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경향신문 이택광교수의 주장에 답함
세월호 참사의 충격이 가시지 않고 있다. 이 참사는 4월16일 여객선 하나가 바다로 침몰한 사건으로 끝나지 않고 있다. 오히려 사건은 더욱 확대되어서 총체적인 국가에 대한 문제제기로 번지는 양상이다. 여러 원인들이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지목할 수 있는 것은 ‘공동선’(common good)에 기초했다고 믿었던 국가가 재난 앞에 맥없이 무너지는 것을 목격했기 때문일 것이다.
- 동의함
“이것이 국가인가”라는 반어적 의문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국가를 구성하는 가장 기본적인 원칙이라고 믿었던 ‘공동선’에 대한 합의가 붕괴했다는 것은 엄청난 충격을 불러일으키는 사건이다. 이른바 민주화 이후 모두가 암묵적으로 동의했던 가치가 속절없이 캄캄한 바닷속으로 가라앉은 것이다
- 동의함
그 가치라는 것은 선진국이나 정상국가로 표현되었던 국가의 중립성이었다. 여기에서 중립성이라는 것은 신분의 높낮이나 경제적 유불리를 떠나서 위급시에 어떤 ‘국민’이라도 공정하게 대하는 정의로운 국가를 의미했다
- 동의하지 않음. 좌파사람들은 세월호 사건에 있어서 국가가 중립성을 지키지 못하고 신분의 높낮이나 경제적 유불리를 따져 세월호 승객들을 구조하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바, 그런 주장에는 절대 동의해줄 수 없습니다. 이택광교수칼럼의 이 대목은 주장은 전교조 교사가 만들어 유포시킨 동영상에 나오는 주장과 정확히 똑같습니다.
그 동영상을 만들어 유포한 사람은 이와 같이 주장하고 있더군요. “너희들이 강남에 사는 부모를 뒀어도 이렇게 구조가 더뎠을까. 너희 중 누군가가 정승집 아들이거나 딸이었어도 제발 좀 살려달라는 목멘호소를 종북이라 했을까.``
이택광교수나 전교조 동영상 유포자의 주장처럼, 세월호 참사 피해자들이 강남 부잣집 자식들이었으면 국가가 필사적으로 구조하여 살렸을 것인데,본 사건 피해 당사자인 단원고 학생들은 강남부자 자식들이 아니어서 죽도록 방치했다는 것은 전혀 사실이 아닙니다. 좌파 특유의 삐뚤어진 시각과 마인드에서 나오는 주장들은 대부분 사실과 전혀 맞지 않다 이 말입니다.
이택광교수와 동영상유포자의 주장처럼, 국가가 재난에 처한 사람들에 대하여 신분의 높낮이나 경제적 유불리에 따라 피구난자들을 각각 차별하여 누구는 구조해주고 누구는 구조해주지 않거나 하지는 않습니다. 거듭 말하지만 국가는 가난한 집 자식과 부잣집 자식을 차별하여 다르게 구조하지 않습니다.
필자의 주장이 맞는 지 틀리는 지는 세월호 사건에서 구조된 학생들의 집안 경제력을 조사해 보면 쉽게 알 수 있습니다. 구조된 학생들과 구조되지 못하여 희생된 학생들을 서로 비교하여 살펴보면, 과연 이택광교수의 주장처럼 부잣집 자식들은 거의 다 살아 돌아오고 , 가난한 집 자식들은 거의 다 죽은 것인지 확인해 볼 수 있다는 뜻입니다.
필자는 이택광교수가 왜 그런 얼토당토하지 않은 주장을 펼치는 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좌파진영 사람들은 매사에 대해 삐뚤어진 시각으로 접근하는 경향이 많습니다. 좌파진영 사람들은 큰 사건 사고가 터질 때마다 `국가가 음모를 꾸며서 국민을 속이고 국민들을 착취하거나 도탄에 빠뜨린다`는 유언비어를 수없이 많이 퍼뜨린 전력이 있습니다.
이번 사건에서 공권력(해경)이 직무유기에 가까울 정도의 소극적인 구조활동을 편 것은 사실이지만, 국가가 재난 피해자들을 상대로 신분상 지위나 경제력으로 차별하여 구조한다는 주장은 전혀 사실이 아닙니다. 따라서 이택광교수와 전교조동영상 유포자의 주장은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세월호 사건에서 논의되어야 할 공공선은 이택광교수가 자신의 칼럼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재난에 처한 국민을 차별하지 않는 국가의 중립성`이 아닙니다.
