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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22-01-24 16:56:41
  • 수정 2022-02-16 04:3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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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의 행복


 내 어머니는 신유년(1933년) 8월 15일(음력) 생으로 일제치하에서 나셔서 우리나이로 여든아홉을 맞은 신축년(2021년) 4월 14일(양력) 오후 7시 01분에 운명(運命)을 달리하셨다. 어머니가 국민학교(일제치하의 학제에서는 현재의 ‘초등학교’를 ‘국민학교’라 부름)에 다니실 때는 일본선생이 일본말로 가르치는 바람에 일본어를 배우셨다고 했다. 그 때문에 어머니는 간혹 일본말을 쓰기도 하셨는데, 자주 쓰셨던 일본 말 중에 하나가 “오늘은 날씨가 좋다.”는 의미의 “교우와 오뎅끼데쓰네”셨다.


 어머니가 그 말을 자주 쓴 이유는 가야산 자락이 깊게 뻗어 나려 앉은, 땅이 척박하기 이를 데 없는 골 깊은 두메산골에서 사시다 보니 자연히 다랑논 농사일에 매달렸고, 다랑논 농사일이라는 것이 일기의 영향을 크게 받은 터라 그랬지 싶다. 다랑논 농사일뿐 아니라 밭작물 또한 일기의 영향을 크게 받기 마련이다.


 이런 어머니의 옛 모습을 오늘에 되새겨 보니, 이는 분명 남 다른 어머니의 모습이셨던 게 분명하다. 당시만 해도 일기예보가 늘 정확한 건 아니지만, 그래도 그것을 듣고 내일 해야 할 일을 사전에 준비해 어머니가 임하셨다는 생각을 하니, 어머니의 일상이 충분히 합리적이셨다는 생각이 든다.


 젊은 시절뿐 만 아니라 여든이 훌쩍 넘은 노구를 이끌고도 어머니는 방송에서 전하는 일기예보를 늘 노치지 않았다. 산자락이 줄지어 늘어진 두메산골 골 깊은 곳에서 평생 동안 땅을 일구는 일에 매달린 어머니셨으니, 그 일기예보가 어머니에게는 언제나 변함없이 무척 소중할 수밖에 없었던 셈이다.


어머니가 한창 일하실 장년기까지는 호롱불을 켜고 사셨고, 내가 고등학교에 입학할 즈음인 70년대 중기에 이르러서야 20여 호 남짓한 동네 어귀에 전봇대가 놓였다. 그 때서야 비로소 전등불이 집안을 환히 밝혔다. 그 시기 나는 학업을 위해 어머니 곁을 떠나 서울에 있었다.


 아무튼 하루의 일기는 어머니의 일상을 결정하는 단초였다.


 그랬지만 어머니의 어릴 때 꿈은 다른 곳에 있었지 싶다. 자화자찬(自畵自讚)이신지는 모르지만, 어린 어머니는 무척 총명하셔서 국민학교 재학 중에는 월반을 밥 먹듯이 하시기도 하셨다고 했다. 하지만 어머니는 그 국민학교를 정상적으로 졸업은 하지 못하셨던 것 같다. 그 이유를 정확히 알 순 없었지만, 당시의 집안 사정보다는 사회풍조 때문이 아닌가 한다.


 당시 나의 외가는 부농에 속해서 먹고 사는 데는 문제가 없었다고 했다. 그런데 당시 우리사회는 일제치하로 시대적 전환기이기는 했으나, 여전히 양상(兩常, 양반과 상놈)을 따지는 봉건적 유교사상의 틀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거듭 말하지만 어머니가 국민학교를 졸업해야 했던 그 시기 한국은 일제치하에 있었고, 근대화 물결이 사회전반에 확산되던 때이기는 하지만 남존여비의 봉건적 유교사상이 한국사회를 지배하던 때였으니, 여자아이가 제아무리 총명하여도 학업을 제대로 잇는 경우가 매우 드물었다.


 더구나 여자아이의 경우 국민학교를 졸업하고 상급학교에 진학 한다는 것은 아예 꿈도 꾸지 못할 일이었다. 특히 당시 국민학교 상급반이 되면, 곧 졸업할 나이가 되면 가족 모두가 고된 농사일에 매달리다 보니 정지(부엌)에서 밥을 짓는 등 집안의 일손을 돕는 것이 우선이었다.


 그런 속에서도 어머니의 시간은 물 흐르듯 흘러갔고, 어머니 17곱살 나던 해에 육이오 전쟁이 발발하였고, 전쟁이 발발한 지 한 달 보름 여 만에 북한 인민군은 어머니가 계시던 그 곳 그 두메산골에까지 진주했던 모양이었다. 그 전쟁 통에 어머니는 고개 너머 동네에 사시던 이모의 소개로 아버지와 혼인을 하셨다고 했다. 


