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민들의 독약, 전면 무상급식”
- 전면무상급식, 저소득층 수혜자의 혜택이 강제 몰수되는
전교조는 모든 구호에 “교육공동체”를 삽입한다. 그 어떤 사안이 되었든, 주장이 되었든 교육공동체라는 말은 상투적으로 사용된다. 언듯 들어보면 교육의 한목적성을 위한 구성원모두의 공동노력 이라는, 평등이라는 매우 진보적인 의미가 함축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실상은 자신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한 극단적 에고이즘의 표출일 뿐이다. 일례로 "교육공동체를 파괴하는 차등 성과금을 폐지하라"라는 성과급 반대투쟁의 구호를 외친다. 노력을 하든, 노력을 하지 않든 혈세로 지급하는 자신들의 떡에는 손대지 말라는 협박이다. 노력한자의 땀방울에 대한 보상이 어떻게 교육공동체를 파괴하는지 그 해괴한 논리에 기가 막힐 뿐이다.
전교조의 교육적 신앙은 평준화이다. 근대화를 위한 교육받은 인력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던 박정희 대통령시절 교육의 양적팽창을 위해 도입한 제도가 교육평준화이다. 박정희 대통령이라면 입에 거품 물고 비난에 여념이 없는 전교조가 박정희 대통령이 만든 교육평준화를 신앙으로 삼고 있어 역설적이기만 하다.
저들은 김일성이나 김정일에 대하여는 너무도 후한 평가를 내리면서 박정희 대통령에게는 입에 담지 못할 독설로 매도하는 집단이다. 그런 사람들이 대학평준화까지 부르짖는다. 자신들이 종사하는 초, 중, 고등교육을 월권하여 대학평준화를 부르짖는 주제넘은 오지랖의 향연을 벌린다.
평준화라는 제도는 교사에게 가장 편안하고 쾌적한 직장생활을 할 수 있는 최고의 복지가 된다. 아이들의 학업성취도가 높든 낮든 학교단위의 학업성취도 측정이 불가능한 것이 평준화이다. 따라서 교사는 아이들에게 질 좋은 교육을 제공하기 위하여 경쟁하거나 노력할 필요가 없다. 이제는 나아가 대학을 평준화하여 입시로 자신들의 실력이 검증되는 것 조차 싫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
한 교실에 학업성취능력이 제각각인 아이들을 몰아 넣고 교사는 중간 정도의 학업성취능력을 보이는 아이를 기준으로 대충 수업이나 때우면 된다. 학업성취능력이 뛰어난 아이는 수업에 흥미를 가지지 못할 것이고 지루한 수업이 될 뿐이다.
학업성취능력이 뛰어난 아이는 수업이 부실해도 사교육이나 개인적 노력을 통해 수업이외의 방법으로 학업을 성취하면 된다. 그러나 평균 이하의 학업성취 능력을 가진 아이는 수업내용을 전혀 이해할 수 없게 되면서 학업포기하게 된다. 학업이란 습득할 수 있는 능력에 맞춰 단계적으로 습득해야 교과과정을 이해할 수 있다.
사칙연산을 이해하지 못하면 방정식을 풀수 없듯이 단계적으로 습득해야만 원하는 목표에 도달할 수 있다. 수업을 이해 못한 아이는 결국 공부를 포기하게 만든다. 교육평준화의 가장 큰 피해자는 학업능력이 떨어지는 아이들이 된다.
아이들에게는 지옥인 교육평준화는 교사에게는 천국이다. 대충 수업만 때우면 되고, 학교 단위별 학업성취도 측정이 불가능한 평준화로 인해 가르친 결과에 대해 책임질 일이 없다. 전교조는 목숨 걸고 옹호하는 교육평준화 핑계중 하나가 소외계층의 교육기회를 제공한다는 황당한 발언을 한다.
