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기념관과 아타투르크기념관
- 역사 망각한 백성에 미래는 없다
박정희기념관 건립 얘기를 처음 꺼낸 사람은 김대중이었다. 1999년 5월 대구를 방문한 당시 김대중 대통령은 자신이 박대통령의 박해도 받았지만 근대화를 이룩한 박대통령의 공로를 자신의 입으로 재평가하는 게 “뜻 있는 일”이라며 박정희 기념사업을 정부차원에서 적극 지원하겠다고 말했다.
이 말을 들은 신현확 전 총리 등은 DJ의 ‘진심’을 믿고 그의 제의를 수락했다. 이어 그해 7월 박정희대통령기념사업회가 출범했고 정부는 기념관 건립을 위한 국고보조금 200억 원을 책정, 국회에서 만장일치로 통과되었다.
기념관 공사는 2002년 1월 서울시가 제공한 상암동 공원부지에서 착공되었다. 그러나 그해 6월 정부는 월드컵을 앞두고 먼지가 발생한다는 이유로 공사 중단을 요청해 기초공사는 공정률 16.5%에서 중단되었다. 터파기 공사가 시작되었을 때 박정희기념관반대국민연대 등 시민단체들은 공사장에 몰려와 시위를 벌였다.
DJ는 국고보조금 지불에 조건을 달았다. 사업회가 100억 원을 모금하면 100억 원을 준다는 식이다. 사업회는 각계로부터 100억 원을 모금했으나 여러 가지 제약 때문에 보조금 100억 원을 받지 못한 채 공사는 2004년까지 지연되었다. DJ는 겉으로는 기념관 건립 지원을 약속하고 실제로는 각종 제약을 가해 공사를 방해했다.
2005년 출범한 노무현 정부는 출범하자마자 기념관 건립 재검토를 지시하고 국고보조금 200억 원을 취소하는 행정처분을 내렸다. 이유는 사업회가 약속한 모금을 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좌파정부가 앞장서 조성하는 반 박정희 여론 속에서 모금은 쉽지 않았으나 이 점은 참작되지 않았다.
사업회는 즉각 소송을 제기했고 1심과 2심에서 승소했다. 노무현 정권은 이명박 대통령의 취임을 한 달 앞둔 2008년 2월 사건을 대법에 상고했다. 대법원은 4월 23일 박정희 전 대통령 기념관 건립사업에 국고 지원을 취소한 것은 위법하다는 최종 판결을 내렸다.
-반박정희 여론으로 모금사업 흔들어
조선일보에 따르면 대법원 1부(주심 차한성 대법관)는 박정희대통령 기념사업회가 지난 2005년 행정자치부(현 행정안전부) 장관을 상대로 정부가 지급을 취소한 기념관 건립비용 208억 원을 지급해달라며 낸 소송에서 원고 승소 판결한 원심을 확정했다고 밝혔다.
1심(2005년 12월)과 2심(2008년 1월)에서 잇따라 기념사업회 측이 승소한 지 1년 3개월 만에 확정 판결이 나온 것이다. 대법원은 "정부가 보조금 집행을 부당하게 승인 거부하면서 사업 중단이란 결과가 초래된 것이 위법하다고 본 원심 판단은 옳다"고 판시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1999년부터 추진된 박정희기념관은 500억원을 모금하고, 국가보조금 208억원을 충당해 건립하기로 했다. 하지만 지난 2005년까지 모금액이 100억원 수준에 머물자 당시 행정자치부(현 행정안전부)는 기념사업회 측이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며 보조금 지급을 취소했고, 공사는 중단됐다.
서울고법 2심 재판부는 "2002년 현저히 증가하던 기부금 모금이 노무현 정권 출범 이후 저조해졌다"면서 "노무현 정권이 들어선 이후 이 사업에 대해 정권 내부의 비판적 시각이 더욱 강했을 것으로 짐작된다"며 사업 부진에 따른 책임이 정부에 있다고 판시했다.
이명박 대통령이 당선자 시절 내려진 항소심 판결 직후, 행정자치부가 이에 불복해 즉각 대법원에 상고하면서 기념관 공사 재개는 다시 1년 이상 지연됐다.
박정희기념관 공사가 근 10년 만에 다시 빛을 보게 된 시점이 김대중과 노무현 좌파정권에 대한 역사의 심판이 내려진 것과 일치하는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다. 특히 노무현 일족의 뇌물사건이 검찰의 도마 위에 오른 순간에 대법원 확정판결이 나온 게 신기하다. 역사는 가끔 우회할 때도 있으나 사필귀정의 순리를 간다는 교훈에는 변함이 없는 것 같다.
이 나라를 근대화시킨 불멸의 지도자에 대한 예우가 그토록 한심하고 비열했던 점을 생각하면 이 시대를 사는 후손들로서는 수치심을 지울 수 없다. 좌파 10년의 역사왜곡이 각 분야에 미친 못된 영향이야 헤아릴 수 없으나 특히 박정희기념관에 끼친 패악은 후세 교육을 위해서도 기록되고 기억되어야 한다.
