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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09-05-02 10:3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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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리산 풍경
지리산(노고단-천왕봉 종주산행)


노고단에 비가
내린다.
기다림이었다.
어둠이 잦아든다.
어둠이 기다리는 것은 새벽이다.
새벽이 열린다.
새벽이 기다리는 것은 어둠이다.
어둠이 내린다.
어둠의 기다림에 견주어
새벽의 기다림이 더 길다 말하지 못한다.

어둠과 새벽은 서로 교차하는 기다림이기 때문이다.
시간이 공평한 것이다.
지리산의 기다림이 그러하다.
산의 어둠과 새벽은 다툼이 없는 것이다.

기다림이 있다.
어머니의 기다림이다.
오로지 자식을 기다리는 것이다.
자식은 어머니를 기다리지 않는다.
제 잘난 자식에 견주어
어머니의 기다림은 애간장을 녹이는 것이다.
그것은 내리기다림이기 때문이다.
어머니의 기다림이 아니라면,
인간의 기다림은 일방적인 것이다.
그러하니 인간의 다툼은 종결이 없는가 보다.

기다린 노고단이었다.
얄궂은 비가 내린다.
노고단돌탑에 눈짓을 보낸다.
염원이 있어서가 아니다.
비와 함께 출발하는 장도이다
그 준엄한 장도를 가늠하여 본다.
비가 내린다면 바람이 동반될 것이다.
층계 하나 내려서서 숲의 터널에 든다.

비는 내리고 나는 걸음을 옮겨 종적을 감춘다.
돌아보니 노고단도 종잡을 수가 없다.
숲의 터널에 가린 노고단이다.
노고단이 종적을 감춘 것인지,
내가 종적을 감춘 것인지 분간키 어렵다.
지리산에서는 주객을 구분키 어렵다.
비가 내려 서두른 탓만은 아닐 것이다.
지리산이 장엄한 연유인 것이다.


<피아골의 달맞이꽃>
달맞이꽃 한 떨기가 유난하다.
잎새의 끝자락에 핀 꽃잎이다.
노란색 마디마디가 하나의 은유이다.
꽃잎마다 할 말을 보듬고 있어 그렇다.
피아골삼거리에 당도한다.
경사면이 끝나 평지이다.
한낮의 시간을 조형하고 있는 달맞이꽃이다.
꽃잎에게 시간을 묻는다.
꽃잎이 연하여 오후인 것이다.

어둠을 비추는 달이 떠오르면,
달맞이꽃은 짙은 단장을 할 것이다.
밤이 짙으면 꽃잎도 농밀할 것이다.
꽃잎이 진하여 어두운 밤인 것이다.
세상이 잠들어 적요할 때에,
절절이 할 말을 뱉어놓을 심산인가 보다.
밤을 기다리지 못하니,
시간을 더는 지체할 수 없으니,
달맞이꽃의 그 밀어를 들을 수가 없다.

피아골은 동족상잔을 고스란히 겪어야 했다.
아마도 그 처절한 절규를 들려주려 하는가 보다.
아랑곳하지 않고서 피아골은 처연한 것이다.
여름엔 옥빛 계곡물이 흐를 것이고,
가을에는 오색단풍으로 자태를 뽐낼 것이다.
달맞이꽃 저 홀로는 그 세월무상에 역부족이라 밤에 피는가 보다.


<노루목의 좌표>
노루목의 공터가 고즈넉하다.
숲과 나무를 비켜 타원형이다.
얼굴마주보기에는 타원형이 적격일 것이다.
공터는 사람이 그리운 것이다.
허공이 곧 하늘이다.
하늘덕에 불현듯 시야가 트인다.
올려다보는 것이 곧 내려다보는 것이다.

하늘에 맞닿은 풍광이다.
노루가 고개를 숙이면,
그 뿔이 길이 가르킨다.
뿔을 따라 양갈래의 길이 되는 것이다.
노루목에서 바라보는 양갈래이다.
좌측의 방향이 반야봉이며,
우측의 방향이 삼도봉이다.


<삼도봉의 단애>
녹음에 파뭍힌 시간이다.
시간은 녹음속에 스며들어 자취를 감춘다.
달맞이꽃을 볼 수 없으니,
시간을 연역해낼 방도가 없다.
시간을 잊고서 삼도봉에 선다.

한 치의 오차도 없는 삼도봉 조형물의 균형을 본다.
바위의 난간에 서서 내려다본다.
난간이 천길단애같다.
돌 하나를 툭 던져 본다.
산이 깊으니 호기심에 생명을 잃을 개구리도 없다.

