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남자와 결혼했던 '미녀(美國女人)'
- 낯선 일본의 식민지로 딸을 시집보냈던 아버지의 마음은 어땠을까?

▲ 프런티어타임스 이태준 총괄국장
사랑의 기쁨
말로 어찌 다 하리, 임께 대한 내 사랑의 깊이여.
나는 그와 같이 살고, 그와 같이 일하노라
세상에 아무 것도 이 사랑에는 못 비기리.
변치 않는 임의 사랑은 부귀에서 올 수 있는 모든 복보다도 귀해라
우리 생활이 이렇게 검소하고 원시적이기로 그것이 무엇이냐,
가다가 빈궁에 쪼들리기로 그것이 무어냐.
(중략)
나는 가족도 친구도 고국도 여러 사람에게 촉망받던 내 직업도 버렸노라
임의 사랑을 찾아 나는 천애만리의 생소한 타국에 따라왔노라
못 미더워하는 사람들은 내 장래가 위태하다 하건마는
나는 두려움없고 내 믿음은 흔들림 없다.
임의 사랑을 얻으려고 나는 버린 것도 많건마는
내 生은 풍성한 기쁨에 차고 고통으로 더욱 향상되었노라
(하략)
1937년 에그니스 데이비스 킴
(영어로 쓴 시를 작가 '이광수' 선생이 번역한 것임)
한 20년전쯤 서울이 민주화열풍에 휩쓸려 날마다 최루탄 냄새가 진동하고 붉은 띠를 멘 군중들이 날이면 날마다 떼지어 거리를 누빌 때 쯤이었는데... 어느 날 집에서 무심코 펼친 신문을 읽어나가다 전면을 차지한 서양 할머니의 대담기사가 눈에 띄길래 찬찬이 읽어보았다.
나라 없던 일제시대 때 조선사람과 결혼해 이 땅에 왔다가 한 평생을 보낸 미국 할머니의 이야기였다.
그 할머니는 이름도 처음 들어본 조선이라는 나라에 와서 한양 도성 북쪽 홍제동, 수색 근처에서 살림을 차리고 이날까지 살아왔는데 그동안 남편은 일찍 죽고(자식은 없었음) 이 미국여인 혼자 살다가 이제 하느님의 부름을 받을 날이 다가오자 자신이 죽고 나면 전 재산을 연세대학에 기증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그것이 신문사에 알려져 인터뷰 자리를 마련한 것이었다.
그 옛날 1930년대에 미국에 유학온 조선 청년과 사랑에 빠졌던 이 파란눈의 뉴욕 아가씨는 당시엔 드물게 대학원 공부까지 마친 재원으로 꿈도 많았지만 이름도 처음 들어본 나라에서 온 청년과 눈이 맞아 모든 걸 다 접고 조선인의 아내가 되기로 결심하고 또 그 결심을 실행했던 여인이었다.
그녀가 처음 아버지에게 결혼할 남자친구가 있다는 이야기를 했을 때 그의 아버지는 환한 얼굴로 '누구야?'라고 물었고 딸이 저 멀리서 온 아시아 남자라 답했을 때 아버지는 그만 얼굴이 굳어졌다.
1930년대 미국은 인종차별이 아주 심할 때였고 아시아 사람이라면 중국 아니면 일본인데...
아버지는 난감한 얼굴로 어느 나라냐고 물었고 딸은 '코리아'라고 답했다.
아버지는 처음 듣는 나란데 그게 어디 있는 나라냐고 물었고 딸은 일본 식민지라고 설명했다.
아버지는 아무 말이 없었다.
일주일 뒤.... 아버지는 딸을 불러 마을근처 들판으로 데리고 갔다.
그곳에서 아버지는 지하수를 찾아 우물을 파는 법, 나무를 베는 법, 벽돌을 만드는 법, 그리고 원시상태에서 생존에 필요한 여러가지 생존술을 딸에게 전수했다. 며칠 동안.....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내가 도서관에서 코리아라는 나라를 찾아봤더니 그곳은 아직 수도시설도, 전기도 제대로 되어 있지 않더라. 네가 그곳에서 살아갈려면 필요한 기본 생활지식을 가르쳐 줘야겠다해서 이런다."
