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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09-04-05 12:27: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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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천왕봉(해발 1915미터)

도무지 입을 열지 않는다.
묵상하는 근엄한 얼굴이다.
먼 발치에 까지도 보내는 인자함이 있다.
누구도 편들지 않는 절대적 평등이 있다.
지존중의 지존인 지리산의 초입에서 느끼는 감상이다.

멀리에서도 눈앞에 잡힐 듯 가까이 보이는 천왕봉이다.
물소리가 세상을 텅빈 공명으로 만든 계곡에 접어든다.
그 어드매로 숨어버린 것인지 희미한 형태조차도 내보이질 않는 천황봉이다.
중산리까지 단숨에 달려온 설레임이 막막하다.
천황봉이 하늘까지 데리고 숨어버린 것인지 등산길에서는 하늘도 안보인다.

입구에서 약 0.8키로 지점의 칼바위까지 폴폴 오른다.
칼의 형상을 한 바위가 지리산의 온화함을 닮았다.
그저 모양새가 준수하고 그저 수려한 미남의 모습으로 서있다.
산안에 있는 것 자체가 휴식이건만 칼바위앞에서 짐을 풀고 휴식한다.

가파른 경사길을 오르려는 힘의 비축이다.
칼바위 지나 계곡의 1.3키로지점에서 만나는 철제다리이다.
능선 가파른 법계사방향으로 진로를 택한다.
가벼이 생각하는 사람들의 범접을 허용하지 않으려고 길이 깎아지듯이 가파르다.
한발 옮기는데, 심호흡 한번이다.
산은 그 사람의 호흡을 보고서 진입을 허용하려나 보다.
천왕봉오르는 예행연습을 시키려나 보다.
기파른 행로를 불평없이 통과한 자만이 천왕봉에 도달할 수 있다.

법계사 바로 아래 로타리산장에 다다른다.
산길 오르는 내내 흔적도 자취도 없던 인적이 넘쳐난다.
지난 겨울에 꽁꽁 얼어붙어 있던 샘물도 넘쳐난다.
제법 큰 평수를 차지한 법계사 위의 평평한 바위에서 앉는다.

가파른 굽이길은 이미 천왕봉이다.
철쭉군락의 절정이었던 1700미터지점의 개선문을 통과한다.
내려오는 사람들이 "다왔다"고 인심을 베푼다.
여기까지 "다왔다는 것"이라고 화답하여 본다.
언어가 아니라 마음의 교환이다.

숨을 헉헉거리며 1800미터의 천왕샘에 당도한다.
목마른 갈증이 이제서야 깨우친다.
벌컹벌컹 두 바가지의 물을 들이킨다.
천왕샘에서 바라다보는 천왕봉의 얼굴은 "인자" 다 왔으니 하고 웃는다.
천왕봉의 가파른 절벽의 하얀 상징인 죽어 천년의 주목나무들이 호젓하다.
행여 자신을 쳐다 보지 않을까 조바하는 마음에서 "주목"을 외쳐 자신에게 시선을 모운다.
절벽의 절경에 감탄한다.

그늘 한점없는 천왕봉이다.
마음에 호사가 인다.
들떠 보고싶은 것이 너무 많아 눈감고 가만히 묵상을 할 수가 없다.
천왕봉 뒷 경사면의 칠선계곡의 굽이침이 한눈에 아름답다.
칠선계곡이 긴 휴식년을 풀고서 환하다.
인간이 법접하지 않는 곳에는 아름다움이 있는 것인가 보다.

먼 시야까지 펼친 풍경이 한 아름에 다 보인다.
무념무상이다.
겸허와 겸손만이 먼 풍경을 보게 한다.
이렇게도 작게 보이는 인간이 왜 그토록이나 오만하게 사는 것인지,

천왕봉 정상의 바위에 정좌한다.
옷 매무새 고치는 틈새 하나의 시간이 흘렀다.
세상이 온통 천지개벽을 하는 것인지,
순식간에 구름이 법계사 산자락을 깜깜하게 다 뒤덮어 버린다.
여세를 몰아 천왕봉조차도 뒤덮을 듯 산위로 몰려온다.
산 뒷면의 풍경은 아직 그대로 넓고 맑다.
천왕봉이 만든 경계점을 구름조차도 따르려는가 보다.

오판이다.
어디에서 그리도 급하게 달려온 것인지,
이제 그 경계점도 소용됨을 잃고 무용이 되었다.
하얀 구름이 사방으로 천왕봉을 에워싸고 있다.
처음에는 법계사방향에만 뒤덮었던 운무였다.
그 다음에는 칠선계곡 전체를 다 뒤덮고 있다.
구름은 인정에 따라 봐주기란 없는가 보다.
다만, 그 선후의 순서만 정하고 있는 것이다.
깜깜한 구름속에 앉아 세상을 단절하고 있다.
그 얼마나 바라던 마음의 단절이던가.
세상을 잊은 이 순간이 너무나 경이롭다.

천왕봉에 앉은 시간이 2시간을 지났다.
머물수록 더 크게 남아 있는 아쉬움을 거둔다.
장터목산장으로 하산한다.
해발 1.818미터의 통천문에 걸음을 멈춘다.
한 굽이에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능선은 또 다른 절경이다.

응달을 지키는 이정표이다.
장터목에서 중산리까지의 5.3키로이다.
이정표를 닮은 계곡에는 장구함만이 있다.
물의 세찬 흐름은 조금이라도 거슬리는 어떠한 미물조차도 다 쓸어 간다.
버티어 낸 바위만이 계곡을 메우고 있다.
긴긴 계곡의 맑은 물을 닮으라고 한다.
묵상하던 천왕봉이 그렇게 말을 하고 있다.
인간세계에서 그 맑음이 다 소진될 즈음에,
먼길을 달려 다시 자신을 찾아오라고 천왕봉이 인자한 손짓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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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극원 취재기자 정극원 취재기자의 다른 기사 보기
  • 대구대학교 법과대학 학장
    대구대학교 법대 졸업
    독일 콘스탄츠대학교 법대 법학박사
    한국헌법학회 총무이사(전)
    한국비교공법학회 총무이사(전)
    한국공법학회 기획이사
    한국토지공법학회 기획이사
    유럽헌법학회 부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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