푸름이 짙으니,
돌의 낙하가 공허할리도 없다.
낙하하는 돌이 까마득하다.
직각의 가파른 단애가 바치고 있는 삼도봉이다.
구름이 차오르면,
너무 깊어 그 심연을 헤아리지 못할 것이다.

삼도봉의 난간이 버티고 있는 것은
그리도 깊은 계곡이 바치고 있기 때문이다.
난간으로 높이 치켜 올린 삼도의 화합인 것이다.
화합이란 어쩌면 상대를 치켜 올리는 것인가 보다.
그러하니 불화란 상대를 업신여기는 것이다.


<화개재의 만남>
햇살이 내린다.
고지가 높으니 그 뜨거움도 가깝다.
작열하는 햇살이다.
태양은 화개재를 태울 듯 뜨겁다.
그 옛날 장터의 고단함이 녹아있다.
뱀사골의 농산물이,
남해의 소금과 물물교환 되었던 곳이다.
그 높은 곳의 화개재의 역할이었다.
뱀사골에서 불어온 찬공기에 더위를 맡긴 채,
상념에 젖어 본다.

일용에 필요한 물물교환이었을 것이다.
허기를 채우는 양식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실은 사람이 중심이었을 것이다.
원초적 생존본능으로 움직인 것이다.
그것은 바로 만남이었을 것이다.
연이 닿아 혼사가 이루어졌을 것이다.
화개재덕에 배필을 만나 성가할 수 있었으니,
그것은 장터가 아니라 살터였던 것이다.


<연하천의 월광>
토끼봉이다.
구름이 손살같다.
명선봉이다.
가파름이 사다리같다.
발걸음이 지친다.
보무도 당당한 기세를 잃었다.
화살표처럼 나무계단을 걷는다.

나무계단이 끝나는 지점에 연하천산장이 소슬하다.
연하천산장에 여장을 푼다.
더 줄일 것이 없는 듯,
헤쳐보지만 몇 톨의 살외에는 펼쳐놓을 것이 없다.
펼친 부채의 곡선이듯,
그 곡선을 타고서 달이 떠오른다.

월광이 애간장을 스민다.
하늘 한가운데의 보름달이다.
선명하게 보려고 눈을 부비니 달이 사라졌다.
하얀 구름이 달을 통째로 삼킨 것이다.
사라졌던 달이 다시 중천을 가로지른다.
보름달에 정신이 함몰된다.

월영이 만들어질 만도 하건만,
하도 밝아서 월영은 없고,
월광만 있는 연하천의 달이다.
달에게 길을 물을 필요가 없다.
오늘은 더 진군하지 않고 잠을 청할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그만 월광에 얼어붙었다.
몸도 마음도 이미 나의 것이 아니다.
오직 달빛이 주재하는 데로 임한다.


<형제봉의 중심>
바위가 우뚝 솟았다.
하늘은 철따라 변하지만,
바위는 그저 말이 없다.
바위를 대하는 나의 마음은 한결같다.
바위는 살아 숨쉬고 있다고,
작열하는 태양이 내리쬐어도,
그 본래의 체온을 잃지 않는 바위이다.
바위가 숨을 쉬면서 태양열을 쫓는 것이다.

살아있기에 바위가 애절하다.
사모하는 마음이었다면 숭고할 것이다,
우애를 나눌 수 있기에 장구한 것이다.
형제봉이 지리산의 한가운데를 징표하고 있다.
보란 듯이 그렇게 형제애를 나누고 있다.

그 우애가 너무나 묵묵하여 불변인 것이다.
딱히 노고단에 12.6키로 지점이다.
노고단에서 천왕봉까지가 25.9키로이니,
대중잡아 그 가운데인 형제봉이다.
장엄하기에 무정돈한 것이 아니라,
장엄하기에 기승전결이 명료한 것이다.

동생은 형을 올려다보고,
형은 그 품을 펼쳐 동생에게 기댐을 허락하는 형제봉,
바람도 걸음을 멈추고 연신 형제봉을 숭배를 한다.
형제봉에 부는 바람이 숙연하다.
형제봉을 부는 바람은 청아하여 속까지 시원하다.
동생바위의 머리위에 자라는 소나무 한 그루가 애처롭다.
푸르디 푸르러 그 사연조차도 건장하다.
큰 바람이 불어도 흔들리지 않는 형제봉이다.