그리고 딸의 행복을 기원해 주면서 결혼을 허락했고 둘은 결혼식을 마치고 배를 타고 태평양을 건너 조선에 왔던 것이다.
이 부분에 이르자 내 눈에서 갑자기 뜨거운 눈물이 쉴새없이 흘러, 딲아도 딲아도 계속 흘러 주체할 수가 없었다.
나 같으면 내 딸이 이름도 처음 들어보는 미개한 나라(미국인 시각으로) 시집가겠다고 했을 때 이렇게 할 수 있을까.....?
눈물 범벅이 된 채로 그 인터뷰기사를 다 읽고 나 한참 생각에 잠겼다.
내가 이 미국할머니를 좀 더 자세하게 알게 된 것은 최근 이광수의 수필 '창조의 생활' 을 읽다 이 수필의 소재가 된 '파란눈의 새댁' 이 바로 이 할머니였다는 것을 알고 나서다.
그의 남편 김주항(金周恒)은 문인 이광수의 제자로 이광수에게 인사를 드릴려고 방문했다.
마침 이광수가 출타 중이어서 만나지를 못했는데 그에 대한 답례로 이광수가 제자 김주항의 집을 찾았으나 이번에는 김주항이 부산으로 대리목사로 가는 바람에 만나지 못하고 대신 파란눈의 미국출신 아내를 만나 둘이 이야기를 나눈 뒤의 소회를 그의 수필 '창조의 생활'에서 "나는 오늘 처음 사랑이라는 것을 보았소" 라는 말로 그 수필에 남겼다.
김주항은 귀국해서 마땅한 직업을 찾지 못했던 모양이다.
그녀는 이 땅에 와 있는 서양인들을 위한 음식을 만들어 공급하기도 하고 돼지도 키우고 채소도 재배하고 그렇게 어렵게 살다 해방후에는 영어강사로 생활을 해결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녀의 이름은 '에그니스 데이비스 킴'으로 그녀의 처녀 때 성(姓)은 모르겠으나 지금은 성도 이름도 다 잊혀진 채 사라졌지만 그녀의 행적에서 내가 받은 감동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위에 적은 시는 그녀가 조선에 와서 남편 김주항과 함께 둘이서 그녀의 아버지가 가르쳐준대로 벽돌을 만들어 쌓고 나무를 베고 짤라서 지은 장난감 같은 집에서 살면서 쓴 시 '사랑의 기쁨' 을 이광수가 우리말로 번역한 것이다.
세월이 많이 흘러 세상도 많이 바뀌고 그녀가 손수 벽돌을 만들어 지은 집이 있던 언덕받이 땅도 땅값이 폭등해 자신도 모르게 큰 재산을 만들었지만 그것을 연세대학에 기증하고 떠났다.
그녀는 이제 일생을 마감하고 이땅에 묻혔지만 내 머리엔 그녀가 보여준 사랑의 감동이 선명히 찍혀있다.
몇년전 소록도에서 일생의 대부분을 헌신했던 오스트리아출신의 두 수녀(修女)가 이제 몸을 움직일 수 없어 나환자들을 위해 더 이상 봉사할 수 없게 되자 소리없이 소록도를 떠났다는 기사를 읽었을 때도 내 눈에 눈물이 맺혔고 목이 메었던 적이 있었다.
나의 성격이 좀 직선적이고 비타협적이라 이를 늘 걱정하시던 나의 선친(先親)은 눈감기 직전 나에게 "종교를 가져라"하는 좀 이상한 유언을 하셨는데 나는 아버지의 유언을 실천할려고 교회에 나가 세례도 받고 찬송가도 열심히 불렀으나 도저히 신앙심이 일어나지 않았다.
차라리 나 혼자 집에서 성경책을 읽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자 교회다니는 걸 그만 두었다.
몇년동안 교회다니면서 느낀 것은 우리나라 사람들의 종교관은 원시 기복신앙수준을 넘지 못한다는 것이 내가 내린 결론이었다.
그것은 기독교만 그런 것이 아니라 불교나 다른 종교도 마찬가지라 생각한다.
얼마전 법정 스님이 입적했다고 한 며칠 온 언론이 요란했다.
법정스님에 대해서 아는 바가 별로 없는 나로서는 왜 그러는지 전혀 이해할 수가 없는 '냄비들의 소란'일 뿐이었다.
<프런티어타임스 이태준 총괄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