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메일전송
  • 기사등록 2022-01-25 21:13:58
  • 수정 2022-02-03 13:45:13
기사수정

고향 옥계(玉溪)의 산과 물과 바람과 어머니를 노래하다.


 

 내 고향 ‘옥계(玉溪)’는 산과 산 사이에 자리해 있다. 마을 앞쪽에 작은 들과 갱분(하천부지로 경작하지 않는 땅))이 있었고, 그들 너머에 작은 하천과 함께 앞산이 서 있다. 비록 행정구역은 다르지만, 앞산 너머에는 골을 사이에 두고 조선팔경중의 하나로 손꼽히는 국내 최고 명산 중의 하나인 가야(伽倻)산(주봉, 상왕봉)이 자리해 있다. 국내 3대 사찰 중의 하나인 해인사(海印寺)를 품고 있는 그 가야(伽倻)산이다. 

 

 개울과 앞들을 사이에 둔 윗말과 아랫말을 합해도 지금은 30여 호(戶)가 채 안 된다. 80년대까지만 해도 윗말, 아랫말을 합해 100여 호(戶)는 족히 됐다.

 

 그 시절에는 동네가 늘 왁자지껄했다. 골목마다 아이들로 넘쳐났고, 집집마다 빨랫줄에 흰 기저귀가 펄럭댔다. 이런 풍경을 이 땅 그 어디서도 이제 더는 찾아볼 수 없다. 삶의 제 방식이 바뀌고, 아이를 기르는 방법 또한 변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 보다는 아이를 생산할 젊은 부부가 아예 이곳을 포함한 우리의 농촌에 살지 않기 때문이다. 

 

 지금까지도 그 모습에 큰 변화가 없지만, 70년대 중기까지만 해도 옥계는 전형적인 농경사회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호롱불을 켰고, 아궁이에 불을 지피는 방식으로 밥을 짓고, 구들을 데웠다. 가축이래야 집집마다 키우는 한두 마리 소와 돼지, 닭이 전부였다. 간혹 토끼를 키우는 집이 있고, 개 또한 기르고 있었지만, 개는 가축의 범주에 들지 않았다.

 

 농사는 밭과 논을 함께 경작 했는데, 벼를 키우는 논농사가 큰 비중을 차지했다. 이 지역의 논은 전부 천수답이다. 밭작물로는 들깨, 참깨, 고구마, 감자, 수수, 조, 옥수수, 콩, 땅콩, 고추 등이 있지만 이들을 재배한 이유는 순전히 자족용이었다. 풍년이 들어 조금 남으면, 그 여분을 장에 내다 팔기도 했다. 그것을 판돈으로 갈치나 고등어, 새우젓, 미역, 파래, 김 등 해산물을 사 먹기도 했다.

 이곳은 내륙이라, 생선이 귀하기도 했지만 잘 먹지도 않았다. 특히, 내 아버지는 생전에 생선은 아예 입에 잘 대지도 않았다. 비리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해질녘이면, 등에 아이를 업은 젊은 아낙이 삼거리 ‘주막(酒幕)집’에서 막걸리에 노름하는 젊은 신랑을 찾아 나서던 때다. 젊은 아낙이 짧은 다리로 다잡고 서서, 다짜고짜로 주막집 사랑방문을 벌컥 열면, 놀란 젊은 신랑이 붉은 얼굴로 신발도 미처 신지 못한 채 총알같이 튀어나온다. 이내 젊은 신랑이 젊은 아낙의 손목을 잡아끌며, “여기가 어딘 줄 알고 왔느냐.”냐며 두 눈을 부릅뜬다. 그 시기에는 그랬다. 남존여비(男尊女卑)라는 말이 그 때까지는 통했다. 그러나 그것은 외양이며, 속(실제)은 그렇지 못했다. 등 뒤 아이가 뭣을 아는 듯 큰 소리로 울어 재낀다. 젊은 아낙이 등 뒤 아이를 풀어내려 신랑에게 내팽기듯 던져 안긴다. 그리고는 종종걸음으로 주막의 사립문을 발로 차 재껴 열고, 내달린다. 하는 수 없게 된 것은 신랑이다. 누구 엄마, 누구 엄마를 외쳐대며 채 신기지 않은 검정고무신을 질질 끌며, 뒤따른다.

 

 노름판은 이미 깨졌다. 오늘만이 날은 아니지 않은가! 내일도 있고, 모래도 있다. 그 때, 다시 와서 놀면 된다. 그게 이 젊은 신랑의 속마음이다. 하지만, 그 속마음을 젊은 아낙이 모를 리 없다. 그래서 젊은 아낙은 더 없이 강한 어조로 젊은 신랑을 옭맨다. 시간이 깊어지자, 그 소리가 작은 울음으로 끝내 바뀌고 만다. 젊은 아낙의 울먹이는 소리가 점차 커지면서 봉창을 타고 넘는다. 두 손 두발을 다 모아 싹싹 빌며, 아내를 달래는 투박한 젊은 신랑의 목소리가 기어이 담장까지 넘는다. 골짜기마다 그 소리들로 새겨진다.

 

 이미 모든 불빛이 지고 없다. 이 동네에 불빛지면, 남는 것은 칠흑 같은 어둠이다. 그나마 그 어둠을 걷어는 주는 것이 달빛이다. 이들 부부의 토닥대는 소리가 달빛에 젖어들 즈음이면, 용케도 새벽닭이 운다.

