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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근한 고향 쓸쓸한 고향 옛 어른들은 모두 보이지 않고... 2008-07-02
박교서 evergra@paran.com

1일 이른 새벽에 나는 내가 태어난 평택시 포승면 석정리를 가기 위해 영등포 역으로 갔다.그곳에서 한 정거장을 더 내려가 구로 역에서 미리 약속을 했던 둘째와 셋째 형님들을 만났다.

오전 6시 31분 천안행 지하철을 함께 탔다.물론 특별한 목적이 있어 모처럼 연로한 형님 두 분 들과 고향에 함께 내려가면서 여러 가지 얘기들을 나누며 가다보니 지루하지 않게 평택역에 도착했다.

누구에게나 고향은 어머님 품처럼 편안하게 느끼는 곳 이다.
그러나 젊어서 가는 고향과 주름살이 깊은 나이에 찾아가는 고향은 받아들이는 느낌이 너무나 달랐다.

어릴 적에 놀던 좁은 길은 모두 흔적조차 없어졌다. 아예 풀 섶으로 뒤 덮혀서 사람이 다니지 못할 정도로 변해 버렸다.어디를 가나 시멘트 포장도로로 넓게 확장되었다.고향은 인적도 몹시 드물었다.그래서 쓸쓸한 분위기 였다.

부모님들은 물론 어릴 적에 나를 키워 주셨던 형수님 마져 이세상에 계시지 않는다.
그래서 고향은 언제나 어머님 품처럼 안락하게 느껴지지 않았고 오히려 쓸쓸한 감마져 들었다.
▲ 필자가 태어나서 중학교 때 까지 계속 살아왔던 집
집에서 3km 떨어진 곳에 잘 만들어 놓은 500평 규모의 지하 납골당에 안치 행사를 모두 마치고 난 후에 필자가 태어난 집으로 돌아와 집 주변을 돌아봤다.우선 뒤란을 둘러보았다.

그 곳만은 내가 어린 시절을 살았던 때하고 크게 변하지 않았다.다른 점이 있다면 배나무와 감나무 포도 나무가 새로 심어져 있었다.그러나 장독대 만은 그대로였다.내가 중학교에 나닐 때로 기억이 난다.아버지께서 장독대를 돌과 세멘트로 네모나게 만든 일들이 떠 올랐다.

그러고 난 후에 옆에 날자를 적어 놓았는데 그 글이 지금은 50 여년이란 세월이 흘러가다보니 선명하게 눈에 들어오지를 않았다.

우리 집 장독대는 다른 집에서는 흔히 볼 수 없는 조상의 손맛과 얼과 맥을 이어오는 큰 간장독이 하나 있다.
내가 어릴 적에도 근 150년이 다 되어 간다는 말을 들었다. 지금으로 따진다면 200년 가까이 된다고 볼 수 있다.

그것은 바로 큰 며느리가 간장독이 완전히 떨어 지지 않토록 관리를 맡아서 전통을 잇고 있는 것이다.
제삿날이나 혹은 명절 때만 먹는 간장이라고 들었다.

그 안을 들여다보게 되면 간장 소금이 덕지덕지 독에 붙어 있음을 본 기억이 있다.50여 년 전에 어머님이 하시는 말씀이 기억이 새롭다.간장이 떨어지지 않는 것은 몇 년에 한 번씩 부족한 양 만큼 조금씩 정성 들여서 우리집 내력으로 오는 독특한 장 담그는 방법으로 간장을 끊여 보충해 온다는 것이다.

▲ 200년이 다 된 간장 독이 있는 기자의 고향 장독대

▲ 영리하다는 진도개는 왜 나를 보고 그렇게 짖어 대는지 서운했다.
모처럼 내가 태어난 집을 찾아 갔는데 진도개는 이방인 취급하면서 사정없이 짖어대고 있었다.그럴 때 나는 속으로 이놈아 나는 이 집에서 태어나고 중학교 까지 살았던 주인 이란다. 이러한 주인을 알아보지 못하는 개에 대해서 서운한 느낌마져 들었다.

나는 평소 내가 태어난 시골 집을 자주 들르는 편이 아니 었다.부모님이 돌아가시고 특히 어머님 대신에 어린 시동생인 나를 키워주다 시피 했던 형수 님 이 세상을 떠난 후에는 웬 일인지 고향에 가는 일이 흔치 않았다.

그러니 우리 집 시골 진도개가 나를 보고 심하게 짖어 대는 것도 어쩌면 당연하다는 느낌마저 들었다.앞으로 시골 고향을 정겹게 자주 들러 달라는 바람을 호소하는 듯해 보였다.

그래서 나는 새로운 각오를 하게 되었다.가능하면 꼭 어릴 적 고향의 따뜻한 품을 그리면서 태어난 집을 찾아 아름다운 고향의 향기를 맡을 것이라고 마음먹었다.

이번에 형제들과 사촌들이 한꺼번에 모두 고향을 찾은 것은 특별한 대종회의 납골당 건축공사 마무리와 함께 조상들을 한곳으로 모시는 집안의 큰 행사에 참석하는 일이었다..


▲ 벽에 농삿일에 사용하는 농기구 들이 가즈런히 걸려 있다.

▲ 80이 되신 큰 형님과 차를 기다리며..

우리 형제 일행은 다시 서울 방향으로 발길을 돌렸다.먼저 평택 지하철 역으로 돌아오는 길에 충주에서 고등학교 교장선생님을 하다가 정년을 마친 사촌동생 등과 안중의 중국집에 둘러서 고향의 자장면 맛을 보기로 했다.

아무리 시대의 많은 변화에 휩쓸려도 고향은 역시 정겨운 맛을 간직하고 있었다.
태어난 곳에서 보는 온갓 풀과 산과 밭에서 자라나는 나무와 식물들이 다른 감정으로 피부에 와 닿았다.
그래서 고향은 누구에게나 늘 향기가 머물러 있는 아늑한 곳이라고 생각하면서.....


▲ 음식점에서 고향의 자장면 맛을 보기 위해 앉아 있다.4촌과 함께..



[덧붙이는 글]
지금으로부터 285년전 이조 숙종때 궁의 최고 경호총책이었던 절충장군 후손(潘南朴氏)들이 경기도 평택군 포승면 석정리에 그들의 조상과 후일 그들이 돌아갈 납골당을 조성하였다. 비석에는 아직 생존해 있는 사람들도 가 납골당을 만들어 놓고 후에 사망하면 비문에 사망날자만 새겨 놓게 되어 있었다.저도 후일 이곳으로 돌아오기 위해 가 납골당을 만들어 놓았다....그런데 나의 비문을 자세히 보니 內子의 본관이 배천조씨를 한양조씨로 새겨져 있는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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