그러나 교육평준화는 가난한자에게는 신분상승이나 계층이동을 원천적으로 봉쇄하는 노비문서이다. 부자들은 공교육을 뛰어 넘는 사교육을 구매하면 된다. 모든 학생에게 질 떨어지는 공교육이 제공되고, 부자들은 그 질 떨어지는 공교육을 뛰어넘는 질 좋은 사교육을 구매하여 아이에게 주면 된다.
부자들은 평준화야 말로 합법적으로 자신의 부와 지위를 교육을 통해 대물림할 수 있는 해방구인 것이다. 가난한집 아이들은 교육을 통한 신분상승, 계층이동이 원천적으로 봉쇄 되었고 개천에서 용나기는 틀려버린 세상이 되었다. 평준화의 역설이다.
북구유럽을 비롯한 몇몇 복지 선진국이 평등을 앞세운 교육을 하다 이제는 대부분 폐기처분 하고 있다. 스웨덴의 스쿨 초이스, 핀란드의 엄격한 교원평가, 독일의 브레인 업 등 평등교육이 가져다 준 폐해를 극복하기 위하여 교육개혁에 나선지 오래이다.
전교조가 부르짖는 교육평준화는 결국 가난한자, 가난한집 머리 좋은 아이, 가난한 집 공부하고픈 아이에게 독약이 되었다. 평등을 앞세운 교육평준화가 재앙이 되었듯 아이들의 평등을 앞세운 무상급식이 가난한자에게 재앙이 될 것이다.
이미 무상급식을 지원받는 아이들이 배 아프다고 부자에게도 그들과 똑 같은 밥그릇을 달라는 것이 무상급식이다. 무상급식은 강제로 군복을 입히고, 머리를 깍은 절대적 평등이다. 개개인의 차이는 있을 수 없다. 같은 것은 같게, 같지 않은 것은 달라야 한다.
무상급식을 받는 아이의 정보가 공개되는 것이 문제라면 프랑스식으로 급식주체와 급식비 징수주체를 이원화 하면 간단하다. 평등을 가장한, 아이의 인권을 가장한 무상급식 구호의 본질이 당연히 무상급식을 지원 받아야 할 밥그릇을 배부른 자신들에게도 나누어 달라는 것으로 결론이 나고 있다.
절대적 평등을 앞세운 교육평준화는 학업성취도가 떨어지는 아이나 또는 사교육에서 소외 된 아이들에게 가장 큰 피해를 주었다. 평등을 가장한 무상급식도 가난한 아이들에게 돌아갈 재원을 뺏는 것에 불과하다.
이미 지원받고 있는 무상급식 수혜자의 혜택이 몰수 되는 것이다. 결국 그들이 가장 큰 피해자가 된다. 국가예산은 한정되어 있다. 퍼내고 퍼내도 마르지 않는 샘물이 아니다. 무상급식 재원을 아껴 저소득층을 위한 방과후 수업 등이나 다른 지원을 통해 사교육에서 소외 된 아이들을 위해 지원하는 것이 옳다.
교육적 결과의 평등은 존재할 수 없고 있어서도 아니되지만 최소한 교육받을 기회를 공평하게 제공하는 것은 사회의 의무이다. 무상급식은 공평하게 교육받을 기회를 빼앗게 된다.
교사의 최고 복지가 된 교육평준화가 사교육에서 소외 된 저소득층을 괴롭히고 있듯이 무상급식도 가난한 사람의 밥그릇을 몰수하는 것이다. 교육평준화는 전교조의 신앙이다. 그 신앙의 연장선이 무상급식이다.
곽노현이 서울시 교육감에 당선 된 직후 취임준비위 태스크포스(TF)팀에서 일할 37명의 파견교사 중 33명의 전교조 교사였다. 전교조의 “교육공동체”와 “교육평준화” 의 양두구육이 고스란히 녹아들어 갈 수 밖에 없는 무상급식이다.
<정문 프런티어 기고논객haosta@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