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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08-08-08 11:5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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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악산(대청봉-해발 1708미터)

대저 산이란 무엇인가? 산은 그것이다. 그러면 그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산이다. 설악산이 바로 그것의 산이다.

설악은 역사이다. 인간의 역사가 아니라 산의 역사이다. 미미한 시간들이 겹겹이 포개어져서 영겁을 만든다. 그 영겁의 시간위로 마치 해일에 포효하는 바닷물을 다 하늘로 끌어 올리려는 듯, 거대하게 떠오르는 동해의 아침태양처럼 오로지 하늘로만 솟아오르는 장엄한 바위들이 눈부시다. 설악의 바위들은 지상의 기운을 하늘로 매개하고 있다.

마치 하늘을 향하여 비상하듯 대청봉을 오른다. 산자락에 묻어둔 정상에 오르지 못한 지난 가을 탐방 때의 가슴여린 회한을 신발끈 조여매고서 발로 툭툭 걷어내면서 오색약수를 지나 남설악에서 대청봉을 올려다본다.

마치 호위병의 머리처럼 낮은 봉우리만 보인다. 뒤돌아보면 못내 발길 떠나지 못하는 노모와 아들의 정들처럼 자취도 없이 홀연히 무지개 아치같은 설악의 깊은 숲속으로 빨려들어 간다. 대청봉에 이르는 가장 가까운 지름길을 택한 것이다.

벌써 마음의 동요가 요동치고 있는 것이다. 거대한 역사속으로 뛰어 든 것이다. 숨 한번 고르지 않고 가파른 능선에 아랑곳 하지 않은 채 당도한 산능선에서 하염없이 조망을 즐겨본다. 배려가 있다.

시선 머무는 곳마다에 군집을 이룬 바위가 장관이다. 바위들은 한결 같이 유구한 세월을 견디느라 하얀 채색으로 변색된 자태를 뽐내고 있다. 그 바위들을 바람막이로 하여 자라나고 있는 소나무의 푸른 기상이 계곡의 맑은 물처럼 위용차다.

생명이 더딘 바위가 활활 살아있는 소나무를 배려하고 있는 것이다. 그 고마움을 아는지 소나무들의 크기가 바위의 눈높이를 넘어서지 않고 있다.말없는 바위의 만년세월의 역사와 의기양양하게 자라는 소나무의 천년 세월의 역사가 바로 설악이다.

산앞에 서면 한갖 미물의 존재에 불과한 인간들이 그 역사가 무엇을 전하여 주려는 것인지 끝내 알 수가 없지만, 장엄할지라도 배려하라고 말하고 있는 듯하다. 유규할지라도 겸허하라고 말하고 있는 듯하다.

설악은 침묵이다. 산에서는 더 세차게 헉헉 일수록 더 맑은 산의 공기를 호흡할 수가 있다. 한 시간여의 힘찬 발걸음으로 단숨에 남설악기점(공원매표소)에서 1.7키로 지점까지 오른다. 대청봉까지 3.3키로라는 이정표 아래 평넓은 나무마루 쉼터가 있다.

힘껏 뛰어가다 넘어져 무릎이 깨어져 다쳐도 엄마 앞에서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털고 일어나 다시 더 힘껏 자신을 자랑하는 어린애마냥 설악 앞에 자랑을 하고 싶은 장난기가 발동한다. 정상에 오르는 통상의 길을 체념하고 오솔길의 형태만 남아있는 능선의 외딴 길로 정상에 도전한다.

한여름에 벌써 청색 가을이다. 하늘에 휘몰아온 하얀 구름이 큰 바위산에서 하늘을 상봉을 하고 있다. 아름다운 풍광이다. 그 바위끝자락에 미소를 보내어 장난기로 선택한 그 길의 온전함을 물어보건만 돌아오는 대답은 역시 침묵이다. 시선을 보낸 암봉만이 침묵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산 전체가 합창으로 침묵하고 있다. 이 거대한 침묵을 알고 있기나 한 듯, 새들은 더 크게 재잘된다. 초목은 푸른 잎새를 연신 더 크게 흔들어 되고 있다. 나도 함께 침묵에 빠져든다. 이 순간 설악은 시인의 산이 아니라 묵객의 산이 되고 있다.

