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김준성 연세대학교 직업평론가
새벽이다. 이새벽에 음악 작업을 하다보면 더러는 가느다란 음악연주를 듣게 된다. 음악 작업을 하던 사람들은 그음원에 매료되어 피곤을 잊고 이런 소리에 취하여 계속 하던 음악 작업을 할 힘을 얻는다.
작곡으로, 노래부르기로, 작사, 연주하기로 새벽은 깊어간다. 이런 삶은 아마도 음악적 이상향을 구현하는 그런 삶의 파편인지도 모른다.
음악적 이상향을 우리는 뮤토피아라고 부른다. 그것은 음악MUsic 과 이상향 Utopia가 결합된 말이다. 이런 음악적 이상향을 만들어 가는 이들이 있다.
그들은 서태지, 조수미, 나훈아, 이승철 , 이은미, 송창식, 조용필,보아, 비, 김도향이다. 그들은 음악으로 밥먹고 지내면서 음악속에서 이상향을 지향하는 중이다.
스스로 작곡을 하기도 하고, 노래를 부르기도 한다. 그들은 음악에서 무엇인가에 도전하려고 한다. 답답한 세상 살이에서 그들은 무엇인가 전기를 만들려고 한다.
부르는 노래는 대중의 마음을 움직인다. 그들의 작곡은 자기 혼자 지니기 위함이 아니다. 그들은 남을 위해서, 자아를 위해서 작곡을 한다. 곡을 만들어서 대중에게 다가가기 위함이다,
브리티시 록풍의 러브송을 부르는 일은 술한잔 낮에 하고 함이 어룰리는 것은 아니지만 낮술이 더러는 노래를 술술 풀리게 하는 지도 모른다. 마돈나가 아니어도, 조수미가 아니어도 된다. 음악에서 취하여 창작력으로 노래하면 그것이 뮤토피아적인 인생인지도 모른다.
나훈아는 자기만의 고유한 창작력을 높이기위해서 산길, 들길을 가기를 주저하지 않는다고 한다. 음악속에서 그는 이상향을 찾는 그런 인생을 만들어 가는 중이다.
고등학교 시절에 음반을 취입하고 수많은 히트곡을 작곡한, 노래한 나훈아는 지난 세월속에서 무수한 창작력을 만들어 가기위해서 얼마나 고뇌하는 길을 택하는 과정을 거쳤는가는 음악 소비자들은 깊이 모른다.
그만이 그런 고통의 내면을 알 것이다. 하여 뮤토피아적인 삶은 아마도 자기와의 투쟁에서 시작되야 하는 법. 이법을 알기까지 는 기회비용을 수없이 치러가야 하기에 인내가 뮤토 피아적인 삶을 가능하게 할 것이다.
창작을 한다는 것. 그것은 그렇게 생각 만큼 만만한 일은 아니다. 고민의 힘을 체험하고서야 속세에 얼굴을 드러내는 그런 과정을 거쳐야 한다. 누구든지 창작하고 싶은 욕망은 존재한다.
하지만 모두가 그것을 하는 것은 아니다. 신중현이 자기의 음악을 위해서 수없는 난관을 극복하듯이 뮤토피아는 이런 어려움의 언덕정상을 등정한 이후에야 가능한 일이다,
아무리 공들여 만든 음악도, 연주도, 노래도 장기간 롱런히트를 하기 어렵다는 것을 알면서 트롯, 발라드, 리듬엔 블루스, 교향곡, 헤비메탈을 그들은 작곡한다.
조용필의 ‘위대한 탄 생’ 팀은 하루 무대에서 몇시간 공연을 위해서 수십일간 그들의 호흡을 맞추기 위해서 비지땀을 기꺼이 흘린다. 그들은 서로의 눈빛을 보면서 연주하고 노래 한다.
록적인 키타 사운드를 조용필의 노래에 담아내는 가느다란 음원. 그것을 하나 만들어 내기위해서 무수한 밤을, 무수한 새벽을 만나야 하는 세월, 세상에 파워플한 드럼을 좋아 하지 않는 이들은 많을까?
그것이 대중음악이든, 클래식 음악이든 인간은 음악속에서 이상향을 추구하고자 하는 생각에 사로 잡히곤 할것이다. 많은 경우에 속세의 의미없는 경쟁을 하느라고 신경을 낭비한 현대 자본주의 너머에는 무엇이 존재하는가.
음반 비용을 마련하는데 어려움을 경험하지 않는 뮤토피아적인 직업 여건을 가진 가수, 작곡가, 성악가들은 세상에 얼마나 존재 할까?
이런 존재는 소수다.
소수이기에 그들에겐 희소성의 씨앗을 간직하는 특권이 주어진 것이다.
하지만 이들의 직업 환경은 대중의 냉엄한 평가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그들이 부른 노래, 그들이 작곡한 음반은 사랑받지 못하면 많은 리스크를 간직한체 저편 으로 가야 한다.
그러므로 이시간에도 뮤토피아를 이루려는 사람들은 창작력 함양을 위해서 무수히 게으름을 피우려는 자아와의 경쟁을 해가야 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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