터키의 수도 앙카라에는 무스타파 케말 아타투르크의 기념관이 있다. 그 안에는 보우타이에 말쑥한 정장 차림의 밀랍 입상이 서 있다. 캄캄한 기념관을 응시하는 아타투르크의 모습은 마치 살아 있는 사람처럼 방문자들을 압도한다. 조각을 잘 만들어서가 아니다. 그의 혼이 내방객들의 가슴 속에서 살아 숨쉬고 있기 때문이다. 중년의 한 관광객은 허락이 된다면 아타투르크의 손에 키스를 하고 싶다고 말했다.
-터키 분할하려던 유럽과 미국 음모 저지
아타투르크가 오토만 제국의 폐허에 오늘의 터키를 건국한지도 90년이 흘렀다. 그의 무덤이 보존된 기념관에는 지금도 수많은 터키 국민들이 몰려든다. 2007년에는 기록적으로 많은 2,500만 명이 찾았다. 앙카라통신에 의하면 기념관이 세워진 54년 역사에서 가장 많은 방문객 숫자라고 한다.
1938년에 사망한 사람의 무덤에 왜 이토록 많은 사람들이 오는가? 터키 헌법의 전문(前文)은 그를 “불멸의 지도자요 전대미문의 영웅”이라고 쓰고 있다. 터키 형법은 그를 폄하하는 행위를 범죄로 규정한다. 매년 그가 사망한 11월이 오면 모든 국민이 잠시 하던 일을 멈추고 묵념을 올린다.
2007년은 터키 역사에 격동의 해였다. 종교를 등에 업은 정치세력의 폭거로 국정은 마비되었다. 군부는 쿠데타 직전 사태까지 갔다. 그들은 사실상 3권을 장악했다. 국민들은 나라가 망하는 절망을 느꼈다. 시대가 불안할수록 아카투르크는 터키 국민의 가슴에 부활한다.
그는 미국인들의 우상인 조지 워싱턴이나 토머스 제퍼슨 같은 존재이다. 탁월한 군사 전략가인 아타투르크는 1차 대전 말 오토만 제국이 쇠락하는 틈을 타 터키를 점령한 유럽군을 격퇴하고 나라를 세웠다. 정치가이기도 했던 그는 가난한 이슬람 국가에 극단적인 속세주의 혁명을 강요했다. 언어와 복장과 심지어 문화 관습까지 바꾸면서 무슬림 세계와의 관계를 단절하고 현대적 터키의 기초를 닦았다. 그가 없었다면 오늘의 터키도 없다.
전시관에는 그의 체취가 묻은 물품들이 진열되어 있다. 담배 갑, 지팡이, 단도, 펜, 구두, 모자, 망토, 자동차, 보트, 심지어 머리빗까지 간직되어 있다. 여고생들이 유품을 보면서 연신 탄성을 토한다. “참으로 멋진 아저씨야.” 유럽 점령군이 흑해 연안에 한 줌의 땅 떼기로 만들려던 국경선을 아타투르크가 막지 않았다면 지금의 터키는 존재할 수 없었다. 지중해 해변도 에게 해도 사라질 뻔했다. 터키를 분할하려던 유럽과 미국의 음모를 저지한 사람이 아타투르크였다.
그의 이미지는 터키인들의 심저에 깊이 박혀 있다. “우리는 모든 것에서 그에게 빚을 졌다. 그는 하늘이 터키에 주신 선물이다.” 52세의 방문자는 그렇게 말했다. 터키 사회는 전환기에 있다. 경제가 발전해 EU 가입 준비를 하고 있다. 그러나 이슬람을 앞세운 군부 독재와 세속의 터키를 건설하려는 국민들 간 갈등은 여전하다.
-터키를 단결시키는 磁場같은 존재
지난 주 일단의 고등학생들은 피로 그린 터키 국기를 군부 지도자들에게 보냈다. 신문은 이를 대서특필했다. 이런 행동의 뒤에는 어김없이 아타투르크의 건국정신이 스며있다. 그를 너무 신격화 한다고 비판하는 사람도 있지만 어쨌든 그는 터키를 단결시키는 자장(磁場)같은 존재이다.
인터내셔널 헤럴드 트리뷴이 이 기사를 전한 2008년 1월 16일 한국 신문에는 ‘박정희기념관’ 건립이 차질을 빚고 있다는 뉴스가 게재되었다. 하필이면 이날 노무현 대통령이 퇴임 후 거주할 봉화 마을의 호화 사저 소식이 전해져 씁쓸한 대조를 이루었다.
박정희기념관 공사는 13년의 우여곡절 끝에 2011년 완공되어 2012년 2월 21일 개관되었다. 이날 일부 좌파 단체들은 박정희기념관을 “폐관하라”고 요구하는 시위를 벌였다. 결혼식장에서 신혼부부에게 “이혼하라”고 요구하는 것이나 다를 바 없는 폐륜이다. 위대한 지도자를 기릴 줄 모르는 후손에게는 미래가 없다. 아타투르크를 흠모하는 터키인들에게서 우리는 배워야 한다. 역사를 망각한 못난 백성으로 살 수는 없지 않은가? <조홍래 뉴스파인더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