이번 사건에서 의미를 갖는 공공선은 `만약 우리들 중에 누군가가 위험에 처했을 때,과연 국가 또는 이웃이 위험에 빠진 사람들을 구해주러 올 거라는 기대를 갖을 수 있느냐`의 문제인 것입니다. 우리 국민들이 바라는 이러한 기대 중에서 하나는 `국가에 대한 기대`이고, 또 다른 하나는 `이웃에 대한 기대`입니다.
前者의 경우, 국가에 대하여 그런 기대를 갖을 수 있는 사회가 되려면 공권력이 재난구조에 적극적이어야 하는데, 현재 대한민국 공무원들이 그런 적극적 직무정신(사명감)을 공무원들이 갖추고 있느냐의 문제로 귀결됩니다. `그 점에 대하여 대한민국 공무원들은 전혀 아니올시다`가 이번 세월호 사건에서 명백하게 밝혀졌습니다. 다시말해서 국민의 국가에 대한 기대인 공공선(적극적 직무정신)은 엉터리였음을 이번 세월호사건을 통해 여실히 드러난 것입니다.
이런 사실에 때문에 국민들은 두려움에 빠져있는 것입니다. 그런 재난은 앞으로도 또 있을 것인데, 그런 재난 위기상황에서 국민이 국가에 대하여 기대할 수 있는 공공선이 무너져있으니 불안해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따라서 세월호 사건 이후 우리 사회가 고민해야 할 것은 `국민의 국가에 대한 기대인 적극적 직무정신(공공선)을 어떻게 다시 세워 놓아야, 앞으로 또 일어날 수 있는 재난에서 국민들이 국가에 대하여 실효성있는 구조를 기대할 수 있겠는가 `에 있습니다.
後者의 경우에 대해서 언급되어지는 공공선은 `선한 사마리아인의 정신` 다시말해서, 이웃사랑 정신입니다. 그런데 이번 세월호 사건에서 봤듯이, 희망적이게도 그것은 아직 우리 사회에서 무너지지 않았습니다. 친구를 살리기 위해 선실로 다시 내려 간 양온유 학생, 승무원 박지영씨, 교사 남윤철씨, 어선을 가지고 와서 구조하던 어민들이 이 사회에서 이웃사랑 정신(공공선)이 아직까지는 무너지지 않았음을 증명해 보여주었습니다.
우파진영에서는 `이택광교수 당신과 전교조 동영상 유포자를 매우 질이 안 좋은 사람`으로 파악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양식있는 국민들은 이택광교수 당신이 그런 얼토당토 않는 주장을 펼치는 이면에는, 국민들로 하여금 국가를 미워하고 불신하게 만들려는 나쁜 의도가 숨어있기 때문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오늘 자 조선일보 이종찬 前 국정원장의 인터뷰기사에서도 그와 비슷한 우려섞인 말들이 나오고 있습니다. "이번 사고로 우리는 너무 많은 것을 잃었다. 그중 가장 뼈아픈 것은 정부가 하는 말을 믿지 않거나 오히려 반대로 행동해야 나에게 이득이 되고 내 가족이 살 수 있다는 불신 풍조가 사회에 급속하게 퍼지고 있는 것이다. 정부나 관(官)의 지시를 따르면 안 된다는 병(病)이 스며들었다.``는 내용이 그것입니다.
양식있는 국민들은 정부의 말과 반대로 행동해야 내 가족이 산다는 不信풍조를 사회에 급격히 퍼뜨리는 사람이 바로 전교조 동영상 유포자와 이택광교수 당신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2. 한겨레신문 사설에 답함
세월호 침몰 과정에서 드러난 해경의 무능과 무책임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살려주세요”를 외치는 단원고 학생에게 위도와 경도를 물으며 시간을 허비한 해경이었다. 300여명의 승객들이 선실에 갇혀 수장되고 있는데도 그저 눈 뜨고 바라만 보던 해경이었다. 고깃배 어부만도 못한 해경 실력의 현주소가 괜히 나온 게 아니라, 그 이면에는 썩어빠진 문화와 관행이 도사리고 있음이 세월호 참사 이후에도 하나둘 드러나고 있다.
