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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21-06-01 10:56:28
  • 수정 2021-06-09 15:37: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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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득환 대기자/논설위원

어머니의 노래

 

더러 불쑥 어머니에 대한 생각으로, 마음이 간절할 때가 있다. 내 몸이 아프거나 내가 궁지에 몰릴 때면, 어머니가 더더욱 간절해진다. 어머니의 몸에는 자식에 대한 헌신과 희생이 녹아 있다는 것을 자식인 내가 먼저 알고 있는 것이다.

 

 이른 새벽 문득 눈이 떠져 허리를 꼽추 세웠다. 늘 상 하던 버릇처럼 오늘 새벽에도 나는 어김없이 눈앞을 스치는 짧은 영상을 붙들고 늘어진다. 이른 새벽 내 영혼을 툭 치는 영상은 '어머니'다. 내 어머니는 계유년(1933년) 생이라 올해로써 고희를 넘긴지 5년째다.


 가끔은 허리가 아프다 하시거나 무릎이 아프다 하시지만, 발그레한 볼 살과 빠른 발동작을 가지신 분이 내 어머니다. 그 연세면 어머니는 분명 할머니다. 조금만 움직여도 숨이 차고 발이 느려지기 마련이다. 그런데 어찌된 영문인지 내 어머니의 발은 언제나 빠르다. 자연히 몸 또한 빠르다.

 

 어머니는 언제나 새벽 별이 지기 전에 일어나 쇠죽을 끓이고, 아침 밥상을 차린다. 지난 추석날만은 예외였다. 며느리 셋이 추석이라 하여 아이들을 데리고 대거 고향집엘 다니려왔다. 이 날 아침 상 차리는 일만은 며느리들 몫이었다. 단 하루지만은 어머니에게 일 하나가 줄었으니 의당히 어머니께서 그 만큼 쉬려니 한다. 그러나 어머니에게는 또 다른 일이 있다. 아침 상 차릴 시간에 밭에 나가 알밤을 줍고, 고구마 한이랑 캐서 머리에 이셨다.


 아침 이슬이 어머니 치마 섶에 매달려 치마 끝단을 모두 적셔놓았다. 고쟁이를 입긴 했지만 발목을 덮는 것은 아니다. 이슬 머금은 치마끝단이 발목에 닿을 때 마다 이죽거리듯 달라 드는 냉기에 어머니는 깜짝깜짝 놀라셨을 테다. 개와 고양이는 말할 것도 없고, 마구간 송아지가 그런 어머니의 발자국 소릴 먼저들은 모양이다. 


삽짝(사립문)이 한조금 떨어진 곳에 어머니가 나타나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그 쪽을 향해 다들 우러러 한달음이다. 정작 삽짝에 제일 늦게 당도한 것은 오히려 자식인 나다. 어머니가 삽짝을 들어서 마당을 가로지르자 개는 어머니 오른 팔에 매달리려 뜀박질이고, 송아지는 한 춤 왼 쪽 뒤에 서서 느린 걸음으로 따른다. 


어머니 서 너 발치 뒤에는 고양이가 늑장 걸음이다. 다들 고양이 늑장 걸음을 본적이 있는지 모르겠다. 한껏 어깨에 힘이 들어가 있다. 나만 멀찍이 서서 그런 어머닐 그냥 물끄러미 바라만 보고 있다. 어머니를 향한 자식인 나의 교감이 개나 송아지, 급기야 고양이만도 못한 셈이다. 그런 자식일지라도 안쓰러운 것이 어머니다.


 어머니 댓돌에 신발을 벗더니 뒤돌아서서 나를 향해 "애야! 배가 고프지 않으냐? 하신다. 어머니 그 말이 멋 적어 나는 등을 돌리고 만다. 그때서야 개, 고양이, 송아지는 더 이상 '엄닐(어머니를' 필자)' 따르지 못하고 멀찍이 선다.

 

 어머니께 좋은 음식 권하기도 쑥스러운 한심한 나. 어머니가 개, 고양이, 송아지를 사이에 두고 내 등 뒤에 서버렸다. 그래도 아량 곳 하지 않고 어머니는 내 등을 향해 다시 한 번 "배가 고프지 않느냐?"고 되묻고는, 돌아서더니 이내 날 다시 부른다. "얘야! 돼지고기 썰어놓았다. 


어서 와서 먹어라"하신다. 그 말에 개, 고양이, 송아지가 모두 제자리로 돌아갔지만 정작 나는 할 말을 잃었다. 나는 개, 고양이, 송아지만도 못하구나, 나는! 그런 생각을 잠시 했을 뿐 내 몸은 어느 새 부엌에 들어선다. 그리고 어머니가 쓸어 놓은 돼지고기에 젓가락을 갖다 댄다. 


