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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19-09-22 16:15:09
  • 수정 2019-09-30 10:47: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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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월드뉴스 논설실장/보도총괄본부장

poland 고난의사를 반면교사로 삼아 한미일 안보 동맹 강화 절실


* 폴란드(일명 polska)123년 동안 러시아 지배하의 질곡의 역사였.

폴란드는 러시아와 독일에 둘러싸인 나라로 러시아와 독일에 의해 국토가 분할당하는 고난의 슬픈 역사를 간직한 약소국이다.


약소국이 강대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다는 것을 태생적 불행이라고 지정학자들은 말하고 있지만 폴란드만은 유독 세계사에서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강대국에 의해 이리 찢기고 저리 뜯기기를 여러 차례당한 나라이다.


특히 폴란드는 가장 큰 위협이었던 러시아에 대항해 프로이젠(독일)과 동맹을 추구했으나 프로이젠은 오히려 폴란드의 뒷통수를 쳐서 독일은 폴란드를 완전히 멸망시키기도 했다. 또 독일은 폴란드에 대해 대대적인 민족말살정책을 통해 독일에 동화시키려 했다. 이에 대해 폴란드인들의 저항은 거셌다.


폴란드인들은 살아남기 위해 나폴레옹 전쟁에서 프랑스를 도와 바르사바 공국을 세워서 독립을 시도했다. 그러나 나폴레옹이 전쟁에서 패해 파멸하자 독일, 러시아, 오스트리아의 지배를 받을 수밖에 없는 폴란드는 더욱 가혹한 박해를 받았다.


폴란드와 러시아는 국경을 맞닿고 있는 나라로서 몇 세기에 걸친 오랜 교류를 해왔지만 역사적으로 깊은 대립을 해왔다. 그리고 123년 동안 러시아의 지배를 받아 가혹하게 수탈을 당한 폴란드는 힘겹게 생존해 왔다.


폴란드는 러시아, 프로이젠(독일), 오스트리아 3국에 의해 1772179317953차례에 걸쳐 분할되어 유럽 지도에서 사라지기도 했다.


이에 대한 반발로 민중 봉기에 의한 반란(1830)도 일어나 수십년 동안 이어졌지만 특히 18631월부터 18644월까지 크고 작은 무장 투쟁 전투가 1천여차례나 일어났다. 그러나 성공한 예는 하나도 없었다. 러시아 육군의 무자비한 진압 때문이었다.


1차 세계대전의 결과 베르사유조약으로 1918년에 1795년 이후 123년만에 폴란드 제2공화국이 러시아에서 벗어나고 독일에서 떨어져나가 독립했다. 그러나 폴란드를 외국으로 생각하지 않은 독일 바이마르 공화국은 계속해서 단치히 자유시, 상부 슐레지엔, 폴란드 회랑을 내놓으라고 억지와 떼를 썼다.


폴란드 입장에서는 베르사유 조약에 따라 바다로 나갈 수 있는 출구가 확보되었기 때문에 독일의 요구를 결코 들어줄 수가 없었다. 1925년 독일은 보복으로 독일 폴란드 무역전쟁을 일으켜 영토를 내놓으라고 계속 요구했다.


폴란드 제2공화국은 소련(러시아)과 독일 강대국 사이에 끼인 입장이므로 히틀러가 무역 분쟁을 끝냈다. 그러나 히틀러는 침략야욕을 일시 연기하기 위해 폴란드에 유화책을 썼을 뿐이다.


1939825일 비밀리에 독소 불가침조약을 맺은 독일과 소련은 193991일 독일은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키며 폴란드를 침공했고 동쪽에서는 소련군이 진격해 폴란드는 1개월 만에 항복해 폴란드 제2공화국은 멸망했다.


독일은 점령지 폴란드에 ‘아우슈비츠, 트레브링카, 베우체츠, 소비보로, 해움노, 마이다네크, 등 대대적인 인종청소 기지를 세우고 유태인 폴란드인 러시아 포로 등에 대한 학살을 자행했다.


이밖에도 소련은 NKVD(KGB전신)정보기관의 주도로 1940년 폴란드의 기자 교수 의사 등 지식인 수십만여명을 끌어다가 스몰렌스키 서쪽 15km 떨어진 카친 숲에서 기관총으로 학살했다. 이것이 카친 숲의 대학살이다.

독일과 러시아가 폴란드와 폴란드인에 대해 18세기 19세기 20세기에 걸쳐 저지른 지을 수 없는 만행은 세계사에서 매우 큰 오점으로 남을 것이다. 필자가 폴란드의 슬픈 역사를 다시 개괄적으로 조명해 본 것은 우리의 역사와 매우 유사함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폴란드의 비극으로 점철된 역사를 반면교사로 삼으려는데 있다. 그러나 우리도 폴란드와 비교되는 36년간의 질곡이 있었다.

그러나 이제 시대상황은 많이 달라졌다.과거사로 이웃과의 불화는 서로 국익에 도움이 안된다. 세계사는 한 일 갈등, 그리스와 터기의 불화도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우리가 과거사를 잊을 수 없지만 잊어서도 안된다. 그렇다고 과거사에 매달리는 것도 현명한 자세는 아니다.


이제는 미래지향적인 일에 몰두할 때다. 특히 극동 정세를 감안해 본다면 이념이 다른 중국과 북한을 상대해야하는 한국과 일본이다. 그렇기 때문에 한 일은 안보문제만은 긴밀한 협조가 필요하다.


한 일간의 안보의 틈이 벌어지면 중국과 북한만 좋아할 것이다. 미국의 과거 브레진스키박사의 진단대로 한 일의 굳건한 협조만이 중국과 북한에 대처할 수 있다고 강조한 말을 귀담아 들어야 한다. 달리 방법이 없다. 파기된 지소미아 문제도 시급히 복원해야 된다. 아직 시간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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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논설집필 직접출연방송
    -TBS방송 프리랜서 시사해설 담당
    -시니어저널 신문 논설위원
    -관동대학교 출강(컴뮤니케이션강의)
    -월드뉴스 논설실장/보도총괄본부장
    -바른말실천운동시민협의회 사무처장
    -현재 월드뉴스 논설위원(논설실장)
    -월드뉴스 보도기획총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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