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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20-04-05 21:0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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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논설실장/보도총괄본부장


공 포 정 치

 

  * 공포정치란 프랑스 혁명 당시 주요 인물인‘ 로베스피에르

    (Robespierre 1758-1794)가 벌였던 공포감을 조성한 정치 방식을

    말하는 것이다.

 

1789년에 일어난 프랑스 혁명은 1793121일 오전 10시경 ‘루이 16세’를 혁명광장(현 콩코드광장)에서 기요틴(guillotine 단두대)에서 목을절단하는 잔인한 처형으로 부르봉 왕조의 막을 내리게 했다.  이로써 프랑스

혁명은 외형적으로 종결된 것이다.  


필자가 여기서 기술하고자 하는 것은 프랑스 혁명 정부의 주요 통치기관이었던 공안위원회 위원장인 로베스피엘의 공포정치를 논하려는 것이다. 프랑스 혁명의 주역은 ‘로베스피에르,  마라,  당통 등 세 사람이다.  이들은 과격 좌파인 쟈코뱅당의 리더였다.


1793121일 루이16세가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지는 바로 그날 ‘로베스피에르’는 처형 장면을 직접보고 프랑스의 실권을 쥔 집정관으로 취임했다.  공포정치의 시작이다. 그로부터 9개월 후에 마리 앙트와네트가 역시 기요틴의 제물로 사라진 것이다.

   

공포정치의 주인공  로베스피에르는 어떤 인물인가?  그는 175856일 프랑스의 북부 아라스라는 지방 도시에서 태어났다.파리의 명문대학에서 법률을 공부해 변호사가 되었고 고향인 아라스로 내려가 서민을 위한 변호사 활동에 전념했다.  


노동자와 농민의 권익을 위해 귀족들과 영주들을 상대로 변론을 하면서 인기와 명성을 얻어 프랑스 특유의 비상임의회제도인 삼부회의 평민 대의원으로 선출되었다. 로베스피에르는 부르봉 왕정을 무너뜨리고 공화정인  국민회의를 여는 프랑스 혁명을 성공에 이르게 했고 프랑스의 모든 실권을 장악했다.


 독재정치가 막을 올린 것이다. 로베스피에르는 대학에서 법률 공부를 한 이후의  과정을 보면 의 동서는 다를지라도 문재인과 로베스피에르 흡사한 점이 많다.  


첫째. 문재인도 지방인 거제에서 태어나 부산에서 자랐다.


둘째. 로베스피에르와 문재인은 법률을 전공했으나 자국의 수도에서 판사나 검사가 되지 않고 서민과 농민의 변호사로 활약해 널리  알려진 사람이되었다.


셋째. 두 사람 모두 명성을 얻은 결과 중앙무대에 진출했다.


넷째. 로베스피에르가 ancien regime(앙시양 레짐. 구체제)을 타파하기 위한 혁명을 주도했던 것처럼 문재인은 촛불시위를 혁명이라면서 적폐청산을 기치로 내세웠다. 로베스피에르의 앙시양 레짐 혁파와 문재인의 적폐청산은 같은 맥락으로 과거를 뒤짚어 엎으려는 혁명의 시도였다고 볼 수 있다.


다섯째. 로베스피에르와 문재인은 노동자 농민을 기반으로 삼고 도시의 젊은 세대를 외각의 지원세력으로 삼은 것도 같은 전략이다. 이들은 언제나 기 기득권을 가진 부류에 대한 반감이 팽배해  있는 점도 흡사하다.


 여섯째. 로베스피에르가 혁명 이후 서민 노동자 농민들이 자신을 지지해준데 대한 빚을 졌다면서 우유를 반값으로 내리도록 하는 경제정책을 실시했으나 우유 값의 반값 파동으로 인한 소 먹이의 볏짚 등의 가격이 맞지 않아 서민 등을 위한 경제정책은 결국 실패로 돌아갔다.

 

 이는 오늘의 문재인 경제 정책과는 별로 다르지 않다.