- 세월호 침몰 과정에서 보여준 해경의 무능과 무책임은 현재 대한민국 국민들의 분노를 사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번 사건에 대하여 한겨레신문은 무능하고 무책임한 모습을 보인 해경을 질타할 자격이 없습니다. 세월호 사건에서 보여준 해경의 그런 무책임한 행태가 있게 된 데에는 한겨레신문도 수 십년동안 그것에 일조해 왔다고 생각합니다.
본 사설의 첫 문단 마지막 문장에서 지적했듯이, 그 이면에는 썩어빠진 문화와 관행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썩어빠진 문화는 `시민사회가 건강하게 갖추고 있어야 할 문화가 썩어 빠져있다`고 봐야 하고, 썩어빠진 관행은 `공직사회가 건강하게 갖추고 있어야 할 문화가 켜켜히 쌓여온 적폐들로 썩어 빠져있다`로 봐야 합니다.
여기 해양경찰 공무원 甲이 있습니다다. 甲은 순경시험에 합격하고 해양경찰관이 되었습니다. 甲은 이번 세월호 구조업무를 수행하였습니다. 그가 한 것이라고는 물에 빠진 승객 몇몇을 건져서 구명정에 태운 것이 전부입니다. 甲에게서는 선실로 진입하거나 적극성을 띠고 구조하는 사명감 같은 것은 찾아보기 힘들었습니다. 해양경찰관 甲에게 요구되는 직무정신(사명감)을 별로 찾아볼 수 없게 된 근본적인 이유가 어디에 있는가에 대해서 우리는 고민해 봐야 합니다.
이번 세월호 사건을 통해, 국민들은 적어도 재난구조담당 공무원에게는 특별한 정신무장교육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박근혜정부는 국가안전처 신설을 향후의 대안으로 제시하였습니다. 일반구조업무를 뛰어넘는 전문적이고 특수한 재난구조 인력양성을 제안한 것입니다. 직무능력 향상은 강한 직무정신(사명감)을 무장시키는 데에 필수한 요건이므로, 일반해경을 뛰어넘는 재난구조 능력을 갖춘 전문가들을 대거 양성하겠다는 뜻입니다.
이번 사건에서 해경 甲은 그런 재난구조에 대한 특수한 훈련과 정신교육을 통해 배치된 해양경찰공무원이 아니었습니다. 甲이 세월호 사건에서 보여준 직무정신은 시민사회에서 형성되어진 일반인들의 그것과 별반 차이가 없는 것이었습니다. 즉, 보통의 시민인 甲이 단지 순경시험에 합격하여 해양구조업무에 배치된 것에 불과하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그것 밖에 안되는 甲의 멘탈리티가 형성되는 데 큰 영향을 끼친 것은 `시민사회에서 통용되고 있는 문화`였던 것입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현재의 우리 시민사회가 갖고있는 정신문화는 과연 건강한 지에 대해서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동안 우리 시민사회의 문화는 과연 사명감이 강한 사람들이 많이 생겨나도록 하는 풍토조성을 해왔는가 아니면 사명감이 강한 사람들이 더는 나오지 못하도록 해왔는가에 대해서 솔직히 답해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사명감이 강한 사람들이 많이 나오려면 그에 걸맞는 좋은 정신문화가 형성되어 있어야 합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좋은 정신문화 존재여부는, `빛나는 업적을 이룬 사람들이 존경받는 정신문화적 사회풍토가 조성되어 있는가`로 판가름 납니다.
이번 세월호 사건에서 빛나는 업적을 이룬 사람이 있었습니다. 양대홍 사무장, 정차웅 학생, 최혜정 교사, 박지영 씨, 남영철 교사, 김홍경씨, 조대섭 학생, 박호진 학생이 그들입니다. 우리는 이들을 영웅, 의사자, 의인이라고 부릅니다. 대한민국은 그들의 고귀한 희생정신을 기리고 존경해 주며 아름다운 행위들을 본받으려 노력하는 사회풍토를 갖추고 있어야 합니다
이번 세월호 사건에서 영웅,의인들은 대부분 민간인들 중에서 나왔으므로, 직무정신(사명감)을 논할 수 있는 사람은 선박직원 박지영씨가 유일합니다. 그런데 그 역시 사명감쪽보다는 이웃사랑 정신에 더 가까운 모습을 보였습니다. 따라서 세월호사건에서는 우리가 기리고 본받을 만한 사명감 강한 의인은 나타나지 않은 것이 되었습니다.
