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제공:신라TV] 박현진 편집실장과 박경범 작가와 특별대담
한국문학이 지금처럼 일반의 관심을 받은 때도 없다. 지금은 소설가로서의 활동을 보류하고 철학서를 집필하고 있는 박경범 작가를 찾아 견해를 물었다.
朴씨는 최근 哲學史上 가장 난해한 著作이라 일컬어지는 헤겔의 정신현상학을 문예작가로서의 유려(流麗)한 문장으로 번역하는 작업을 마쳤고 지금은 이미 수 년 년 초고를 마쳤던 ‘이념과 영혼’이라는 가제의 서(書)를 저술하고 있다.
일련의 작업은 우리사회의 사상(思想) 무지(無知)에 따른 혼란을 진정(鎭靜)하는데 보탬 되기 위해서라고 한다.
(問) 소설가 한강의 노벨문학상 수상에 관해 어떻게 생각하나
개인적으로는 우리 이른바 순수문단의 추세에 그리 관심을 두지 않았기 때문에 먼저 할 말은 별로 없다.
(問) 소설가 김규나씨가 한씨의 수상이 그저 한국이 받을 차례고 여자니까 유리하게 작용한 것이라고 하면서 더 자격이 있는 작가로 중국 작가를 예로 들기까지 했는데
그동안 고은 시인 등을 통해 한국을 수년간 헛물켜게 했으니 한국이 받을만한 차례라고 생각되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이런 견해가 오가는 것 자체가 문학상이 정치적인 배려일 뿐이라는 의혹을 더욱 짙게 만든다.
물론 정치인에게도 가수에게도 주는 것이 노벨문학상이라서 공정한 문학성평가를 기대한다는 것이 애초부터 무리일 수도 있지만 그래도 근현대 수십년의 세계문학을 평가하는 지표로서 대중에게 각인되어있다.
“한강 작가의 국내에서의 상대적 수상자격은 충분”
개개인의 인맥과 정치적 진영 등 여러 호불호의 입장을 벗어나서 냉정히 보아 한강작가의 수상은 수상자가 한국작가라는 전제로 볼 때 당연하다고 본다.
문단의 원로작가층이 창작역량의 상당부분을 방만(放漫)한 대하소설 집필이나 삼국지번역에 소모한 반면 한강작가는 순수문학의 주제의식에 충실한 적당분량의 중장편소설 창작으로 일관한 것이 더 높은 실질경륜이라고 볼만한다.
아직 50대인 나이를 두고 ‘서열파괴’의 눈으로 보기도 하고 소위 진보언론에서는 젊은 층의 혁명인 것처럼 호들갑을 떨기도 하는데 역시 소설가인 부친 슬하의 글쓰기 환경에서 자란 한 작가는 결코 문인경력이 덜한 것도 아니다. 가수로서 초원로급이지만 아직 생생한 나이인 하춘화씨가 생각난다(웃음).
“국민언어퇴보 방치한 한국작가집단 세계적인 賞 받을 자격 없어”
다만 한국작가의 수상이 기계적인 순번이나 할당에 의한 것이 아니라면 세계적인 상을 받을 자격이 있는지는 돌아봐야 한다. 문학인의 첫째의무는 국가의 언어를 바로잡는 것이지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
현재 우리 국민은 심각한 문해력 저하와 자국 언어 어휘의미(語彙意味)의 무지(無知)로 인한 국민전반의 자기표현력 부족으로 집단적 정서불안 상태에까지 와 있다.
미군정(美軍政) 이후 요구되어온 한자사용금지로 수천년 우리역사도 국민에게 제대로 못 가르치고 자기 사상(思想)의 정확한 표현도 제한되고 있다.
물론 그런 환경을 만든 정치권력자들에게 먼저 탓을 돌려야겠지만 이런 실정이 자기개인에게는 그다지 불이익이 되는 환경이 아니라고 해서 제대로 저항의 목소리 한 번 안낸 한국 작가집단이… 비권력(非權力) 양심가(良心家)에 힘을 실어주는 것이 목적이기도 한 세계적인 상을 받을 자격이 된다하긴 어렵다.
(問) 한 보수단체가 스웨덴 대사관에 가서 역사를 왜곡한 글을 쓴 이에게 상을 준 것을 규탄했다고 하는데
현대사의 사건은 진영에 따라 견해차가 있는 만큼 글에 인용된 사실의 확인 작업을 거쳐야 할 것이다. 그러나 소설이 실재(實在) 여부에 책임을 지지 않는 것도 상식이다. 범죄자의 입장도 옹호하는 것이 소설이다.