 ‘독재자’ ‘흡혈귀’ ‘냉혈동물’ ‘야심가’ 등의 지독한 악명이 늘 로베스피에르를 따라 다녔다. 로베스피에르는 점차 좌파인 쟈코뱅당과 국민공회에서주도권을 잡았고 독재체제를 구축해 나갔다.


 그러나 프랑스 국내는 계속되는 식량난으로 폭동이 자주 거칠게 일어나자 16세는 신변의 위협을 느끼고 비밀리에 처가인 오스트리아로 망명하려다 한 농부에 발각되어 체포되고 만다.


이 사건을 계기로 왕(루이 16)을 그냥 놔두어서는 안 된다는 급진파의 목소리가 높아졌고 그 중심에는 ‘로베스피에 르’가 있었다. 결국 루이 16세가 먼저 기요틴의 이슬로 사라졌다.


17936월 과격 좌파 쟈코뱅당의 사주를 받은 파리 콘뮌의 노동자들이 국민공회에 난입해 우파인 지롱드당 의원들을 끌어내었다 당시 혁명정부의 모든 실권을 장악하고 있던 공안위원회는 이들을 반혁명분자라고 낙인을 찍어 유죄를 선고했고 역시 단두대에서 처형되었다.


이로써 독재자 로베스피에르는 공안위원회를 통한 공포정치를 시작했으며 1년 사이에 17,000여명을 단두대로 보내 처형했다.이밖에도 지방 반란 진압과정에서 3만명 이상을 학살했다. 방에서의 반혁명과 박멸 과정은 단두대 보다 더 잔인하게 수백명씩 구덩이에 몰아넣고 대포알 세례를 퍼붓기도 했다.


그리고 반정부 운동의 중심이었던 ‘방데’가 진압되었을 때에는 한꺼번에 25만명이 학살되었다고 역사는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프랑스 사상 최고의 과학자로 손꼽히는 ‘라부아지에’ 낭만주의 시의 선구자인 ‘세니에’ 천문학자였고 혁명 초기에 국민의회 의장을 지냈던 방이이도 단두대의 제물이 되었다. 공안위원회 위원장인 로베스피에르는 이 모든 죽음을 진두지휘했고 독재 권력은 더욱 강화되었다.

                   

 우파인 지롱드당의 주요 인물들이 숙청되면서 한때 로베스피에르의 혁명 동지였던 마라를 목욕탕에서 주살하고 당통마저 부정부패 혐의로 기요틴으로 보내처형하면서 로베스피에르의 독재는 더욱 굳어졌다.

 

 혁명 5년만인 1794년 로베스피에르는 반대파를 모두 제거함으로써 1인 독재체제를 확립하는데 성공한다. 로베스피에르 공포정치로 프랑스 국민들은 누구든지 죽임을 당할 수 있다는 공포심이 사회 전체에 만연되기도 했.


그러나 강하면 부러진다는 말이 있다.로베스피에르는 공포분위기 조성을 통해 시민들의 방종을 단속하고 사랑의 매로써 시민들에게 미덕을 가르칠 필요가 있다면서 사악한 반혁명분자들을 철저히 없애지 않으면 안 된다고 주장하며  과격한 정책으로 무자비하고 폭력이 동원된 숙청이 한동안 계속 이어졌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는 로베스피에르를 반대하는 움직임이 일기 시작했. 국민공회의원들이 중심이 된 것이다.

 

1794727일 국민공회는 회의를 열고 의원들의 연설을 듣기 시작했고 로베스피에르가 발언 신청을 하자 회의장은 분위기가 돌변해 로베스피에르에 독재타도, 독재타도를 외치는 의원들의 목소리가 회의장에 가득 찼다.


로베스피에르의 권력이 조종을 울리는 순간이다.수세에 몰린 로베스피에르 일파는 당일 밤 파리 시청에서 농성 중이었는데 국민공회측 위병들의 습격을 받고 난투가 벌어졌다. 로베스피에르 일파인 공포정치의 주역들이 거의 체포되어 자신들이만든 방식 대로 재판을 받았다.


