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지영 “노란 완장의 추억”
- 노란 완장은 상식밖의 계율이 아니며 초법도 아니다

▲ '세계를 울린 벤쿠버의 감동' 대한민국을 감동과 눈물의 바다로 만든 김연아의 눈물
공지영의 노란 완장.
작가 공지영의 노란 완장의 추억을 잊지 못하고 있다. 일전 뼛속 깊숙이 민주당 물이 들어버린 손학규 대표를 향해 독설을 내 뱉더니, 이번에는 국민가수 인순이와 국민 여동생 김연아에게까지 독설을 퍼부었다. 대중에 가장 인기 있는 그들이 종편방송에 출연한 것이 비난 받아야 하는 것인지 상식을 앞세운 소시민은 어리둥절 하기만 하다.
공지영씨의 그 한마디는 공중파 방송의 8할을 장악한 기존의 방송 3사가 영구히 해먹으며 기득권을 세세만년 이으라는 주문과도 같다. 약자를 대변하는 것이 최고의 완장인양 목소리 높이던 공지영씨의 변절이 가슴 아픈 순간이다.
트위터리언의 따끔한 질책에 그 때는 “노무현 때”라는 노란 완장의 반격은 실로 대단했다. 노란 완장을 차고 중앙일보에 “즐거운 나의 집”을 연재하던 노란추억이 그리운 것이다. 그랬다. 한 때 노란 스카프에 백바지로 세상을 호령하던 때가 있었다. 그들은 세상의 모든 정의를 재단하고, 그들만의 잣대로 세상을 분할 했으며, 수백년 동학혁명까지 뒤지고 다니던 잔인한 세월이 있었다.
그러한 세월 대통령 노무현은 조선일보를 상대로 십수억이 넘은 손해배상 청구를 하며, 한겨레에 신문발전기금을 쾌척하려 했던 때가 있었다. 나만 잘하고 있는데 나만 못한다고 쓰는 것 같은 조중동은 그들에게 반드시 폐간시켜야 할 역사적 사명이었다. 신문발전기금이라는 칼로 펜을 꺽어 누르려던 광기의 세월이었다.
돈이라는 무기로 언론을 길들이던 세월이었다. 그러한 때 중앙일보에 “즐거운 나의 집”을 연재한 것은, 그들의 논리에 따르면 결코 자랑은 아닌 것이다. 그러나 공지영씨는 노란 완장으로 부끄러움을 덮는 재주를 부렸다.
자신의 노래를 듣고 싶은 관객이 있다면 무대에 서는 것은 가수의 생명이요, 의무이다. 동토의 제국 평양 무대에 선다고 가수를 비난하지 않는다. 스포츠 스타의 연기는 김일성 궁궐에서도, 만경대 실내체육관에서도 공연된다. 그러나 그곳에서는 스포츠 스타를 비난하지 않는다. 하물며 내 나라, 내 땅 무대에 선 그들에 무슨 자격으로 손가락질 할 수 있단 말인가.
공지영씨가 중앙일보에 즐거운 나의 집을 연재할 때, 전 남편은 소설의 연재, 게재, 배포 등을 금지하여 달라는 가처분 소송을 냈었다. 당시 전 남편의 주장은 소설 속 남편이 나로 인식될 게 뻔해 인격권과 프라이버시권이 침해 된다는 것이 이유였다.
이에 공지영씨는 답변서를 통해 “앞으로 전개될 소설 내용 중에 전 남편의 프라이버시를 침해할 만한 부분은 없을 것”이라고 했고, 법원은 “문학 창작을 중단 시킬 수 있는 수준의 가처분을 받아들일 수 없다”며 가처분 신청을 기각했다. 누구보다도 창작의 자유, 공연의 자유를 누려왔던 공지영이다.
노란 완장은 상식을 뛰어 넘는 계율이 아니며, 법위에 서는 초법이 아니다. 노란 완장 그것은 그들의 놀이일 뿐, 그들의 세상일 뿐 상식은 이를 허하지 않는다. 노란 완장으로 세상을 재단코자 한다면 공지영씨 가슴속 세상에서나 하라. 종편 방송에 출연한 가수와 스포츠 스타에게 도덕적 판단을 요구하는 공지영씨의 그 지독한 독선은 노란 완장의 추억 그 이하도 그 이상도 되지 않는 허망한 것이다. 그것을 무슨 자격으로 타인에게 요구하고 있는가.
노란 완장의 추억 그것도 공지영씨 가슴 속에나 간직하길 바란다. 첨언하여, 소설도 돈 벌기 위해 쓰듯 나도 큰 의미에서 글 쓰고 싶은 것 쓰는 알바다.
<프런티어타임스 최구섭기자 (www.frontiertime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