소설에 의한 ‘사실왜곡’을 규탄하는 세력은 스스로 문학과 예술을 등한시하면서 ‘왜곡된 선동문화’에 취약한 대중을 길러내는데 자신들도 일조했음을 반성해야 할 것이다.
(問) 원로작가 이문열씨는 “나는 노벨 문학상에 맞는 인물이 아닌 건 알지 않나. 책을 많이 팔아서 잘사는 작가는 안 된다”고 했는데
그분이 보는 잘사는 작가의 기준이 어느 정도 인지는 모르지만 한강씨도 이미 충분히 잘사는 작가이다. 결코 초베스트셀러작가가 아닌 것이 수상에 플러스된 것은 아니라고 본다.
(問) 이번에 우리문학의 외국번역수출로 국위선양을 했고 국민의 문학에 대한 관심이 높아져 문학이 널리 보급되는 것에 긍정적인 관측이 있는데
앞서 말한바 있는 우리국어 표현력의 퇴보로 우리는 근대 유럽의 부강을 이끌었던 서양사상들도 제대로 소화하지 못하고 있다. 아직 우리 국민은 근대선진문명을 더 배워야 할 입장이지 근대선진문명의 종주국 국민들을 가르쳤다고 신나고 뿌듯해할 처지가 아니다.
순수문학의 대중보급에 관해서는, 비록 지금 같으면 같은 식으로 표현하진 않았겠지만 그래도 주제가 일치하는 오래전의 칼럼을 보여드린다.
<박경범 작가의 과거의 '순수문학'관련 칼럼>
共同體 붕괴에 一助하는 우리 문학 '순수문학'의 대중전파를 통한 사상운동 2004.03.29
얼마 전에 프랑스의 역사적인 대중문학 작가 알렉산더 듀마가 영웅국립묘지로 移葬됨은 대중문학에 대한 인식 변화 등 프랑스의 새로운 사회 흐름을 반영한다고 평가되었다. 이제까지 듀마의 소설과 희곡들은 프랑스 안팎에서 베스트셀러였지만 학계는 “지나치게 대중적이고 깊이가 없다”며 무시했었다. 그러나 개혁적인 문학 단체 등이 “듀마만큼 당시 시대 상황과 문화를 잘 묘사한 작가는 없다”고 반발하면서 논쟁이 계속되고 마침내 시라크 대통령이 이것을 받아들여 이장 포고령이 내려짐으로써 논란의 종지부를 찍었다고 한다.
대중문학은 보수적인 주제 담아
이 사례만을 보면 마치 대중문학은 진보적인 성격을 갖고, 학계가 지지하는 순수문학은 보수적인 성격을 갖는 것인 양 여겨지기 쉽다. 그러나 실제로 보면 대중문학이야말로 보수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 것이다. 대중문학의 주인공들은 거의가 보통 인간이 모범으로 삼을 만한 全人的 성격을 가지고 있으며, 줄거리와 주제도 惡을 퇴치하여 이 세상을 건전하게 유지하자는 범주에 머물고 있다. 독자로 하여금 이야기에 흥미를 유발하고, 독서를 통해 세상의 섭리를 자연스럽게 음미하도록 하기 위한 목적 때문이다.
순수문학은 인간의 본질 탐구 위해 세상의 裏面 담아
그러나 인간의 탐구를 목표로 하고 있는 순수문학의 경우 그 주제는 단순하지 않다. 순수문학 작품의 대명사라고 할 만한 A.까뮈의 <異邦人>의 경우를 보면, '어머니의 장례식 날 섹스를 하고 바닷가에서 이유 없이 사람을 쏘아 죽인', 不條理의 전형을 보여주는 주인공 뫼르소를 통해, 인간은 누구나 때로는 자신의 理性을 벗어나서 이해될 수 없는 부조리한 행위를 할 수 있는 운명을 타고났음을 보여주고 있다. 작품의 視線은 한 '破廉恥(파렴치)한 惡人'인 뫼르소의 입장에 서 있고 그를 단죄하는 재판관은 인간의 본질에 無知한 群像(군상)의 하나일 뿐이다. 또한 순수문학의 경우 전쟁을 다루었다 하더라도 결코 영웅적인 업적의 칭송에 그치지는 않고 그에 따르는 인간적 고뇌와 세상가치의 모순과 허위 등을 파헤친다. 이로 인해 독자는 세상의 裏面(이면)을 보는 눈을 기르게 된다. 그러면 순수문학이란 이렇게 세상일을 뒤틀린 視角으로 바라보기만을 즐겨하는 반항적 좌파를 대변하는 문학이란 것인가? 그것은 결코 그렇지 않으며 그 목적은 앞서 언급한대로, 독자로 하여금 인간과 세상의 원리에 대한 깊은 통찰력을 기르기 위한 인간세상 裏面에 대한 탐구와 해석인 것이다.