<촛대봉의 투구>
일출은 흐르는 것이다.
산의 바쁨이다.
돌들은 도망하여 더 숨을 곳이 없다.
차라리 광활한 평전이 되었다.
세석평전이 생성된 까닭이다.

세석산장에서 촛대봉을 바라본다.
촛대봉의 일출은 천하의 장관이다.
겨울 혹한에서 솟아오르는 일출이다.
초대받지 못한 바람이 연신 분다.
촛대봉에서는 바람이 태양을 이긴다.

바람이 불어 바위를 조각한 것이다.
바람이 영겁의 세월에 힘입어 바위를 이기는 것이다.
그러나 태양은 바위를 이기지 못하는 것이다.
촛대봉에서는 바람이 태양보다도 더 연장자이다.
바람결에 편승하여 형상된 촛대봉이 투구같다.
돌로 평전을 만들었으니 지켜야 할 곳은 아래인가 보다.

투구바위가 응시하는 곳은 산아래이다.
산은 위로 솟았으니,
바위는 아래를 지키는 것인가 보다.
투구는 무찔러 정복하기 위함이 아니라,
현상을 지키기 위한 위용인 것이다.
투구의 소용됨이 원래 그러한 것인가 보다.


<장터목의 주행>
연하봉의 흙길이다.
그 감촉이 새색씨 속살같다.
천년의 세월이 발에 와 닿는다.
광풍이 몰아칠 것이다.
혹한이 밀려올 것이다.
백설이 휘날릴 것이다.
사람들의 발길이 잦아들 것이다.

그러나 종내에는 사라지는 것이다.
그러하니 유구하지 못하다.
시간은 그 속성이 사라지는 것이다.
그러나 그 의미는 남는 것이다.
그 의미위로 나는 연하봉을 걷는다.
그 누군가가 남긴 의미를 견인한다.
그 누구를 위하여 나도 의미를 남긴다.
연하봉을 굽이돌면 장터목이 나타난다.
장터목의 밤은 바람이 휘젓는 밤이다.

연하천의 월광이 장터목에 재연된다.
아직 더 연주할 것이 남은 연주가처럼,
장터목에 흐르는 월광이 고혹스럽다.
그 누구라도 달빛에 빠져들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마치 종이배모양을 한 계곡이다.
달은 떠올라 종이배의 돛에 걸린다.

종이배를 이끌고 하늘로 올라가려는 심산이다.
나는 달빛에 마음을 실어 보낸다.
세속의 허장성세를 다 버린다.
산속의 무심에 젖는다.
깃털보다도 더 가벼운 몸이 된다.
가벼우니 새처럼 비상이 가능한 것이다.
나는 몸도 마음도 이미 창공을 날고 있다.


<천왕봉의 길>
제석봉의 참담한 사연을 떠올린다.
도벌꾼이 불을 지른 것이다.
자신의 도벌흔적을 감추기 위한 화마였다.
산림은 재가 되어 사라지고,
폐허의 터에 풀들이 무성하다.
새로 식목한 어린 주목나무가 수호하기에는,
제석봉이 너무 광활하다.
천왕봉을 오르는 지친 걸음이다.
걸음이 지쳤으니 마음은 더 겸허한 것이다.

통천문은 통과의례가 된다.
발을 씻는 세족식처럼,
마음을 씻은 자에게 길을 터줄 것이다.
그 언제라도 가슴이 여미어 온다.
천왕봉을 대면하는 순간이다.
그 언제라도 너무나 벅찬 것이다.
천왕봉에 오르는 순간이다.
운무가 호위하는 천왕봉이다.
풍상이 차단하는 천왕봉이다.
월광에 투영되는 천왕봉이다.
백설에 그려지는 천왕봉이다.

천왕봉에 앉아 눈을 뜰 수가 없다.
차마 똑바로 바라볼 수가 없다.
보는 것만으로는 성이 차지 않는다.
안 보이는 것이 더 장엄한 것이다.
나는 참지 못하는 인간이다.
그래서 다시 눈을 뜬다.

천왕봉의 길을 바라다본다.
구름이 군무처럼 달려온다.
천지를 깜깜하게 포위한다.
하얀 구름은 거대한 휘장이 된다.
장막처럼 아무것도 볼 수가 없다.
올라왔으니 내려보라는 것이 아니라,
올라왔으니 그 길을 잊으라는 것이다.
천왕봉이 구름을 대동하여 흔적을 감춘 이유였다.
천왕봉의 지엄한 명령은 바로 그것이었다.




[덧붙이는 글]
위 2매사진 출처: 지리산 국립공원 홈페이지에 있는 사진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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