 우물 속의 무풍지대에 어린 동심이 만든 코스모스꽃잎의 바람개비가 휘이 고요의 정적을 깨고 환한 환풍지대를 만든다.
어린 추억에 코스모스가 그저 화사하다.

변절하여 패망해 버린 후손들 때문에 생전의 웅혼한 기상과 불굴의 용맹조차도 적들의 말발굽 아래에 묻어버리고 마는 슬픈 왕릉처럼 슬픈 세월의 묵상에 젖어들고 있는 듯 억새꽃잎이 수려하다.
억새꽃을 화살삼아 제법 장수의 폼내를 부리던 어린 회상에 웃는다.

비류직하 홍류폭포이다.
폭포로 향하는 걸음걸음마다에 미처 자제하지 못한 흥분들이 하얀 눈처럼 소록소록 쌓인다.
소록한 설레임 위로는 나무들이 연출해낸 무지개아치가 기나긴 평온을 만든다.
피안으로 진입하는 관문이 있다면 바로 이러하리라.
하늘에서 떨어지는 듯 홍류폭포의 하얀 포말이 옥구슬처럼 튕기면서 무언가를 말하려다 금세 부서지고 또 뭉쳐서 웅대하다.
상징으로 말하려는 듯 그 길이가 33미터로 곧 삼라만상이다.
하늘로 비상하는 용트림처럼 몸체의 휘날림으로,
잠들어 있는 모든 것들을 다 깨우려는 쩌렁한 소리의 굉음으로 폭포수가 위용을 부리고 있다.

순간 묵상에 잠겨본다.
이게 어인 일인가?
그렇게 세차게 포효하던 폭포가 세상에서 가장 적막한 고요를 생성하고 있다.
마음이 개안하고 있는 것은 아닐진대,
가만히 바라보니 세차게 떨어지는 폭포가 세상의 온갖 소리를 다 삼키고 있는 것이다.
아마도 영겁의 세월까지도 자기 안에 품고 있는가 보다.
마음집중을 다하여도 그 품은 것들이 무엇인지 좀 체로 터득할 수야 없겠지만 내려오는 폭포와 마음으로 올려다보는 선한 교감을 오래도록 나누어 본다.

공룡능선 샛길에 들어선다.
그저 가파른 경사길 정도로 예단한 것이 얼마나 빗나간 예측이라는 것을 일언직하에 알려주려는 듯,
빙판을 세로로 세워놓은 듯 바위경사면 끝에 하늘이 달려 있다.
밧줄을 타고서 어적어적 기면서 오른다.
칼바위가 먼데 바라다보면서 상념하고 있다.
상념을 피해가려는 듯 막 단풍을 시작한 나무들이 잎새를 지상으로 고개를 숙이고 묵묵하고 있다.

가파른 바위능선을 넘어 허공속으로 불어가는 바람이 더 이상 참지 못하고 파적음을 내고 있다.
바위 하나 올라 ''휴우'' 큰 호흡이 파적음에 뭍힌다.
중간쯤의 정상에서 바라다보는 신불산이 다 비워서 더 보여줄 것이 없다는 듯 휘장을 확 열어 제치고 한낮의 시간을 무색무취로 비추고 있다.
양쪽에 절묘한 대칭의 바위를 거느린 신불산에 감탄한다.

오른쪽으로의 급경사면에 무게가 치우치지 않게 왼쪽으로의 완경사면이 넓디넓다.
넓디넓은 평원에 하얀 눈이 내린 듯 억새가 물결하고 있다.
억새평원이 오후의 햇살을 속으로 삭이지 못해 허공에다 빛을 되돌리고 있다.
빛의 산란이 태고 이후로 제일 흰 백색세상을 방불케 한다.

언젠가 스위스 알프스의 산자락을 걸어걸어 잰티스(해발2503미터)로 오르는 처절한 산행을 한 적이 있다.산의 완경사를 다 적시는 물소리의 경쾌한 울림에 장단 밎추어 고르게 자라고 있는 사철 푸른 초원의 평원이 알프스의 상징이다.
그것은 가지런한 장관이었다.
물소리 따라 풀숲을 살짝만 헤쳐도 요정이 나타나 길안내라도 할 듯이 평화에 물들어 있던 알프스의 한켠,
억새만발로 인하여 지상의 백색물결을 넘어 하늘조차도 하얗게 물들게 하고 공룡능선에 힘을 다 소진한 탐방객조차도 온통 하얀 물결에 서 헤어나지 못하게 하는 신불의 억새평원 보다는 못하리라.

억새는 홀로는 견디기가 너무 외로워 서로의 속살을 부대끼며 핀다.
행여 마음 상하게 할까나 서로에게 더 겸손하려는 듯 바람이 불기도 전에 먼저 고개를 떨군다.
세상에서 제일 넓은 억새평원이 겸손으로 숙연하다.

신불산 정상은 사람의 냄새가 난다.
강원도 속초가 고향이라는 산아줌마의 매점에는 항상 물이 끊는다.
그리도 애틋한 사연을 잊은 건지 초탈한 하늘에 내민 편한 얼굴이다.
하얀 배색의 도화지같은 창공위로 빨갛게 날아오르는 페러글라이딩의 날개짓이 신불산 하늘에서 뽐내고 있다.
페러글라이딩이야 원하는데로 사라지는 것일테이지만,
산아줌마는 변함없이 그 곳에 터 잡고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신불산은 사람을 닮았다.

억새융단을 본다.
더 멀리 보지 못하는 눈이 한스럽다.
더 아름다운 언어로 형용하지 못하는 배움이 한스럽다.
다 보지 못하여도 취하고,
다 표현하지 못하여도 광활함에 취한다.
명정이 만든 몰아지경이다.

신불산에서 영취(축)산까지의 대평원을 뒤덮은 억새융단에 취한 휘청이는 발걸음으로 통도사 뒷산인 영취(축)산 정상 바위에서 아련한 조망에 또 넋을 잃고 있다.
대자연의 시간에 다시 관념의 시간이 대비되고 있다.
하산을 서둘러야 할 시간이 땅거미를 만들며 다가와 있었다.

지름길을 따라 소나무 청아한 자태에 터 잡은 비로암에 도착한다.
굴뚝에 군불 지펴 올리는 비로암이 정겹다.
비로암에서 올려다보는 영취산의 바위가 병풍처럼 네 개의 모양새를 뽐내고 있다.
봉우리 마다에 ''기승전결''을 표현하고 있다.
인생이 그러하여야 한다고 침묵으로 말하는 듯하다.
아무리 빨리 달려도 벗어나지 못하는 그 병풍같은 바위를 하염없이 바라다본다.
아직 신불산의 억새평원에 취한 기운이 허공에 멍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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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구대학교 법과대학 학장
    대구대학교 법대 졸업
    독일 콘스탄츠대학교 법대 법학박사
    한국헌법학회 총무이사(전)
    한국비교공법학회 총무이사(전)
    한국공법학회 기획이사
    한국토지공법학회 기획이사
    유럽헌법학회 부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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