그 때, "어머니도 한 점 하시지요?" 라며, 젓가락을 들었다면 오죽 좋았을까? 하지만 나는 반백년 동안 어머니에게 결코 그런 말을 해 본적이 없다. 다들 나의 이런 행동을 두고 참으로 어이없다할 것이다. 하기야 정작 생각하건대, 어디 나뿐이랴! 어머니에게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이가 얼마나 되랴! 이렇고 보면 어머니에게는 참으로 한심한 것이 자식이다. 


어쨌든 나는 오늘 새벽 별이 지기 전에 일어났다. 그리고 아파트 베란다를 향해 다가서다가 얼른 뒤돌아 현관을 향했다.


 아니 벌써 가을이 깊은가보다. 냉랭한 가을 기운이 온 몸을 적신다. 냉랭한 기운에 떨고 있는 것은 나만이 아니다. 여전히 푸른 잎을 달고 있지만, 냉랭한 기운에 은행나무조차 떨고 있는 모양이다. 달빛바람에 은행 알 떨어지는 소리가 토도독 톡 한다. 


그 소릴 듣노라 잠시 넋을 놓고 서 있었다. 인기척에 뒤돌아보니 잰걸음의 우유배달 아줌마와 신문배달 학생이 내 곁을 스쳐 지난다. 서로 못 본 체 지나가지만 그 둘은 연배로 보아 모자지간이라 해도 좋을 듯하다. 문득 저 신문 배달하는 아이만은 자신의 어머니 속을 알 것도 같아 나도 몰래 얼굴을 붉히며 존경심을 그의 뒷모습에 대고 표했다. 두 사람 모두 내 시야에서 사라졌다.

 

세월이 바람같이 흘러 서러우실 어머니! 나는 보는 이 없지만 붉은 얼굴을 하고 속말로 어머님께 좀 더 잘해야 하겠다는 생각을 한다. 어머니가 미각을 잃기 전에 더 맛있는 음식을 드시게 하고, 허리가 덜 굽도록 일 또한 적게 하도록 하고, 아이를 자주 보내 손자의 재롱 또한 더 보여드려야지 한다. 


하기야 손자조차 이미 성인이 된 마당이니 증손자를 안기는 일 외에는 어머닐 기쁘게 할 방법이 또 없어 보인다. 평생을 농촌에서 일만하시고 사시는 어머니, 그곳을 떠나면 죽는 줄 알고 애써 떠나자는 아버지의 성화를 끝내 물리치셨다는 어머니, 그래서 그나마 이 정도라도 사신다는 내 어머니, 그런 어머니를 아버지는 늘 한심하다하신다. 


아버지 말로 아버지는, '터구(멍텅구리, 필자)'하고 살아서 자신이 요 모양 요 꼴이라 하신다. "저애 서울 보낼 때 같이 갔더라면 저 애도 사는 것도 달라졌을 테고, 아버지의 삶 또한 달라졌다"는 것이다. 하기야 누가 자신 삶의 한치 앞을 볼까 만은 어머니 말씀을 들으면 어머니 말이 맞고, 아버지 말씀에 귀 기울이며 아버지 말이 맞는 것도 같다.

 

 어느 새 동녘이 불게 타오려는 모양이다. 별빛이 옅어진다. 이제 저 별빛이 지면 나도 철이 좀 들려나한다. 내가 철들면 어머니 마음이 그나마 편해지지 않으랴. 자식을 향한 어머니의 행복은 그저 마음 편한 것이려니 위로하며, 아침을 향해 두 팔을 벌리고 선다.

 

 이 아침에도 어머니는 날 향해 축원의 노래를 부르리. 자식을 향한 어머니의 노래는 영영 끝이 없지 않으랴. 아무리 먼 곳에 계시더라도 오늘 아침 나의 이 말이 어머니께 들렸으면 한다. 세월이 바람같이 흘러 서러우실 어머니! 어머니 손등에 앉은 검버섯과 얼굴에 앉은 주름살들, 어머니의 세월이 그 곳에 앉아 자식인 날 서럽게 한다. 


이제 저 새벽별 지면 어머니 그리워 몸부림 칠 날만 남았으니 자식으로서 어이 참으로 서럽다 아니할까. 어머니, 이 자식 위해 만수무강하소서! 어머니! 오, 나의 어머니, 사랑합니다. 어머니의 노래가 영원하길 고대합니다. (200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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