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경동 체포영장 "속 시원하다"
- "영장 발부로 달라질 것 없다" 떼법 우선주의 만연!
26일 미 연방 하원의원인 루이스 구티에레즈는 백악관 앞에서 10여명과 같이 시위를 벌이다 경찰에게 수갑이 채워져 연행 되었다. 고위 정치인이 사소한 불법행위로 인해 수갑이 채워져 연행 되는 것이 전혀 낮 설지 않은 미국이다.
만약 우리나라에서 말단 경찰이 국회의원을 저런 식으로 수갑을 채워 연행한다면 정치탄압이라고 난리가 났을 것이다. 세계 패권국가의 힘이 느껴진다.
떼법으로 얼룩진 “희망버스” 기획자 시인 송경동에 체포영장이 발부 되었다. 떼치가 아닌 법치의 국가 대한민국이다. 당연히 발부 되었을 체포영장 이었다. 부산지법에서 한 번 기각 된 후 재신청을 통해 발부되었다는 것이 아쉬울 뿐이다.
대한민국은 민주국가 이다. 국민에 의해 선출 된 대표자에게 권한을 위임하고, 위임자가 국가의사를 결정하는 대의민주국가이다. 광장에서 외치는 군중의 구호로 국가의사가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군중으로 질서가 유지되는 것도 아니다.
로마광장에 모인 군중의 소리가 민주주의인 것처럼 착각한다. 그러나 로마는 시민과 비 시민에 대한 차별이 엄연했던 계급사회였다. 몇몇 명문귀족이 대부분 국가 의사를 결정했던 독재국가였다.
로마의 광장정치가 민주원리에 부합한 것 같다. 그러나 시민혁명이 모든 시민에게 자유의사 결정권이 주었다. 모든 시민이 국가의사 결정에 차별 없이 참여 할 수 있게 하였다. 그렇게 민주주의는 시작 된 것이다. 그리고 대중 민주주의가 가능케 한 다수결을 만들었다.
광우병 촛불시위 때 광장을 메운 2-3만 명 군중의 외침이 국민을 대변 했을까?
광장에 모인 군중의 목소리는 모인 그들의 목소리일 뿐이다. 그들은 미국산 쇠고기가 청산가리보다 더 무섭다 했다. 먹으면 뇌에 구멍이 뚫린다고 했다. 그러나 지금의 현실은 미국산 쇠고기가 호주산 쇠고기와 시장점유율 수위를 놓고 다툰다. 광장민주주의는 이것을 설명 할 수 없다.
광장에 모인 시위대 목소리크기가 민주의 척도라면, 광장에 모인 군중을 현란한 연설로 우레와 같은 박수를 받은 히틀러는 당대의 민주성군이다.
한발자국 물러서면 광장민주주의가 국민의 뜻을 얼마나 왜곡시켜 왔는가는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우리는 대의 민주주의를 선택했다. 그것은 국민 모두를 대변하지 못한다. 그래서 비민주적이라 할 수 있다.
그러면 우리와 다르게 국민 모두가 참여하지 못하고, 각 주에서 뽑은 선거인단이 대통령을 선출하는 미국은 비민주국이 되어야 한다. 최소한 우리보다는 열등한 국민의사 반영이니 당연한 것이다. 그러나 미국은 세계에서 가장 민주적인 국가이다.
모든 국민의 목소리가 반영되는 직접민주주의가 민주적이라는 것에는 이견 없다. 그러나 직접민주주의 실현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따라서 세계의 민주국가로 이름 지어진 모든 국가는 대의민주주의를 통해 민주주의 이상을 실현하고 있다.
노사합의를 마친 1,000명의 근로자와 노동조합은 김진숙의 불법점거로 현장복귀를 하지 못하고 있다. 한진 중공업은 2년치 임금을 지급하며 해고자를 위한 최대한 배려를 하였다.
희망퇴직자 절반이 훨씬 넘게 회사의 협상안에 동의했다. 170명의 희망퇴직 거부자로 인해 한진 중공업은 불법으로 얼룩진 파행으로 치달았다.
평화와 인권을 이야기하는 희망버스이다. 그러나 크레인 고공시위를 벌리는 민주노총 부산지부 지도위원 김진숙에게는 고통스런 고공시위를 중단치 말라는 압력이다.
많은 사람이 희망버스를 탈 수록 김진숙은 크레인의 더 높은 곳으로 올라야만 한다. 포기 하고 싶어도 포기 할 수 없다. 희망버스를 탄 그들에게 배신자 소리는 들을 수 없기 때문이다.
거리를 메운 검은양복의 조직폭력배는 폭력을 행사하지 않아도 존재 자체가 지켜보는 사람에게 위압감과 불편함을 준다. 정상을 벗어난 휠체어를 앞세운 수천명의 시위대는 지켜보는 사람에게는 무법천지의 세상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들은 단순하게 행진만 하지 않았다. 희망버스 시위대 스스로가 3차시위에서는 “희망청소부”까지 모집하고 있다. 시위를 저지하는 경찰에게 부상을 입히고 경찰장비를 파손하여 경찰은 손해배상소송을 청구할 예정이다.
시인 송경동은 집시법을 위반했다. 또한 1차 희망버스 참가자 400명이 영도조선소를 무단으로 뚫고 들어가 진행한 집회를 주도한 혐의도 받고 있다. 그것은 엄연한 불법이다.
송경동 시인은 모 인터넷 신문사와의 전화통화에서 "영장이 발부됐다고 달라질 건 없다" "도리어 이를 계기로 더 많은 사람이 희망버스에 동참할 것이다. 오히려 고마운 일"이라고 밝혔다. 떼법 우선주의에 충실한 답변이다.
시인은 아름답고 추한 것을 노래한다. 밋밋한 중간은 없다. 시인의 눈은 크레인 불법점거하고 고공시위를 벌이는 김진숙을 아름다운 존재로 보았다. 이성을 이야기 하는 자는 추한 것으로 보았다.
사랑과 생명을 노래해야 할 시인이 “떼법버스”에 열사의 시를 실어 보냈다. 스스로 노래했던 열사 김주익이 죽어간 자리에 시사적 터치로 김진숙을 세워 놓아야 할까?
그것이 정의고 평등인가?
<정문 프런티어 기고논객haosta@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