요량도 할 수 없고 가늠할 수도 없다. 어디로 나아가야 하며 어디에 당도하여 있는지 도무지 알 수 없다. 험난한 오름길을 묵묵히 나아가는 방법밖에 없다. 통과하는 사람의 짐수색이라도 하려는 듯 바위문이 나온다. 이름하여 청왕문이란다. 심술이 나서 툭 건드리면 와르르 넘어질 듯이 가파른 공간을 비집고 서있는 청왕문을 지난다. 전나무 사이에 우뚝 솟은 평면바위에 앉아 시야가 트인 곳으로 내려다보니 어디에서 휘몰아온 온 구름인지 하얀 밤을 만든다.

눈이 없으면 마음이 대신한다. 가만 눈감고 하염없이 산에 몰입하여 본다. 억제된 침묵이 아니라 저절로의 침묵이 만들어지고 있다. 인간은 산을 가르치려 온갖 개발로 파헤치는데, 산은 인간을 가르치려고 침묵을 만들어 주고 있는 것이다. 설악에는 태고가 있다. 산의 구비 하나 넘어서면 금세 나타날 것 같은 대청봉의 자태가 드디어 구름을 대동하고 나타났다.

드디어 해발 1604미터 봉우리의 끝청에 올라 산 전체를 조망한다. 하늘조차도 시샘하여 고이 숨겨놓은 설악의 비경에 마음비운 맑은 의식이 혼미하여 온다. 인간의 말로는 형언할 수 없는 비경앞에 혼절하고 만다.

끝청에서 바라다보는 귀때기청봉방향의 단순미의 장엄한 바위는 어떠한가!
운해에 잠겨 반틈만 그 위용을 드러내고 있는 비선대의 세련미의 바위들은 또 어떠한가! 잡힐 듯 눈앞의 봉정암의 중후한 위세는 또 어떠한가!

혼절한 정신으로 산의 진수를 만나고 있다. 마음을 진정시키려고 멀리 대청봉을 바라다본다. 끝청에서 중청을 지나 대청봉까지 1.8키로의 길에 태고의 시간이 머물고 있다. 표고의 높이때문에 더 이상 하늘로 자나나지 못하는 눈잣나무의 군락에는 높은 지상을 다 점령이라도 할 듯 생기가 넘실된다. 나무의 이름이 절묘하다는 생각이 문득 든다. 위로 자라지 못하고 누운 듯이 자란다하여 지어진 이름일 텐데, 한철 짧은 시간만 제외하고서 세 계절을 눈을 맞으면서 자라나고 있어 눈잣자무라하는 것은 아닐까하는 생각도 하여 본다.

백설이 휘몰아치는 한 겨울에 다시 와보리라. 그 때에는 날씨의 변덕도 없을 것이다. 대청봉에 이르는 목전의 길에 연한 바위이며, 나즈막한 고산목에서 태고의 시간이 겹겹으로 묻어있다. 태고의 시간을 후두둑 달려 대청봉에 이른다.

설악은 애처롭다. 대청봉은 말이 없다. 몸체를 운무속에 감추어 형상도 없다. 아무것도 보여주지 않음으로서 자신의 유구한 위엄을 보여주고 있다. 오후의 시간임에도 금세 어둠을 만들어버린 운무때문에 백담사방향의 절경도 설악동방향의 경관도 오리무중이다. 너무나 아름다워 감히 말을 꺼낼 수도 없고 '아'하는 비명을 지르는 외에는 입도 열지 못하는 설악의 비경이 오히려 애처롭다.

행여 절경의 바위 한 조각이라도 풍상이 버거워 떨어져 나가면 얼마나 애처로울 것인가 하는 생각에 가슴이 여미여 온다. 태고의 세월을 말하려는 설악이 바위조각 하나에 손상이 갈리는 없겠지만, 그게 안타까운 것이다. 설악이 그렇게 안타까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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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극원 취재기자 정극원 취재기자의 다른 기사 보기
  • 대구대학교 법과대학 학장
    대구대학교 법대 졸업
    독일 콘스탄츠대학교 법대 법학박사
    한국헌법학회 총무이사(전)
    한국비교공법학회 총무이사(전)
    한국공법학회 기획이사
    한국토지공법학회 기획이사
    유럽헌법학회 부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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