강한 사명감은 강한 자부심에서 나옵니다. 박근혜 정부가 이번에 새로 신설하려고 하는 국가 안전처에서 길러 내어질 인력들도 바로 여기에 촛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뛰어난 재난구조 직무능력에 기초한 강한 자부심을 갖춘 전문가 양성이 목표입니다.
그동안 우파진영사람들은 `自負心지향형 인간`이 되려고 노력해 왔습니다. 반면 좌파진영 사람들은 `不滿心지향형 인간`이 되는 길을 택해 살아왔습니다.
남들보다 빛나는 업적을 이루려고 노력해 온 사람들이 우파 사람들이라면, 남들보다 불평불만거리를 더 많이 발굴하는 일에 노력해 온 사람들이 좌파사람들입니다. 국가관도 대체로 이와 일치합니다. 대한민국 역사중에서 긍정적이고 자랑스러운 부분을 부각시킬려고 하는 쪽이 우파진영이고, 대한민국의 부정적이고 불명예스러운 부분을 부각시킬려고 하는 쪽이 좌파진영입니다.
박정희 대통령은 일신상의 행복을 넘어 국가와 민족의 번영을 위해 헌신하였고, 대한민국 대표기업 삼성은 일류기업을 추구하여 왔습니다. 1등신문 조선일보는 `우리가 쓰면 여론이 된다`는 말이 대변하듯이 당대의 여론을 선도한다는 자부심이 있었습니다. 우리나라 戰史에서 가장 빛나는 업적을 이룬 해병대는 `누구나 해병이 될 수 있다면 나는 결코 해병대를 선택하지 않았을 것이다`라는 말과 함께 해병대 특유의 강한 자부심을 추구하였습니다.
이런 자부심추구 문화를 가장 못마땅해하고 어떻게 해서든 흠집내고 깍아내리려고 애써 온 사람들이 지금 좌파진영의 주류를 형성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총력을 기울여서 박정희 대통령의 빛나는 업적을 폄하하려 들었고, 삼성이 지향하는 가치관과 문화에 반기를 들었습니다. 특히 삼성의 인재중시경영에 대해서는 극도의 혐오감까지 드러내었습니다.
좌파들의 정신 문화에서는 `너는 남보다 더 빛나는 업적을 이루도록 애쓰지 말라`는 교의가 뿌리깊게 박혀있습니다. 좌파언론들은 수십년동안 `너가 빛나는 업적을 이루면 그로인해 다른 수많은 사람들이 불행감을 느낀다`고 주장해 왔습니다. 또한 경쟁에서 뛰어난 성적을 내는 사람을 향해 `당신은 남을 짓밟고 올라서려는 악한`이라고 몰아세운 적이 많았습니다.
이순신장군이 임진왜란 당시 1등 공신이었듯이, 이번 세월호 사건에서도 1등공신(훌륭한 업적을 남긴 사람들)들이 다수 배출되었습니다. 앞에서 언급한 박지영씨를 비롯한 의인들은 이 사회의 참된 가치(사명감, 이웃사랑)를 수호하였고 더욱 빛나게 한 영웅들입니다.
우리 사회에서 1등(훌륭한 업적을 남긴 사람들)을 기리고 존경하며 그와 같은 인간이 되고 싶어하는 것이 우파라면 ,1등을 깍아내리고 악담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좌파라고 봐도 크게 틀리지 않습니다.
한겨레신문이 수십년 동안 외쳐왔던 레파토리가 있습니다. ``1등(훌륭한 업적을 이룬 사람들)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 이 레파토리를 언론분야에 쓰이도록 변용시켜보면 ``훌륭한 의견만 좋아해주고 허접한 의견은 무시하는 이 더러운 세상`` 이라는 식으로도 표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에 대한 가요버전도 있습니다. ``이유도 없이 가끔은 눈물나게 억울 하겠죠. 일등아닌 보통들에겐 박수조차 남의 일 인걸 ``
우리가 학교에 합격하면 입학식을 합니다. 입학식때 대표로 1등이 나가서 교장 선생님한테 상을 받는 데, 그 외의 사람들은 그에게 박수를 쳐줍니다. 가요버전에서 말하는 것처럼, 박수를 쳐주면서 눈물나게 억울할 건 뭐 있나 싶습니다. 1등으로 합격하나 30등으로 합격하나 합격한 것은 다 똑같은 데 말입니다. 1등한 친구에게 박수쳐 주는 것이 과연 가슴을 칠 정도로 원통하거나 억울한 일일까요?