 

 이젠 그림자로 남은 이 옥계의 옛 풍경이 아리하게 정겹다. 어느 덧 세상이 변해 버렸다. 다만, 그 속의 사람은 아직 그대로다. 그들 중의 한 분이 바로 내 어머님이다. 여든 중반을 넘기셨지만 아직도 강건하시다. 내 복(福)이다. 아직도 내 처는 이 점을 모르는 듯하다.

 

 젊은 부부의 농사일은 새벽부터 밤까지 이어진다. 정말 고된 일상(日常)이다. 그게 싫어서 이곳에서 살던 이들 대부분이 그 시기 고향을 등진 것은 아니다. 그들이 고향이라며 남겨두고 굳이 이곳을 떠난 것은 그것으로는 더 잘살 수 없었기 때문이다. 바로 다들 더 나은 삶이 도회지에서 기다리고 있다고 믿었다. 그 흐름은 밀물과도 같았다. 소리 없이 나더니, 이삿짐이래야 별 것 없지만, 이내 너도 나도 다 이삿짐을 쌌다. 나도 바로 그 때 고향을 떠나왔다. 그 후 줄곧 서울에 살면서 공부하고 일하다 현재의 처를 얻어 정착했다.

 

 그래서 옥계는 내가 사는 동네가 아니라 고향이다. 옥계(玉溪)는 내 고향이다. 옥계(玉溪)에는 이태 전에 돌아가신 아버님 산소가 있고, 어머님이 노구를 이끌고 혼자 사신다. 그런데 이미 여든 중반을 넘긴 고령이신데도 내 어머님은 내게 영 노인처럼 뵈질 않는다. 부모자식 간이어서 그런가? 아니면, 내 어머니만이 유독 젊게 뵈는 건가? 남들의 눈에 내 어머님 모습이 어떨지 궁금하다. 아직도 어머님은 당뇨나 고혈압 등 노인성 질환을 갖고 있질 않다.

 저녁 잘 챙겨 드시고, 아침에 못 일어나신 아버님을 생각하면, 가슴 아프다. 그 아버지를 위해 내가 한 일은 아예 없다. 내 아버지는 나를 위해 밤낮 농사일로 고된 일상을 견디셨던 분이다. 그런 아버지의 임종을 장남인 내가 지키지 못했다. 그럼에도 나는 아버지 장삿날, 아파하지도 슬퍼하지도 말라고 동생들에게 말했다. 나는 참 불효자다. “아버지, 죄송합니다. 용서를 구합니다.”

 

 지금 고향에는 그 당시 아이들을 키워낸 일흔을 넘긴 노인들만이 고향을 지키고 있다. 산 아래 가다랭이 논들도 경지정리가 되어 이제는 농사짓는 일도 한참 편해졌다. 일일이 지개로 져 나르던 (농사)일을 이제는 (농)기계가 대신한다. 비록 노인들만이 머무르지만, 여전히 농사를 지을 수 있는 것도 바로 그 기계들 때문이다. 농사일이 한결 쉬워지면서, 이곳에 사는 노인들의 삶 또한 한결 여유로워졌다.

 그래서 객지에 나가 사는 아들딸의 방문을 더 기다린다. 이 동네에 사는 이보다 이 동네에 객이 더 많이 머무는 때가 더러 있다. 명절(名節) 때이다. 추석이나 설날에는 고향이라고 다들 이곳을 찾는다. 부모형제가 있든 없던 타향살이에 지친 몸을 쉬기 위해서다. 언제 떠났든 그들의 안식처는 바로 고향이다. “고향은 늘 어머님 품속 같다.”고 노래한 어느 노 시인의 마음을 (비로소) 알 것 같다.

 

 어느새 나도 그 서정(抒情)을 이해할 수 있는 나이가 됐다. 고향 옥계(玉溪)의 아침나절은 산과 산이 겹쳐 짓는 골마다 흰 안개가 나려 일색(一色)으로 장관이다새봄이면, 더 진한 풍경을 낸다. 어느 시인이 이 전경에 반하지 않으며, 어느 화가가 이 풍경에 빠져들지 않으랴!


 산과 산이 물길을 내고, 물길이 바람을 짓는 내 고향 옥계(玉溪). 서울에 머물다가 고향엘 가면, 그 산과 물과 바람이 짓는 여유와 비경에 취한다. 그기에 어머님이 서 있다. 산과 물과 바람과 어머니가 서 있는 전경, 그 전경은 아무리 쳐다봐도 식상하기는커녕, 퍽 정겹다. 고향 옥계를 떠나올 때면 언제나 내가 한참 동안 멍하니 서서 뒤를 돌아보는 이유를 비로소 알게 됐다. 내 등 뒤에 고향 옥계의 산과 물과 바람과 어머님이 늘 함께 서 있는 까닭이다. 고향 옥계의 산과 바람과 물과 어머님을 노래할 수 있어서 더 없이 행복한 나다.

 

2015.4.17

0
기사수정

다른 곳에 퍼가실 때는 아래 고유 링크 주소를 출처로 사용해주세요.

http://worldnews.or.kr/news/view.php?idx=23947
기자프로필
프로필이미지
나도 한마디
※ 로그인 후 의견을 등록하시면, 자신의 의견을 관리하실 수 있습니다. 0/1000
모바일 버전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