혼인과 함께 일찍이 천사가 되어버린 누이가 났고, 뒤이어 내가 나고, 다음으로 여동생 남동생 둘이 연이어 더 태어났다. 그들이 자라 이미 혼인들을 다 했고, 어머니는 손자 넷과 손녀 둘을 두었다.


 이렇듯 혼인으로부터 70여년의 세월이 어느덧 흘러 어머니는 구순의 턱밑까지 다다랐다. 구순을 턱 밑에 두시고, 어머니는 홀연히 내 곁을 떠나신 것이다. 문제는 어머니에게 증손자를 안기지 못한 점이다. 어쩌면 어머니는 증손자를 기다려 품에 안아보고 싶었을 게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두 명의 외 증손자, 증손녀를 품에 안아보신 점이다.


 사실 지난 해 추석 때까지만 해도 건강에 별 탈이 없었던 어머니께서 그 다음 달인 11월 중순 경 갑자기 몸에 이상증상이 나타나셨던 모양인데, 때 마침 독감예방 주사까지 맞으신 모양이셨다. 그 후 몸에 열이 나고, “머리가 아프시다.”며, 어머니가 예 달리 “병원에 입원을 해야겠다.”고 하셨던 모양이다. 


구순을 턱 밑에 두실 때까지 어머니는 감기한 번 앓지 않으셨다. 그런 어머니가 “병원에 입원을 해야 하겠다.”고 하셨으니, 어머니 병이 간단치 않았던 것을 어머니는 진작에 알고 계시지 않았나한다.


 더구나 어머니께서 병원에 입원을 하시면서, “내가 집에 돌아가지 못할 것 같다.”는 말씀을 하셨던 모양인데, 나는 그 말을 사전에 듣질 못했다. 어머니 말씀대로 어머니는 그 날 병원에 입원한 후 잠시 짬을 내 한 차례 고향집에 들리기는 했지만 차에서 내리지 못하셨고, 그게 살아생전 어머니가 집에 머문 마지막 시간이셨다.


 이래저래 더 마음 아픈 것은 어머니가 병원에 계신 지난 6개월 여 기간 동안 코로나사태로 일절 대면면회가 되질 않아 어머니는 참으로 쓸쓸히 병상에 홀로 계시다가 끝 내 운명하시고 만 것이다. 나를 비롯해 자식들로서는 어머니에게 여간 미안함 마음이 들지 않을 수 없다. 


그 아프신 어머니를 곁에 모시고 보살피지 못하고, 급기야 어머니 병상 곁에서만이라도 어머니를 보살펴야 했는데 그 조차도 하지 못했으니, 자식된 도리로서 참으로 못할 짓을 하고야 말았다. 


여하튼 이승에 어머니가 머무른 90여 년 동안 어머니가 한 일은 농사를 짓는 일이었고, 그 농사일로 시집온 그 날로부터 시집온 그 동리를 단 한 번도 마음 편히 벗어나지 않으셨다. 농사를 짓는 격한 노동에 힘이 드실 법도 한 데도 어머니는 동네 우물에서 물을 길어 밥 짓고, 빨래터에 나가 빨래를 하는 등 집안 살림 또한 다 하셨다. 


그런 탓에 어머니의 손에는 물이 마를 날이 없었다. 어디 그뿐인가. 어머니의 손에는 늘 호미나 낫이 들려 있었다. 그런 어머니 덕에 나는 일찍이 그 두메산골을 벗어나 너른 도시 서울에서 중학교를 졸업하고, 대학까지 학업을 마쳤다.


 고등학교에 다니던 때 방학을 맞아 내가 시골에 내려갔더니, 어머니가 밑도 끝도 없이 내게 말했다. “야, 야. 나는 그 어떤 관광을 가는 것보다도 밭에서 일할 때가 가장 행복하단다. 호미를 들고 있는 이 시간이 너무나도 행복하단다.” 이렇듯 나의 어머니는 90평생을 허리한번 제대로 펴지 않으신 채, 땅을 일구며 사셨다. 그런 어머니를 보내셨으니, 자식된 자로서 마음 아프기가 이루 말할 데가 없다.


 나는 푸른빛이 감도는 어머니 영구를 앞두고도 마음껏 울어대지도 못했다. 작은 체구였지만, 병상에 있던 그 6개월 새에 어머니를 떠받히고 있던 그 단단한 몸의 근육들이 그새 다 어디로 가버렸는지 어머님의 몸은 앙상한 뼈만 남았다. 어머니는 자식을 위해서만 사셨다.


 그런 나는 어머니께 자식이 된 도리를 다하기는커녕 내 손으로 따뜻한 밥 한 그릇 어머님께 올리지 못했으니, 그 불효의 크기가 태산보다도 더 크다. 하물며 그 어머니의 임종마저 지키지 못하였으니, 그 애달픔이야 말로 어이 다하랴. 어머니가 내 행복의 전부였음을 나는 왜 진작 깨닫지 못했는가. 그게 회환으로 남아 참으로 아쉽고, 아프기가 하늘만큼 높고 깊다.


202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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