가요버전은 한겨레 원본버전보다는 다소 수위가 약하긴 해도 그 의미에 있어서는 대동소이합니다. 한겨레버전은 `1등을 죽이고 싶도록 밉다`인 반면 가요버전은 `1등이 샘나고 속상하다` 정도이니까요.
이러한 `1등 혐오정신`은 한겨레신문이 독점적으로 갖고 있는 지적 재산권으로서 그에 대해서는 세상 사람들이 다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한겨레, 경향, 오마이뉴스등에 몸담고 있는 좌파언론인들은 이와같은 반사회적인 知的 생산물(콘텐츠)를 생산하여 사회에 퍼뜨리는 것으로 악명이 높습니다.
1등에 대한 반감( 적개심, 질투심, 속상함, 피해의식)은 `우리 사회에서 사명감이 강한 사람들을 많이 만들어내는 문화풍토 조성에 큰 장애요소였습니다. 그런 일을 수십년 간 줄기차게 해온 것이 바로 한겨레신문사였습니다. 좌파진영은 수십년동안 `1등을 존경하고 칭송하는 문화`에 대하여 줄기차게 반대해왔습니다.
과거 60,70년대에는 한 시골마을에서는 이런 광경을 자주 볼 수 있었습니다. 시골마을에 고시합격자가 하나 배출되면 현수막이 나붙고 그 마을 전체가 축하해주는 큰 잔치가 열렸습니다. 그런 것에 극도의 혐오감을 품고 그같은 사회현상에 대해서 신랄하게 비판해왔던 것이 좌파진영 사람들이었습니다. 누군가가 열심히 공부해서 고시나 전문자격증을 취득하면 같이 기뻐해주는 것이 뭐가 그리 비난받을 일인지 모르겠다 이 말입니다. 축하 현수막을 내걸고 빛나는 성취를 이룬 사람이 우리 반 친구였다는 것에 대하여 자랑스러워하는 것은 우리 사회가 가꾸어나가야 할 미풍양속인 것입니다.
`좌파사람들이 왜 남이 성공하고 큰 성취를 이룬 것에 대하여 적의를 품는 지`에 대해서는 필자로서는 도저히 이해를 못하겠습니다. 그것은 좌파진영에 있는 사람들이 갖고 있는 특유의 열등감과 시기심 때문이라고 봅니다. 한 집안에서 경사가 나면 함께 기뻐해주는 미풍양속이 운동권 좌파 인사들이 학계, 언론계, 법조계등 사회 각계각층에 침투해 들어가던 시기에 와서 많이 사라지게 된 것입니다.
좌파사람들 중에는 이런 말을 하는 사람도 봤습니다. `타인의 슬픔에 동정을 표하는 것은 할 수 있는 데, 타인의 경사에 대해서 함께 기뻐해 주는 것은 너무 힘들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타인의 불행에 대해서는 좋은 마음이 우러나오지만, 타인의 행복에 대해서는 도저히 좋은 마음이 우러나오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좌파진영에 속한 사람들의 인품 자체가 얼마나 소인배스러운 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증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훌륭한 업적을 이룬 사람에게 박수 쳐 주지 않는 문화`가 `자부심지향형 인간`이 많이 출현하는 것을 막아온 것입니다. 좌파언론들이 만들어 낸 그런 썩어빠진 사회분위기가 문화의 중심을 차지하게 되었고, 그것이 세월호 사건 해양공무원 甲의 정신세계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요즘 사람들은 순경시험에 합격하여 근무할 때, 위급하고 중요한 상황이 닥치더라도 사명감을 갖고 뛰어들려고 하지 않습니다. 사명감이 고귀한 가치라는 것을 배운 적이 없으니까요. `훌륭한 업적을 이룬 사람에게 박수 쳐주지 않는 문화`에서는 적극적 직무정신(사명감)을 기대하기란 힘듭니다.
