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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19-03-12 00:02:51
  • 수정 2019-03-12 00:0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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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팔웅논설실장

임금선조와 전쟁

* 선조임금의 피난길 진실은?

AD 1392414700척의 전투선과 18,700명의 일본군 선봉대가 부산포에 상륙했고, 222,800명이 그리고 418일에 제311,000명이 연이어 부산포에 상륙했다. 전쟁이(임진왜란)이 시작된 것이다.


일본의 도요토미가 조선 침략에 동 원한 병력은 206000명이었다. 장장 7년간의 전쟁이(임진왜란, 정유재란) 남긴 것은 조선 인구의 감소, 백성의 기근과 고통, 농토 65%가 사라지는 등 조 • 일 전쟁의 피해는 조선을 완전히 폐허로 만들었다.


이 칼럼에서는 선조의 도망이 국내와 일본군 전략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지를 알아본다. 일본군이 부산포에 상륙한 이후 한성을 향해 진군한지 20여일 만에 한성이 함락됐다.


이에 앞서 일본군이 한성을 향해 진군하자 조선 조정에서는 결사 항전으로 한성을 사수하자는 파와 주상은 몽진(피난)해야 한다는 파간에 논쟁이 있었지만 선조는 하루라도 빨리 전쟁을 피해 의주로 떠나야 한다고 주장했다.


결국 선조는 백성과 한성을 버리 고 피난길에 나선 것이다. 백성들로부터 온갖 비난과 질타를 받은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한편 일본군의 전략은 한성을 함락해 조선왕을 붙잡아 항복을 받아내고, 조선 임금의 지배권을 어느 정도 인정해주어 통치의 명분만 살려주고 실제 통치권은 일본이 갖는다는 계략이었다.


또한 도요토미의 명령에 따라 조선군이 일본군의 선봉이 되어 나라를 침공하겠다는 것이 도요토미의 전략이었다. 그러나 조선 왕이 도망함으로써 일본군의 작전이 실패했으며 전쟁의 승부도 미루어졌다.


조선의 왕이 도망 갈 것이라고 일본군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전쟁은 장기전으로 바뀐 상황이다. 이제는 조선 왕을 잡을 가능성도 없고 일본군이 생각하지도 못한 상황으로 변한 것이다.


일본군은 여름이 가기 전에 전쟁이 끝 날 것으로 보고 여름옷만 준비한 병사들은 한국의 매서운 추위의 겨울을 맞이해 동사하는 병사가 속출했고 사기는 땅에 떨어졌다. 일본군의 전략은 여기서부터 틀어지기 시작했다.


목표였던 조선의 임금이 도망갔으니 일본군의 작전이 실종된 것이다. 조•일 전쟁에서 조선 최초의 결정적 전략이 선조임금의 도망이었다. 한성을 점령한 일본군은 더 이상 전진도 못하고 웅크리고 있으면서 도요 토미의 명령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결과적으로 일본군은 한성에서 잠시 길을 잃고 해매는 상황이었다. 그 기간이 한달 정도 되었다. 결국 선조의 도망은 일본의 조선 침략 작전과 전략을 뒤흔들어 놓은 결과를 초래한 것이다.


물론 조선 조정과 군에서 첩보요원을 풀어 일본군의 전략을 사전 탐지해 수집한 정보에 의해 선조가 도망간 것은 아니다. 그저 살기 위해 도망가야겠다는 일념으로 한성과 백성을 버리고 도망 간 임금으로 역사는 기록했지만 선조가 한성을 버리고 도망간 것이 결과적으로 잘한 일로 평가할 수 있다.


일본군의 전략을 뿌리채 흔들어 놓았기 때문이다. 만약 선조가 궁궐에 그냥 있다가 일본군에 붙잡혀 곤혹을 치르고 연금 상태가 되고, 그러면 조선은 그 때 이미 망해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일본군이 조선 침략 전술 전략에서 결정적인 실수를 한 것을 보면 한 달간 한성에 머무르고 있었던 것도 실수였고, 겨우 20여만의 병력으로 조선 전체 22만평방km를 점령하려 했던 것도 도요토미의 계산과 전략의 실패였다.


여기에다 전국 도처에서 의병이 일어난 것, 그리고 제해권을 장악하고 있던 조선 수군의 막강한 전투력을 파악하지 못하고 조선을 침공한 것도 전략의 큰 차질을 빚었다고 볼 수 있다.

조 • 일 전쟁이 터지자 전국 각지에서 일어난 의병은 북쪽으로 진군한 일본군의 군수품 수송을 공격해 탈취하거나 불태워버려 일본군의 보급품 조달을 매우 어렵게 만든 것도 일본군 작전에 차질을 빚게 한 것이었다.


일본군이 함경도까지 진출했으니 전선은 종심이 길어지고 종심이 길어지니까 군수품 수송이 쉽지 않았다. 의병이 군수품 수송을 공격했기 때문이었다.


이렇듯 일본군이 조선을 침략해 큰 이익을 보려고 했지만 히데요시의 뜻대로 되지도 않았고 조선 침략의 기획자이며 전쟁 지휘자인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1598년 오사카성에서 질병으로 사망했다.


그러자 일본 본토 지도부에서는 지체할 것도 없이 조선에서 철수 명령을 내린 것이다. 일본은 투입병력의 50%를 잃었고 목표를 달성하지도 못하고 퇴각했다. 결국 조 • 일 전쟁은 승자도 패자도 없었던 전쟁으로 삼국이 모두 피해가 컸다.


특히 조선이 입은 피해는 너무 컸다. 장장 7년을 끌어왔던 조•일 전쟁은 이렇게 종결되었다.


: 이팔웅 논설위원 2019. 3.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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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BS방송 프리랜서 시사해설 담당
    -시니어저널 신문 논설위원
    -관동대학교 출강(컴뮤니케이션강의)
    -월드뉴스 논설실장/보도총괄본부장
    -바른말실천운동시민협의회 사무처장
    -현재 월드뉴스 논설위원(논설실장)
    -월드뉴스 보도기획총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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