순수문학의 표현에는 고급언어의 使用 필수적
이를 위해서는 상황묘사 또한 결코 단순하지는 않아야 하며 섬세한 분위기 설정과 전달을 위한 고수준언어의 동원은 거의 필수적이다. 독자는 줄거리를 따라가며 인간의 본질을 탐구하는 과정에서, 상황을 세밀히 묘사하는 고급언어를 통해 情緖(정서)와 思考를 高揚(고양)함으로써 순수문학이 추구하는 목표를 얻을 수 있는 것이다. H. 헷세의 <유리알 유희>를 읽으면, 국내소설에서는 순수문학이나 대중문학을 막론하고 사용빈도가 높지 않은 고수준 어휘로 메워져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들 어휘는 한글표기만으로는 표현이 달리는 것들로서, 한글전용의 국내작가들로서는 결코 이러한 소설을 쓰지는 않을 것이다.
순수문학의 '비틀린' 주제를 한글전용으로 쉽게 써서 널리 보급하는 우리
이렇게 국내의 경우, 소설은 한글전용을 한다는 기본원칙(?)하에 순수문학의 경우도 한글로 '쉽게' 쓰여져 널리 보급되고 있다. 이것을 두고 우리나라가 순수문학('본격문학')의 대중전파도가 세계에서 이례적으로 높다 하여 긍정적인 평가를 하는 측도 있다. 까뮈의 <異邦人>이후 허무주의를 강조한 亞流作들은 국외와 국내를 막론하고 무수하다. '어머니의 장례식 날 섹스를 하고 이유 없이 사람을 죽이는' 자에 대한 동정심(?)을 유발하는 글을 '쉽게' 써서 내면적 통찰능력이 부족한 대중들에 널리 보급한다고 해서 이 사회에 돌아오는 이익은 과연 무엇일까. 자신의 공동체를 지키기 위해 희생된 영웅들의 이야기를 허무주의적이고 회의적으로 바라보며, 絶代善은 없다는 투로 고뇌하는 인간의 이야기를 '쉽게' 써서 대중에게 널리 전파하여 어떤 효과를 보겠다는 것인가.
공동체 붕괴조장의 문학에 공동체의 지원이 있어온 우리 나라
게다가 可恐(가공)할 일은 이러한 공동체 붕괴조장적인 문학을 그 공동체의 당국에서는 일찍부터 이른바 순수예술지원이라는 명목으로 시장논리를 넘어선 지원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근래의 베스트셀러이며 젊은 학생들의 '필독서'라 하는 조정래의 <太白山脈>과 60년대 출간이후 수십년간 우리 현대문학의 독보적인 금자탑으로 다소 과대평가되고 있는 최인훈의 <廣場>은 바로 그 대표적인 예라 하겠다. 반면에 추리작가로 알려져 있는 김성종은 출세작 <최후의 증인>에서 빨치산 출신인 자를 악인으로 묘사하는 '큰 실수'를 저지른 바 있었다. 이후 김성종은 熱火와 같은 추리소설 집필 청탁을 받아 추리소설작가로 굳어졌다. 본인으로서는 어느 정도의 富를 얻었는지 모르지만 (이른바 순수문학작가로도 그 정도는 얻을 수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이후 그는 정통 한국문학에서 완전히 소외되었다.
진정한 문화지도자는 순수예술과 대중예술의 차이점 理解해야
근래 각처에서 '文化를 아는 대통령이 나와야 한다'하는 文化人들의 기고가 심심찮게 눈에 띄었다. 하지만 정말 文化를 아는 지도자는 바로 이 순수예술과 대중예술의 역할의 차이를 명확히 인식하는 지도자이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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