728일 오전에 열린 재판에서는 이들에 대한 사실 관계 조사도 변론의 기회도 없었다. 그리고 당일 오후 5시 로베스피에르 등 혁명주체와 그밖에 18명이 마차 3대에 나누어 실린 체 혁명광장으로 끌려갔다. 로베스피에르의 적용된 죄목은 국민주권원칙 위반이었다.


이들은 오전에 선고 받고 오후에 바로 사형장으로 간 것이다.결국 1794728일 오후 6시 로베스피에르 등이 처형됨으로써 공포정치는 막을 내렸다.

   

역사는 예언을 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러나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교훈을 준다. 그러나 나쁜 역사는 반복된다는 것이 역사가들의 평가이다.좌익혁명이 비극을 불러들이고 실패로 끝나는 것은 평등을 내세워 독재를 휘두르기 때문이다. 


노동자와 농민을 위한다면서 오히려 노동자 농민의 삶을 피폐하게 만들었다.

 우리는 프랑스 혁명의 최고 권력기관인 공안위원회를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자유와 평등을 웨쳤던 로베스피에르는 권력을 잡자 빈부와 신분 격차를 없애고 시민이 주도하는 세상을 만든다면서 자신을 권력을 강화했다.


공포정치의 주체인 공안위원회의 위원장을 로베스피에르가 차지하면서 17,000여명이 넘는 사람들을 처형하면서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민주주의를 죽여 나갔다. 그러나 프랑스 국민들은 과거보다 더 큰 공포와 불평등 그리고 경제적 어려움 속에서 허덕이며 살았다.

 

 우리의 현실을 돌아보자 김병준 국민대 교수는 그의 칼럼을 통해 문재인 정권 을 프랑스 혁명기 주체세력인 로베스피에르의 공포정치에 비유하며 ‘민주주의 이름으로 민주주의를 죽이는 일을 그만두라고 비판했다.


김 교수는 이어서 평등의 이름으로 자유의 가치를 덮은 어리석음과 민주주의 이름으로 민주주의를 죽인 죄는 쉽게 용납되고 용서될 수 없는 일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사회주의 지도자 등 수많은 정치지도자들이 평등을 팔아 자신들의 권력을 강화했지만 모두 실패했다고 지적했다.


그리고 촛불정부 눈에는 과거는 모두 적폐로 인식된 다는 점도 로베스피에르 혁명정부와 같은 인식이다. 또한 로베스피에르가 장악 한 공안위원회는 문재인 정권이 제정한 공수처법(공직자범죄처벌법)의 성격과 일맥 상통하는 기구로 볼 수 있다.


프랑스 혁명 당시 공포의 대상이 었던 공안위원회가 21세기 들어 한국에서 되살아나지 않나 하는 것은 기우에 그치기를바란다.

 

로베스피에르가 권력에 정점에 있으면서 혁명에서 자신의 의견과 반대되는 사람들, 자신을 비판하는 사람들을 덕(virtue)이 결여되었다면서 거침없이 단두대로 보냈다. 로베스피에르에 의해 17947월까지 처형된 사람은 10만명 에 달했고 15만명은 프랑스를 떠나 국외로 도피하거나 이주했다. 


프랑스혁명 시대는 말 그대로 공포와 처참한 희생의 시대였다. 혁명의 이름으로 단두대에 서 처형된 사람은 부르주아 25% 농민 28% 상퀼로트(무산노동자) 31% 8%  성직자 7% 등으로 나타났다. 프랑스 혁명은 도대체 누구를 위한 혁명이었는지 답을 찾을 수가 없다. 


로베스피에르식  공안위원회를 통한 공포  정치가 얼마나 피비린내 나는 ‘도살정치’였는지 역사는 그 전모를 기록했다.


 우리의  공수처를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 이팔웅 논설위원  2020. 4.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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