수 년전에 일본 후쿠시마 원전사고가 터졌습니다. 그 원전사고에서 방사능 준위가 높아지자 800명의 원전 직원 모두가 철수하고, 단 50명만 남아서 원전 현장 상황을 보고하고 필요 가능한 응급조치 작업을 하였습니다. 필자는 후쿠시마 원전 사고가 터졌을 때, 한겨레신문 기자가 썼던 글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 기자는 다음과 같이 썼습니다.
`그들은 영웅이 아니라 단순 노무자이며 생계 때문에 방사능 위험 감수하고 있다. 만약에 그들이 생산직 근로자가 아니었으면 그런 위험한 일을 하지 않는 데, 사회적 약자계급이라서 희생당하고 있다`는 취지의 기사였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이런 기사와 칼럼이 한겨레 신문에 여러 편 게재된 것으로 기억하는 데, 거기서 주장한 내용은 경향신문 이택광교수(전교조동영상 유포자)가 편 論旨와 같습니다.
그 당시 일본 총리는 도쿄원전 직원들에게 작업장에서 빠져나오지 말고 헌신적인 모습을 보여달라고 호소 하였습니다. `당신들이 그 일을 하지 않으면 일본은 엄청난 위험에 빠지게 된다`고 일본총리는 마지막 재난현장에 남은 50인의 의인들을 설득했습니다. 그리하여 일부는 방사능누출 현장에서 나오고, 일부는 남아서 그 목숨 건 작업을 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한겨레 신문 기사처럼, `세상에 아무리 돈을 많이 준다고 해도 누가 자신의 목숨과 바꾸려 할 것이며 생계때문에 남아서 일한다는 주장이 말이 되는가`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도쿄직원들 중에 남은 50인은 자발적 희생의 길을 택했다고 보는 것이 상식에 맞을 것입니다.
그런데 한겨레신문은 그것에 대하여 국가에 의한 사회적 약자의 착취 내지는 그들이 사회적 약자여서 원치 않는 것을 어쩔 수 없이 감당할 수 밖에 없는 희생양들으로 규정한 것입니다. 이것은 이택광교수가 말한 것처럼 세월호사건에서 강남부자 자식이었다면 안 살렸겠느냐는 주장과 흡사합니다.(http://www.hani.co.kr/arti/international/japan/469281.html)
`사명감이나 숭고한 정신에 의한 헌신`을 `힘없는 약자로서 피할 수 없는 天刑`으로 몰아간 것입니다. 기사와 칼럼을 이런 식으로 써대니까, 그런 좌파언론의 기사와 칼럼을 읽고 영향을 받은 해양경찰관 공무원 甲은 ``내가 세월호 승객들을 위해서 왜 위험한 일을 감수해야 하나. 그런 일은 무궁화 4개인 총경들이 할 것이지 왜 나같은 힘없는 말단 9급 해경공무원에게만 하라고 강요하나`` 라고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한겨레신문 기사가 인용한 추측성 취재원 발언이 사실일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여러 정황상 그렇지 않을 것이라는 가능성이 더 큽니다. 한겨레신문이 사실관계가 분분한 상황에서 굳이 사실일 가능성이 적은 쪽을 선택해 해당기사를 작성한 이유는 이택광교수의 그것과 별반 다르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 필자의 판단입니다.
`훌륭한 업적에 대하여 박수 쳐 주지 않는 문화`로 만들어 `자부심지향형 인간`이 더 나오지 못하게 문화풍토를 악화시킨 장본인들이 바로 좌파진영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사명감이나 숭고한 정신에 의한 헌신`에 대하여 `힘없는 약자로서 피할 수 없는 天刑`이라거나 `웬만한 바보가 아니면 안하는 일`쯤으로 몰아갔던 것 또한 좌파언론이었습니다.
좌파 언론들은 수 십년동안 그런 짓을 해왔으면서 이제 세월호 사건이 터지니까 해경을 욕하고 있는 것입니다. 수십년동안 한겨레신문이 추구해왔던 정신세계와 세월호 구조작업을 소극적으로 수행했던 해경의 정신세계와는 과연 무슨 차이가 있는지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필자가 좌파진영 사람들에게 하고 싶은 말은, `남(해경)을 비판하기 전에 먼저 자신의 지난 날들을 돌아 보라`는 것입니다.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를 나무라니 그것보다 더한 꼴불견은 없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